아빠 뭐해?
권복기 외 지음 / 이프(if) / 200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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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아버지'와 다르게 살고 싶은 '아빠'들의 새로운 육아 이야기, 라는 부제가 붙은 책. IF에서 펴낸 아빠들의 육아일기이다. 별 생각없이 집어들었는데 의외로 재미가 쏠쏠하다.

 아빠의 육아일기라는 흔치 않은 썰을 풀어낼 수 있는 필자들이니 이들이 가부장적 사고나 보수적인 성역할 분담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남성들일 거라는 건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이 중 대부분의 아빠들이 상당한 수준의 교육을 받고 언론이나 출판, 교육계나 시민단체 등에서 종사하는 사람들이다. 어느 글인가에 나오는 표현대로 '가정을 잘 돌보지 않고 아주 가끔 집에 와서 처자에게 한두 마디 던지고는 어디론가 홀연히 사라져버리는' 우리 사회 절대다수의 "독립군" 아버지와는 꽤 거리가 있는 이들이란 거다.

 그렇다고, 여성잡지에 가끔 등장하며 이땅의 힘겨운 아주머니들에게 신종 판타지를 제공하는 기사들처럼 환상적인 가사, 육아참여 게다가 상당한 애처가 노릇까지 하는 그런 아빠들은 아니다. 오히려 책을 읽다보면, 이런 육아일기까지 쓸 정도의 사람들조차 얼마나 가부정적 이데올로기에 장악당해 있는가, 가사나 육아를 몸으로 자기것으로 만든다는 것이 남성에게 얼마나 요원한 일인가를 절절하게 읽어낼 수 있다. 아마도 육아에 참여하는 정도로는 대한민국 5%내에 들 이 필자들조차도, 육아나 가사참여에 대한 고민없음, 비자발성과 게으름 등을 내보였고, 극단적인 상황에서는 극심한 가부장성을 드러내기조차 했던 것이다. (심지어는 아내폭력의 경험을 실토한 필자마저 있었다!) 물론 남성들이 자기 내부의 반동적 경향을 인식하고 고백하는 것 자체가 우리 사회에서 흔치 않은 일이긴 하지만 말이다.

 이 책은, 남성이 페미니스트 (이런 단어가 거북스럽다면, '말로만'말고 '몸으로' 성평등을 구현하는 사람들)가 되는 것이 얼마나 지난한 일인가를 보여주는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한편, 그런 그들이 결혼과 육아를 통해 어떻게 변해가는지를 흥미진진하게 보여준다. 이 글을 쓴 아빠들 중 상당수가 딸을 두거나 딸만 두고 있다는 건 그저 우연에 불과한건지 궁금하다. 딸을 낳은 아빠들은, 딸을 키우다보니 페미니스트가 되어갈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페미니스트란, 머리로만 말로만 페미니스트가 아니라 몸으로 구현하는, 적어도 구현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을 말한다.) 어떤 모임에서 가부장적 감수성과 성평등에 대해 발표했다가 "당신, 딸 때문에 그렇게 민감한 거 아니냐?" 하는 경우없는 질문에 그렇다, 그게 뭐 잘못이냐고 따졌다는 권혁범 아빠(대전대 교수, 페미니스트의 시각을 드러내는 칼럼도 꽤 쓰셨다)의 이야기는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아들만 둔 부모들은 아무래도 이해가 관념적인 반면 딸이 있는 사람들은 차별의 언어, 제도, 구조, 공간에 대해 예민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는데 백번 옳은 말이다.

 하여간 이들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 육아일기이면서 인생역정의 발자취이자 자서전이고 아내와의 연애및 결혼생활 보고서이기도 하다. 육아 및 가사에 대한 불참여와 가정일을 방기한 끝에 별거나 이혼 직전까지 갔던 이야기(그 중 IF에 육아일기를 연재하는 분도 있었다. 아 쇼크!), 가족을 소재로한 만화를 그리지만 정작 일 때문에 아이들과 소통하지 못하고 아내를 집안일에 파묻혀 소진하게 만드는 이야기(비빔툰의 홍승우 작가, 쇼크였다!).. '끝'까지 가고 나면 이들은 고민하고 자신의 생활과 태도를 바꾼다, 그리고 새로운 균형상태를 찾아간다.

 한편 이 아빠들의 글은, 육아일기로서, 아이낳기 키우기라는 본질적 경험의 위대함, 고됨, 아름다움, 기쁨, 슬픔, 행복, 회한, 짜증 등을 다양한 스펙트럼의 글쓰기를 통해 보여준다. 한 인간의 부모가 된다는 것에 대한 아무런 생각도 고민도 준비도 없이 얼렁뚱땅 아빠가 되는 황당함. 조금씩 아이에게 정을 붙이고 아빠와 아이로서 연결되어 있음을 느낀다 (이 단계는, 육아에 제대로 참여를 해야 느낄 수 있다고 아빠들은 이구동성 말한다). 처음 아이가 길 때, 걸을 때의 기쁨. 먹이고 재우고 치우는 것이 전부인 갓난아이 기르기의 짜증스러움, 사람을 기진맥진하게 만드는 고됨. (한 아빠는, 백두대간 종주할 때보다 힘들었다고 한다). 그렇게 품에 안아 키워도, '본격적인 사춘기로 접어들어 아빠 앞에서 갑자기 시무룩하고 수다보다는 침묵으로 일관하는' 딸을 보며 둥지에서 떠나보내야하는 연습을 해야하는 쓸쓸함, 아쉬움.

 나와 나의 '아빠'를 생각하게 된다. 어릴 적의 기억이나 사진을 들여다보면 아빠와 나는 활짝 웃고 수다떨고 장난치고 있다. 그러나, 아마도 고등학교 시절부터인 것 같은데, 서먹해지고 급기야 한때는 '아버지'를 상당히 미워한 적도 있다. 그의 가부장적인 모습들을 발견하게 되고 권위적인 면모들에 반발하고 체계적으로 나자신의 분노를 합리화시키고. 아마도 많은 딸들 아들들이 겪게 되는 일일 것이다. 기성의 체제에 대한 반발과 우리 기성세대의 구체적인, 가장 가까운 현신인 아버지에 대한 반발은 아무래도 같이 겪어가게 된다. 이 책 속의 아빠들도 나와 비슷한 과정을 겪은 경우가 많다. 권위적인 아버지에 대한 반발, 감정적 물리적 단절, 그러다가 아이를 키우면서 자신의 아버지를 역사를 가진 개인으로 바라보게 되고 측은지심으로 조금씩 받아들인다. (이건 '너도 애낳아서 키워보면 다 이해할거다'라는 종류의 언설과는 좀 다르다)

 예전부터 결혼은 안해도, 아이는 못낳아도, 키워는 보겠다는 생각을 품고 있던 터였다. 나 자신도 미숙하고 게으른 인간인데 다른 한 인간을 세상에 내보내겠다는 무모함, 이 책을 보면 나같은 비혼 처자, 총각들만의 두려움은 아닌 듯하다. 이미 아이를 낳아 키우고 있는 아빠들 역시 다를바 없더라. 지금은 그저, 인생에서 가장 본질적인 경험이라는 아이 낳기 키우기를 겪어보고 싶다는 정도지만, 막상 낳아서 키우게 되면 그 느낌은 사뭇 다를 것이다. 이 책은 아직 내게 미지인 육아의 세계를 흘끗 곁눈질할 좋은 기회를 제공해주었다. 출산을 앞둔 부모는 물론, 아이를 키우고 있는 부모, 결혼을 할 처자, 총각들, 아울러 결혼 생각이 없는 처자 총각들에게도 일독을 권할 만하다. 내가 이만큼 살기 위해, 앞으로 살기 위해 몸으로 겪어내야하는 과정들에 대한 고민을 해볼 수 있다. 꼭 육아가 아니더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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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째 아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
도리스 레싱 지음, 정덕애 옮김 / 민음사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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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대 런던 근교, 평범한 중산층 핵가족의 형성(곧 '아내'와 '남편'이 될 두 남녀의 운명적인 만남)부터 붕괴까지를 차분-하게 그려낸 소설이다. 해리엇과 데이비드는 혼전 성관계, 찰라적인 연애가 난무하는 도시 속에서 고리타분하다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자신들의 신념, 이상적이고 아름다운 가족에 대한 신념을 꿋꿋이 지키면서 사는 쇤님들이다. 어느 겨울 파티에서 서로를 발견하고 말 한마디 나눠보지 않은채 상대가 자신의 천생연분임 알아본 그들은 곧 결혼을 한다. 그리고 허리띠 졸라매고 고생한 끝에, 런던 근교를 샅샅이 뒤져 찾아낸 빅토리아풍의 크고 아름다운 저택을 손에 넣는다. 둘의 가족들 대부분 이 저택의 구입을 어리석은 짓이라고 (넘 비싼데다가 얘들은 이 저택을 줄줄이 낳은 자식들로 그득그득 채우겠다는 야무진 꿈까지 꾸고 있는 상태다) 말려보지만, 귀여운 아이들과 가족 친지가 북적대는 따스한 넓은 거실에 대한 이들의 '신념'은 굳건하다.

하여간 주변 사람들의 은근한, 때론 노골적인 반대와 질책을 무릅쓰고 아이를 줄줄이 넷이나 낳은 이 부부는 재미없고 인기없던 처녀총각 시절과는 달리 자신들의 저택을 주변의 친지들의 허브로 자리매김하는데 성공한다. 부활절, 여름 휴가,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면 열흘 때론 한달씩 3-40명의 친지들이 모여 자고 먹고 놀며 휴가를 보낸다. 그야말로 '따뜻한 벽난로와 북실북실한 양탄자가 있는 넓은 거실에서 한쪽에는 어른들이 재치있고 화기애애한 대화를 나누고 있고 한쪽에서는 귀엽고 온순한 어린 아이들이 놀고 있는 (이 풍경에 길고 아름다운 털을 가진 커다란 개 한마리 정도 있으면 금상첨화)' 중산층 가정의 판타지를 이루어낸 것이다.

완벽해보이는 이들의 이상향은, 예기치 않게 임신하게 된 다섯째 아이 (이 부부도, 애가 넷씩이나 되니 한동안은 임신하지 말아야겠다는 최소한의 지각은 있었다)로 인해 파열되기 시작한다. 다섯번째의 원치않는 임신, 산모를 미칠 지경으로 만든 고통스러운 임신과정에 대한 묘사가 시작되면서 점잖은 중산층 가정의 스케치같던 이 소설은 점차 호러틱해진다. 초반에는 임신한 해리엇 밖에 모르던 다섯째 아이의 '괴물성'은 -어느 정도냐 하니, 모성애의 현신같던 그녀가 하루에 진정제를 수알씩 먹고, 뱃속의 아이를 협박하며, 아이가 죽기를 바란다- 아이가 태어난 순간부터 주변의 모든 사람을 잠식하기 시작한다.

이들의 불행이 단지 돌연변이 같은 이 아이로 인해 일어난 운명의 장난같은 거라고 해석한다면 이 소설은 단순한 호러, 것도 아주 무섭지는 않은 호러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다섯째 아이 벤은 아무 없이 끼어든, 빙하시대 원시인의 갑작스런 발현이 아니다. 그의 존재는, 너희의 핵가족 판타지가 이토록 연약한 기반 위에 서있는 것임을 비춰보여준다. 자신들의 '신념'을 무리하게라도 실현시키려고 했던 해리엇과 데이비드. 그들의 노력은 현실에서 금전적인 능력에 뒷받침되지 않았고 (결국 부자인 데이비드의 아버지가 지속적으로 도울 수 밖에 없다), 육체적인 능력에도 뒷받침되지 않는다 (해리엇의 나이든 어머니가 줄줄이 낳은 아이들의 양육을 도울 수 밖에 없다). 다산을 찬양하고 피임을 죄악시하는 사고방식으로 인해 해리엇은 몸이 완전히 혹사될 때까지 임신을 반복했다. 데이비드는 많은 자식들을 먹여살리고 저택을 유지하기 위해 죽어라 일할 수 밖에 없다. 또한 '부활절 기간에 모여든 친지들의 몇 주에 걸친 멋진 휴가'라는 자부심을 위해 이들은 무리한 지출을 감당할 수 밖에 없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모로 심신이 소모된 상태에서도 이는 포기할 수 없는 자존심이며 그들 자신의 존재와 가치를 증명해주는 주춧돌이다. 그들의 판타지를 실현하는 것은, 여러가지 은밀한 댓가를 필요로 했다. 그 댓가는 점차 커지고, 눈덩이가 굴러가듯이 커져서, 벤의 출생으로 자신의 무시무시한 존재를 드러낸다. 

이들의 판타지가 퇴색된 풍경으로, 집착으로, 집착이 악몽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읽는 건 고통스럽다. 아름다운 연인은 대화조차 나눌 수 없는 고통스런 부부가 되고, 더 시간이 지나서는 아예 얼굴조차 마주대하지 않는다. 사랑스런 아이들은 주눅들고 괴로워하거나 신경질적이 되어가고 좀 제앞가림을 할 나이가 되어서는 부모 곁을 떠난다. 교양있는 친지들이 휴가를 보내던 거실은 벤을 주축으로한 갱단의 또다른 파티 현장으로 되어버린다. 정상성, 정상가정에 대한 강한 집착으로 벤을 없애려고 했던 데이비드나, 스스로를 모성애의 노예로 만들어버린 해리엇이나 별로 다를바는 없어 보인다.

우아한 백조가 호수 밑에서는 발바닥에 땀나게 물을 젖고 있듯이, 판타지는 그 자체로 고고하게 존재하지 않는다. 다섯째 아이는, '정상가족 판타지'가 치르는 댓가, 그 발랄함을 위해 숨겨진 고통의 에피소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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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인만의 여섯가지 물리 이야기 - 보급판
리처드 파인만 강의, 폴 데이비스 서문, 박병철 옮김 / 승산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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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십대 후반이나 되어 이런 책 읽는다고 하면, 고등학생 시절 읽었어야 하는 책을 왜 읽냐고 의아해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올해는 어쩌다보니 과학(특히 물리)이나 수학 관련 책들을 좀더 읽게 된다.  전공이 수학에 가까운 터라 수학 관련 책을 읽는 건 그렇다치더라도, 새삼, 과학도를 지망하던 어린 시절에 읽던 교양과학서들을 읽고 있는 이유는 뭘까.

"파인만의 여섯가지 물리 이야기"는 정말 쉽다. 그 유명한, 어렵기로도 매우 유명한 Lectures on Physics를 발췌해서 편집한 책이긴 하나 워낙 방대한 Lectures on Physics인지라 개중에는 이렇게 쉬운 chapter들도 있나보다. 하여간 뉴턴 역학의 세가지 법칙 같은 걸 떠올리려면 한참 기억속을 헤매야하는 나같은 사람조차도 술술 읽어내릴 수 있다. 

그렇다면, 쉬우면서 파인만의 이름이 걸린 책을 읽었다는 지적인 포만감을 선사하는, 그래서 만족스러운 책인가? 절대 그렇지 않다. 이 책은 우리의 가장 원초적인 호기심, 자연과 현상에 대한 어린아이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저자 본인이 갖고 있는 호기심과 열정, 감동이, 그의  깊고 방대한 지식의 지원을 받아 독자의 눈높이를 고려한 글쓰기를 통해 전달된다. 덕분에 며칠전 어느날밤, 문득 이 책을 집어들고는 그 자리에서 다 읽고야 말았다. (물론 책이 일단 너무 잘 읽힌다. 하지만 그만큼이나 재미있다) 읽으면서, 정말 오랜만에 가슴두근거림을 느낄 수 있었다. 자연은 어떻게 생긴걸까, 어떻게 움직이는 걸까, 알고 싶다, 아주 오래전 뭔지도 모르면서 과학도를 꿈꾸던 시절 느꼈던 호기심과 감동..

특히 기억에 남는 부분들이 몇가지 있다. 물리와 인접학문들과의 연관관계를 이야기한 장(수학과의 연관관계가 빠진 것은 너무나 아쉽다. 정말 기대했는데. 물론 쓸게 너무 많아서 빠뜨린 건 알지만.), 그 중에서도 생물학에 물리가 끼친 영향. 생물은 고등학교 때부터 멀~리 했었는데, 저자는 심지어 생물학도 공부해보고 싶다는 욕심까지 갖게 만든다! 또, 빛과 전자의 입자-파동적인 성격을 설명하는 5장도 너무 재미있게 읽었다. 마치 1900년대 초반, 양자역학이 탄생할 무렵 물리학자들의 알게 된 새로운 현상과 그에 따른 고민들을 압축해서 파노라마로 보여주는 듯했다. 원자의 구조가 밝혀지기 시작하면서 발견된, 발견되고 있는 여러가지 소립자들, 그들 사이의 힘(약한 핵력, 강한 핵력)에 대한 미완의 이론들...뉴턴이 만유인력의 법칙으로 케플러의 행성운동 법칙을 설명해버리는 부분, 중력질량 관성질량 등이 등장하는 6장도 매우매우 흥미로웠다.

책을 선물해줬던 친구에게 책 재밌었다, 나도 물리할걸 싶더라, 는 얘기를 하니까 친구 답이 걸작이었다. "다들 그책에 속아서 물리를 하지~" 나는 물리가 아닌 다른 분야를 공부하고 있다. 그또한 매우 만족스럽다. 게다가 이렇게 비전공자에게도 세계의 일부와 그에 대한 인간의 앎이 어디까지 진행되었는지 알려주며 즐겁게 해주는 많은 좋은 책들도 있으니 부족함이 없다. 나같은 비전공자들은 물론이고, 속아서 물리를 전공삼아보고 싶은 푸릇한 중고등학생들까지, 주저없이 일독을 권한다. 

(이 책에 이어 출판된 책, six not so easy pieces를 읽기 시작했다. 이건 그리 호락호락해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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둠즈데이 북
코니 윌리스 지음, 최용준 옮김 / 열린책들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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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니 윌리스의 "둠스데이 북" (열린책들)을 읽다.

나 역시 다른 팬들처럼 "개는 말할 것도 없고" 를 읽고 코니 윌리스 아줌마의 입담에 반했다. 이 책이 출간된다는 소식을 듣고 또 어떤 수다를 낄낄거리며 웃을 수 있을까 기대했었고.

뚜껑을 열어보니 말 많은 건 여전하지만 "개는.."과는 매우 다른 분위기의 소설이라는 것. "개는.."이 코미디의 진수라면 이 책은 갈 데까지간 비극, 그야말로 둠스데이를 다룬다.

시간여행 SF라는 장르에서 펼쳐보일 수 있는 역사적 상상력 - 한 때 내가 무척이나 좋아했던 표현이다 -의 최대치를 끄집어내어보자는 게 아마 작가의 의도였던 것 같다. 말그대로 종말이 도래한 어느 시대 어느 공간에 현대적 인간을 뚝 떨어뜨려놓고, 그 인간의 생각과 느낌 종적을 세밀하게 따라가보기. 게다가 이 종말 공간은 SF적으로 가공된 것이 아니라 역사상 실재했던 시대이다. 매우 구체적으로 연도 (1348년, 페스트가 유럽에 창궐하기 시작한 시기이다)와 위치 (옥스퍼드 근교의 후미진 장원)를 설정해놓고 상당히 세밀한 고증까지 거쳐, 도대체 작가의 "역사적 상상력"이 그려내는 둠스데이를 거부하지 못하게 만들어놓는다.

코니 윌리스의 미래 2050년에 살고 있는 역사연구가들에게 역사란 단지 상상 속에서나 재현해볼 수 있는 죽은 과거가 아닌 현실이다. 그 시대를 동시대인들과 교감하고 직접 겪어내는 역사가들. 과거, 역사, 기록 속에 묻혀버렸던 인생들이 다시 살아나는 시간여행, 혹은 코니 윌리스의 "역사적 상상력". 

책에서 결정적으로 아쉬운 점 (쪼금 스포일러) : "현재"에 퍼진 전염병과 "과거"에 퍼진 전염병 사이에 아무런 연관관계가 없다. 기사의 무덤에서 인플루엔자가 시작된 것으로 설정되어 있는데 그런 식으로 설정해야할 필연성이 없음. "현재"와 "과거"에서 동시(?)에 병이 돌기 시작하고 그것이 과거로의 여행이 시작된 시점과 거의 일치한다면 당연히 독자는 둘 사이의 연관관계를 추리하기 시작할 수 밖에 없다. 800페이지가 넘는 책의 3/4지점까지 작가가 인색하게 던져주는 몇 가지 단서라고 할 만한 것도 계속해서 이런 점을 암시하고 있고. 둘 사이에 아무런 관계가 없고, 단지 기술자가 실수 (매우 치명적인 실수)를 하게 만들기 위한 원인으로 "현재"의 전염병을 설정한 것 뿐임이 밝혀는 것이 막판 일종의 반전인데.. 매우 실망스러운 반전이라고밖에. 시간 여행상의 실수를 만들어내기 위해 꼭 그런 대규모 전염병을 만들어내야 했는지. 독자에 대한 일종의 사기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 게다가 기사의 무덤과 1348년, "현재" 인플루엔자 시작지점들 사이에 연관관계를 분명하게 암시하면서 결국 정확한 해명없이 넘어간 건 흠...아줌마가 자기 수다에 질려 서둘러 책을 끝맺은 거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 수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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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한 여자의 낭만적 딜레마
마야 스토르히 지음, 장혜경 옮김 / 푸른숲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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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부터 읽고 싶었는데, 오늘 우연히 책을 발견하고 책장을 조금 넘기다가 들어온 문구가 조금 끌려 빌리게 되었다. "... 그리하여 이 책이 진보적인 사고방식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가부장제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현대 여성, 그리고 그들의 연인으로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방황하는 우리 시대 남성들을 위한 심리 치유서가 될수 있길 소망한다." 

얼마 전, 과연 진보적-대안적인 심리치료라는 것이 가능한가에 대해 토론을 한 적이 있다. 나의 입장은, 그런 것이 충분히 연구되고 개발될만한데 왜 그렇지 못할까, 였고 다른 분은 그런 건 불가능하다, 어차피 심리치료라는 것은 가부장제, 자본주의 (근대 이후??)가 남긴 상처와 쓰레기를 해결하고 주워담기 위해 개발된 것이다, 라고 주장했었다. 나도 그런 주장을 상당히 수긍하고 있고, 결론은 그냥 어리버리.  

사실, 이 책에도 중요하게 등장하는 융의 아니무스, 아니마 (여성 안의 남성성, 남성 안의 여성성)라는 개념은 그 자체로도 상당히 혁명적이고 대안적이다. 강제된 ~성스러움과 성별 분업, 그에 따른 관계맺음과 권력, 이런 틀 속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네 안의 너를 자유롭게 인정하고 펼쳐봐라, 그로써 강제적으로 내면화된 젠더의 속박에서 스스로와 서로를 벗어나게 해주어라, 고 속삭여주기. 심리치료가 우리 사회가 쏟아내는 배설물을 처리하기 위해 탄생한 것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혹여 가부장적 자본주의가 우리에게서 박탈해간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다시 찾아와서 온전한 인간으로 (내부로부터) 거듭날 수 있는지 알려줄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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