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살장 - 미국 산 육류의 정체와 치명적 위험에 대한 충격 고발서
게일 A 아이스니츠 지음, 박산호 옮김 / 시공사 / 2008년 5월
평점 :
절판


최근 꼭 읽어야겠다고 생각한 책 중 하나가 "도살장" (게일 A. 아이스니츠, 시공사)이다. 광우병 시국 안에서 빈번하게 노출되던 책이다. 알라딘에서 책소개를 조금 훑어보았는데 그것만으로도 꽤나 충격이었다.

사흘 전 이 책을 읽기 시작하고 지금까지 나는 고기가 들어간 음식을 한번도 먹지 않았다. (덧붙임: 리뷰를 쓰고 3주 정도 지났는데 아직도 고기를 안 먹고 있다) 달걀과 우유는 여러번 먹었고, 아참, 어제 먹었던 샌드위치에 햄이 들어있기는 했다. 사실 삼겹살과 돈까스, 예전에 즐겨찾던 햄치즈 우동, 부대찌개 등은 내가 먹고 싶은 음식 리스트의 순위에 올라있었고 지금도 그러하다. 그런데 고기가 들어있는 음식을 먹어야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책에 등장하는 내용들이 머릿 속에서 아우성치며 구역질이 치민다.

안타깝게도, 적어도 한동안은, 결코 고기를 '맛있게' 먹지 못할 것 같다.

가금류 사육과 도축에 대한 부분을 읽고 나서는 과연 달걀을 먹는 것조차도 양심에 찔리기 시작했다. 생각해보니 다행히도 영국에는 free range라든가 organic 달걀이라는 선택지가 있다! 휴우...
 
"대략 2억 4천3백만 마리의 암탉이 여기 사진에 보이는 좁은 닭장 안에서 살고 있다. (사진 한쪽에는 옴짝달싹할 수 없을만큼 좁은 닭장에서 끼여 죽어 축 늘어진 닭 한마리가 보인다) 이 좁은 곳의 발바닥을 찔러오는 비스듬한 철사 바닥 위에서 사는 이 암탉들은 날개를 뻗거나, 날개를 부리로 다듬거나, 알을 품고 있는 동안 편히 앉지도 못한다. (실제로 닭을 단단한 평지로 데려다 놓으면 제대로 서지도 못한다. 이미 불구가 되어버린 거다) 저쪽 끝에 있는 닭처럼 수천 마리의 암탉들이 매일 같은 우리를 쓰는 다른 닭들에게 밟혀 죽는다. 미국에서 소비되는 달걀 하나를 만들기 위해 암탉 한 마리는 이런 환경에서 26시간을 산다." - p. 191 사진설명

채식주의자가 되는 이유를 말할 때 (좀 작위적이기는 하나) 보통 건강상의 이유, 도덕적인 이유, 정치-환경적 이유를 든다. 건강상의 이유는 따로 설명이 필요가 없을 테고, 도덕적인 측면으로 사육과 도축 과정에서의 처참하게 유린되는 동물권이라든가 나아가 인간의 탐욕을 충족시키기 위해 생명을 대상화하고 대량 생산하는 발상의 비윤리성을 문제 삼기도 한다. 정치-환경의 측면에서는 고기 1kg을 생산 유통하기 위해 (소의 경우가 가장 극단적인데) 필요한 어마어마한 물, 곡식, 풀, 에너지 투입을 제기한다. 뿐만 아니라 수십만 마리의 소가 내뿜는 배설물이나 메탄가스가 만들어내는 엄청난 환경오염, 이를 복원하기 위해 필요한 자원 역시 문제가 된다.

나의 경우에는 건강상의 이유는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으나 고기의 맛을 포기하게 할 만큼 강력하게 어필은 하지 않았다. 내가 무슨 병이 있어 채식을 해야하는 것도 아니니까 말이다. 도덕적인 이유 역시 원론적인 측면에서 찬성하기는 했지만 큰 관심은 없었다. 종교를 갖고 있거나 세상을 영성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는 이들이 들 만한 이유지 나같은 보통 사람들에게는 좀 뜬구름 잡는 소리가 아닐까, 하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내가 채식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고 육식을 끊거나 줄이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가장 큰 이유는 '정치-환경의 측면'이었다.

"도살장"을 읽으면서 깨닫게 된 것 한 가지는, 이 세 가지 측면이 매우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거다. 이 책에서 주로 다루는 것은 '도축장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이다. 전형적인 르포의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책의 2/3 정도를 읽은 지금까지 육식의 필요성이라든가 농축산업계의 아젠다에 대한 공격 같은 건 한번도 등장한 적이 없다. 굉장히 세부적인 것들 이를테면 소 도축장의 스터너-스티커-스키너 등의 역할, 그 과정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무슨 문제가 있는지, 바닥을 굴러다니는 쥐와 4-5인치짜리 바퀴벌레, 가금도축 과정의 세부사항과 오염이 일어나는 부분, 오염된 고기를 먹고 중독된 아이들의 구체적인 사례들, 일하던 사람들이나 농무부 직원들이 문제제기를 하면서 겪는 일들, 국회 청문회에서 등장한 증언과 보고서들... 이런 것을 기술한다.

그런데 평소에는 관심도 없던 축산업계에 관한 보고서를 읽으며 알게 된다. 몸의 건강한 감각과 욕구를 마비시키며 욕망을 끝없이 부추기는 시스템 하에서는 대량화가 늘 우위를 점하게 된다. 게다가 규제 완화가 미덕이라는 프로파간다가 판치면서 거대 자본의 힘은 더더욱 커지고 개별 농장, 도축장, 공장에서 그들은 그나마 존재하던 감시와 제어의 손길을 몰아내고 그들만의 더러운, 정말 토나올만큼 더러운 왕국을 구축한다. 대량 생산-소비 사이클을 더 단단하게 구축하고 이윤을 높이는데만 관심있는 자본은 동물권은 커녕 도축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생명과 안전에도, 소비자의 권리에도 관심이 없다. '피를 더 잘 뽑기 위해' 소를 기절도 제대로 시키지 않은 채 모든 도축 과정을 겪게 하는 자본의 잔인한 무신경과, 어린 아이들을 치명적인 0157 대장균에 노출시켜 죽이는 사악함은 동일한 욕망에 뿌리를 둔다. 그 자본과 끈끈하게 결합되어 있는 미 농무부 관료들은 시민, 유권자의 권리와 요구에는 관심이 없다. 끔찍하게 오염된 고기가 그 더러운 공장에서 깔끔하게 포장되어 월마트 가판대에 올려지고 그것이 어떤 과정을 거쳐 생산되는지를 문제삼는 이들은 오프라 윈프리처럼 수백만 달러짜리 소송의 대상이 되며 입에 재갈이 물린다. (대체 누가 미국을 민주주의 국가라고 부르는가?)

결국 자본이 장악한 이 시스템은, 소비자의 얄팍한 욕망을 부추기고 이용해 그들을 '비도덕적인 시스템'으로 끌어들인다. 붉은 고기를 매일 먹으려면 그들의 고통에 눈을 감으세요. 당신은 매일 싼값에 달걀을 먹을 수 있어요, 그 달걀 한 알을 낳기 위해 서로 밟으며 미치는 닭들의 하루를 모른 척 할 수 있다면. 맛있는 햄버거를 드세요, 당신의 아이가 대장균의 맹독에 공격받아 장기에서 피를 흘리고 부풀어 올라 피부를 찢고 올라오려 하고 심장의 구멍이란 구멍에서는 피가 흐르고, 간과 췌장 기능은 정지되고 뇌가 다치고 수 달 간의 비참한 투병 끝에 죽기 전에. 사실 당신은 그냥 우리가 주는대로 닥치고 먹을 겁니다, 왜냐면 우리가 이 모든 것을 철저하게 숨기고 있기 때문이지요. 
 

요새는 점점 생협 운동에 관심을 갖게 된다. 이 책을 읽으며 떠올렸던 공상 하나가 있다. 뜻이 맞는 사람들 여럿이 투자를 해서 소, 닭, 돼지 등을 농가에 맡겨 키우게 하고 한번씩 잡아서 나눠 먹는거다. 도저히 육식을 포기하고 싶지 않아 생각했던 건데, 이제 보니 이게 딱 생협이다. 꼭 육식의 문제적 측면에 대한 대응으로서만이 아니라 세계화에 대항하는 지역화, 농촌 살리기, 안전한 먹거리, 에너지 등 환경 문제에 대한 대응으로서도 의미가 있다. 생각할수록 "생협" 요거 괜찮은 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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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 그린비 크리티컬 컬렉션 15
프란츠 파농 지음, 남경태 옮김 / 그린비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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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당신들의 대한민국 2를 읽으며 민족주의-근대-폭력이라는 키워드를 이해하기 위한 대장정에 도전해보겠다는 야무진 소망을 품었던 바다.

시작은 창대하였으나 현재는 미약하다. 겨우 두 권의 책을 읽고, 속도와 열정은 연료 부족현상을 겪고 있다. 하여간.. 

대충 그런 고로 주워든 책 중 하나가 프란츠 파농의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이다. 옛 운동권에서 주요 텍스트 중 하나로 읽혔다는 건 익히 들어왔고, 알제리의 유명한 식민투사였다는 것, 저항투쟁에서 폭력의 사용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유명하다는 것, 이 정도가 나의 얄팍한 사전지식이었다. 치열한 식민지 해방투쟁의 전사이자 이론가였던 그가 나의 관심 키워드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했을까에 대해 궁금해진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게다가 최근 아는 분이 위의 책을 읽었던 얘기를 했던 것이 다시 한번 그의 오래된 책을 기억 속에 되살리는 계기가 되었던 점 역시 빼놓을 수 없다. 

신탁을 받은 예언자의 중얼거림 같은 그의 글귀 속에서 헤매고 있다가 어제밤이던가, 5장 "식민지 전쟁과 정신질환"을 읽었다. 그의 기록은, 덕지덕지 눅은 정보와 생각들, 경험이라는 이름의 관성 따위들로 무장된 나의 가슴과 대뇌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왔다. 

이 장은, "알제리 민중의 민족해방전쟁에서 비롯된 정신질환"에 관해 다룬다. 정신과 의사였던 파농은 알제리의 정신병원에서 한동안 근무했는데, 그 기간동안의 경험이 이와 같은 기록의 토대가 되었을 것이다. 

이 글은 식민지의 상황에서 원주민인 알제리인 혹은 이주민인 프랑스인에게 나타나는 정신병리적 현상들, 그 발생원인(배경), 상담과정 등을 담담하게 기록한 것이다. 말이 '담담'이지, 정말 끔찍한 상황들이 줄줄이 나열되어 있는데, 이를 '담담'하게 기록한다는 것이 어떤 일일지 나로서는 도저히 상상하기가 어렵다.  

이를테면 알제리인을 상대로 고문하는 것이 일인 경찰에 대한 기록을 보자. 이 경찰은 자신의 가족들을 학대하기 시작하면서 문제를 파악하고 병원을 찾아온 환자이다. "정부의 신사 분들은 노상 알제리에는 전쟁이 없다면서 법의 무력, 즉 경찰력이 질서를 지켜야 한다고 말하죠. 하지만 알제리에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어요. 그걸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늦죠.."

그의 증언을 보면 고문'기술자'라는 표현에 어떤 과장도 없음을 알게 된다. "...그건 아주 지루한 일이에요... 문제는 과연 말하게 할 수 있느냐는 거예요...그런 일에서 성공하려면 똑똑해야 돼요. 언제 손을 대고 언제 손을 빼는지 잘 알아야 해요. 또 그 일에 걸맞는 솜씨도 필요하죠. 충분히 기를 꺾어놓았으면 때릴 필요는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자기 혼자서 일해야 해요. 일이 어느 정도 진행되었는지는 자기가 잘 아니까..."

이 환자는 결국 그의 직업을 계속해나간다. 그는 파농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고 한다.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고도, 행동에 전혀 문제가 없이, 그리고 완벽하게 평온한 심정으로 알제리 애국자들을 계속 고문할 수는 없겠느냐고." 

환자들의 사례는 매우 다양하다. 고문 당한 경우, 고문을 가한 경우, 성공을 꿈꾸는 알제리인으로 살아가던 경우, 프랑스인을 살해하고 자책에 시달리는 알제리 전사, 급우를 살해한 알제리 소년, 알제리인을 고문학살하는 아버지를 둔 딸, 난민들, 세뇌를 겪은 지식인 등등. 

그것이 알제리인에 대한 것이든, 혹은 프랑스인에 대한 것이든, 결론은 마찬가지다. 현 상황, 인간성을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고 그의 정신을 지속적으로 일그러뜨리는 식민화 현실을 멈추지 않으면 치료는 미봉책에 불과하다. 환자는 끔찍한 속도로 늘어나며, 매우 운이 좋게 파농과 같은 의사로부터 치료받을 기회를 얻는 경우에도 치료의 효과는 제한적이다.  

결국 파농은 병원을 그만두고 전면적으로 민족해방전선의 활동에 투신한다. 

의사로서 파농의 경험은, 식민지라는 상황 자체가 질병이며 그 안에 있는 이들을 가해자/피해자의 위치를 막론하고 병들게 한다는 인식을 갖게 했을 것이다. (물론 이들이 겪는 피해는 결코 동등하지 않다) 섣부른 추측인지 모르겠으나, 이 질병과 싸우고자 하는 행위 자체가 피지배인들을 탈식민화하는 치유적 행위로 파악하고 폭력도 이런 맥락에서 파악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파농에 대한 오해를 나의 어설픈 설명으로 부추기는 것 같아서 강조하지만, 파농이 폭력 그 자체를 찬양하거나 무분별한 (식민종주국, 이주민을 향한) 폭력을 합리화한 사람은 아니라고 이해한다. 오히려, 식민지에서의 정신질환에 대한 그의 기록을 보건데, 그만큼이나 폭력이 인간의 몸과 마음에 미치는 파괴적인 영향을 잘 알고 있는 사람도 드물 터이다.  

곪은 것을 없애기 위해서는 외과수술이 불가피하다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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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들의 대한민국 2 - 박노자 교수가 말하는 '주식회사 대한민국'
박노자 지음 / 한겨레출판 / 2006년 1월
평점 :
절판


박노자씨의 "당신들의 대한민국2"를 읽고 있다. 편하게 쓴 좋은 글, 이라는 가벼운-오만방자한 생각으로 읽기 생각했는데, 많은 화두를 안게 된다. 이 책에 실린 글 전체를 관통하는 정리를 할 능력은 갖고 있지 못하지만, 그 중 특히 인상이 깊은 부분에 대해서 써본다.  

"폭력에 대한 또 하나의 역사적 성찰"이라는 제목의 칼럼 (p.132-142)은 한국사회에서 발견되는 폭력성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를 짚어보고 있다. 기형, 전근대, 식민성 등의 수사를 의례 달고다니는 이 폭력성은 그 어법상 정상-근대-서구의 안티테제로 가정된다. 박노자씨가 의문을 제기하는 지점이 바로 이 부분이다. 정말 그런가? 우리사회의 폭력성은 (서구적) 근대를 완성하지 못했기 때문에 '남아'있는 것인가?  

그는 폭력성의 주된 줄기가 아직 척결되지 못한 전근대의 잔재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근대 그 자체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한다.  

식민지 권력과 역대 독재 정권들이 한국 사회에서 많은 전근대적인 잔재들을 인위적으로 존속시켰다는 것도 물론 사실이고, 한국의 독특한 사회적 폭력 구조에 전근대적인 요소가 보인다는 것도 사실이다. 예컨데 한국 특유의 사회적 폭력인 연령 차별이 일제식으로 왜곡된 유교적인 전통을 배경으로 삼는 것은 틀림없다.

(중략)

인류 폭력의 역사를 보면, 역시 서구적 근대의 위치는 트결하다. 전근대적 계급사회들이 폭력을 구사하지 못한 것이 아니지만, 그 규모나 형태에 있어서는 근대와 비교할 바가 못 된다. 전근대적 국가들은 세계 패권은 꿈도 꾸지 못했고 향촌 지배도 철저하게 하지 못했다. 국민 개병제라는, 모든 주민들을 국가 폭력의 공범으로 만드는 제도는, 어느 전근대적 사회에서도 실시되지 못했다. 그리하여 계급사회의 국가 그 자체는 폭력이지만, 오늘과 같은 형태의 폭력의 진정한 역사적 기원을 찾기 위해서는 서구의 근대의 출발부터 생각해야 한다. (p.134-135)  

그가 전근대의 폭력과 근대의 폭력을 어떻게 구분하는지에 대한 엄밀한 논술은 등장하지 않는다. 이 부분은 '근대/근대성이란 무엇인가'라는, 암것도 아닌 것 같지만 생각할수록 너무 어려운 질문에 대한 답을 요구하기 때문에 단순하게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나 스스로 그가 글에서 표현하지 않은 부분을 채울만큼 내공이 깊지도 못하다. 하지만 글의 여러 문장들을 통해 추측해보건데, 일단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전근대성이란, 근대가 제시하는 가장 중요한 가치인 보편 인권과 이를 바탕으로 하는 개인주의가 정립되기 이전의 사회 성격들로, 동등한 개인을 상정하지 않은 사회 제도, 관습 등을 가리킨다. 전근대적 폭력은 이러한 사회성격에서 발로한, 차등화된 개인/집단에 대한 폭력이다. 그에 반해 근대적 폭력은, 근대 이전에는 정립되지 않았던 개별의 '독립된' 자아에 대한 인식(?)에 기반하여 주체와 타자를 구분짓고, 타자를 통제/개발/폭력 등 주체 행위의 대상으로 인식하는 것에서 비롯된 폭력이다."  

하지만 위와 같은 정리는 듬성하게 이가 나간 부분이 많다. 이를테면, 과연 전근대는 항상 통합적인 세계관 위에서 움직이고 있었나? 물론 초기 원시사회에서 시작된 인류의 세계관의 발전을 흔히 어린 아이의 세계관의 발전과 비슷한 궤도를 밟는 것으로 본다. 갓난아이가 태어났을 때 세계와 자신을 구분하지 못하고, 배고픔을 느끼면 마치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공포와 충격을 느끼다가 점차 자신과 외부를 구분하게 되고 좀더 나이가 들면 자아정체감을 확립하게 된다. 원시사회의 세계관에 대해서도 비슷한 해석을 한다. 그들은 자신과 세계가 초자연적(적당한 표현을 못 찾겠다) 의지의 그물 속에서 함께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해서, '근대' 이전이 '전근대'라는 이름으로 묶일만큼 동질적인 무언가인지, 다시 말해, '근대'가 그 이전과 확연히 구분되는 어떤 것인지 잘 모르겠다. 공부가 더 필요한 부분이다. 

다시 원글을 들여다보자면, 박노자씨는 근대적 폭력을 '도덕적 명분이 필요없는 폭력'이라고 규정한다.

박노자는 이러한 맥락에서 글 도입부에 소개한 문부식씨의 1980년대 학생운동에 대한 문제제기에 대한 나름의 답변을 준비한다. 문부식는 그의 저서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서 : 광기의 시대를 생각함" (삼인, 2002)을 통해 1980년대 일부 운동권의 폭력성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다. 비록 조선일보가 '운동권의 반성문' 운운하면서 서평을 겸한 인터뷰를 짜집기해 기사화한 것으로 문제가 되긴 했지만, 그의 문제제기는 우리가 깊이 고민해봐야 할 것이다.  

운동권의 폭력성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본 적은 없다. 기껏, 학생운동을 처음 접했을 때 '폭력시위'에 대한 단순한 거부감을 '방어적 폭력'의 불가피함에 대한 이해로 전환시켰던 것, 그리고 좀더 시간이 지나서는 그 '불가피함'에 대해 의문이 생기고, 그것이 (NL) 운동권의 가부장적-전근대적- 성격과 연관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막연하게 하게 된 것 정도이다. 지금도 폭력은 무조건 나쁘다, 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시위 와중의 폭력보다 더 문제가 되는 것은 국가가 독점하는 물리적 폭력과 그에 대한 합의의 조작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그러나 박노자의 '성찰'에 따르면, 운동권의 폭력성을 단순히 전근대성으로서 가부장적 성격과 연관시켜 생각한 것은 내 이해 정도가 상당히 부족한 탓인 듯하다.  

다시 한번 원점으로 돌아가자. 진보계는 그 입장 전개의 논리상 결국 폭력의 적극적인 부정으로 올 수 박에 없다면, 왜 문부식의 이번 성찰의 대상이 된 1980년대의 일부 운동권의 폭력성은 그토록 심했는가? 두 가지 답을 내릴 수 있다. 하나는, 1980년대의 운동권 학생들이 근대국가가 대량 생산한 근대 국민이라는 사실에서 해답을 찾아보는 것이다.  

(중략)  

물론 이와 같은 근대 교육은 (신)식민성-주변부성의 냄새가 짙지만, 원칙적으로 행동과 생각의 규율화는 서구 근대의 원류에 속한다. (신)식민성-일제식 기합, 구타, 인간적 존엄성의 지속적 모독-이 훨씬 더 심한 근대적 군대에까지 갔다 오면, 한국형 규율적 인간의 형성이 완성을 보는 것이다. 그러한 인간들이 반자본, 반외세 투쟁을 스탈린주의식으로 쉽게 하나의 근대적인 전쟁으로 생각하고 적군을 대하는 방법이나 아군을 통제하는 방법을 학교, 군대의 경험대로 정한다. 후발 자본주의 국가인 러시아의 국가 독점 자본주의적 근대화의 논리인 스탈린주의는, 그들이 이미 익힌 한국형 근대와 잘 맞아떨어진다.  

(중략)  

현실적으로 이야기하자면, 1980년대 세대는 인권과 개인 생명의 중요성을 배울 만한 통로가 있었는가? 그들의 생활환경-특히 군대나 학교 같은 주요 사회화 기관-에 하등의 인권적 요소가 없었다는 사실은,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다들 아는 일이다. 프락치를 대하는 데 안기부의 신문 절차를 알게 모르게 베끼게 된 그들은, 안기부가 대표하는 신식민지적 주변부 근대국가의 정신적 포로였다. 그러나 이것은 개개인을 문책할 일이라기보다는 한국사에서 벌어진 대형 비극의 하나로 봐야 하지 않을까? (p.140-141)  

이 지점에서 떠오르는 의문이 있다. 박노자의 의견은 충분히 공감하지만, 그렇다면 탈식민을 위한 투쟁에 동원되는 모든 폭력을 그와 같이 서구적 근대에 물든 것으로, 불합리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박노자의 이러한 논리는 간디의 주장과 상당 부분 겹치는 것으로 보인다. 간디의 경우, 힌두-인도인의 정신과 역사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바탕으로 서구적 근대와 동치되는 폭력을 거부한 것이었다. 간디야 종교인이니 그렇다 하더라도 (이전 글에도 썼다시피, 난 간디의 말씀이 무지하게 맘에 안 들었다), 박노자 역시 어떤 종류의 대항적 폭력을 사용하든지 간에 그 투쟁의 대상과 똑같이 (서구적) 근대의 덫에 걸린 것일 수 밖에 없다고 이야기하는 걸까. (생각해보니 박노자 역시 종교인이긴 하다;;)  

그런 면에서 이슬람 문화권의 전투적 성격은 탐구해볼만한 대조를 이룬다.  

"그들은 우리의 모습을 바꾸려 합니다. 교리를 말하는 무슬림들을 한낮 광신도나 바보로 비쳐지게 만들려합니다. 그들은 우리가 그들에게 복종하여 움직이기만 한다면 경제자원이나 군사자치에 관한 논란은 끝난다고 하지만 일이 잘못되면 그 비난은 우리가 받을 겁니다. 자유무역을 통하여 인간의 본성과 현대적인 삶을 연결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불가능합니다. 신성과 속세는 따로 놓인 것이 아닙니다. 코란에는 종교와 정치의 분리란 있을 수 없습니니다. 코란에는 통치자와 피지배자는 있어도, 코란에는 종교적 규율을 철폐하고 얻는 신식 삶의 고통은 치유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규제 철폐, 개인주의화, 경제개혁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현세에서의 고통은 자유주의로는 절대 치유될 수 없습니다. 자유주의는 실패할 수 밖에 없습니다. 기독교 교리는 무너질 수 밖에 없습니다. 서방은 파멸할 것입니다 (시리아나, 무슬림 지도자의 설교) "  

기독교 교리 어쩌구 하는 부분만 제외하면 이 말씀은 간디가 "힌두 스와라지"에서 줄기차게 주장하던 것과 하등 다를 바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편은 비폭력, 다른 한편은 현대 사회의 가장 극단적인 폭력을 향해 달려간다. 물론 영국에서 교육을 받고, 서구 근대문명에 대한 예리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서구의 사유와 사람들을 향해 상당히 우호적인 태도와 친교를 보였던 간디와 기독교를 뿌리로 갖는 서구와 숙명적으로 대결해왔던 중동의 차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역시, 이러한 차이는 근대에 대한 언설만으로 폭력의 문제가 해결될 수 없음을 예증하는 것이 아닐까?  

내공이 부족해 여러가지 물음표만 던지고 글을 마무리 할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박노자 글의 마지막 부분과 지승호의 문부식 인터뷰 일부를 달면서 글을 마쳐야겠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1980년대 세대와 많이 달라졌다고 해서 암흑기에 투쟁의 횃불을 들었던 그들을 반드시 질책해야만 하는가? 그들의 실수도, 그들의 고민도, 그들의 성찰도 결국 지금과 같은 비폭력화 추세의 밑거름이 된 셈이다. 그들이 폭력성 경험은 우리를 비폭력주의자로 만든 하나의 요소다. [조선일보]는 그 특유의 악질적 성격대로 문부식의 고백을 마치 전향서인 양 꾸며놓았지만, 폭력을 거부한 세대는 결코 전향한 것이 아니다. 투쟁이 성숙했을 뿐이다. (p.142)"  

-지승호 - 문학평론가 김명인씨가 “새삼 내 안의 폭력을 거론하며 문제제기하는 것은 2000년대의 인간으로서 80년대의 인간을 몰아붙이고, 학대하는 일”이라고 했는데요.  

=문부식 - 비유적 표현이 과장되어 있지만, 김명인씨의 견해일 수 있다고 봅니다. 80년대 운동은 비공개, 소수였고, 대중운동세대로 넘어오면서 넓어지고, 얇아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운동이 대중화되면서 앎과 실천 사이에 괴리감이 발생하기 시작했습니다. 실제 운동주체들이 공부를 하지 않았구요.  

김명인씨는 과잉된 비판이 아니냐는 지적인데,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중요하게 따져봐야할 부분이 있는 발언이고, 경청할 수 있는 견해라고 생각합니다.단, 이제와서 이 문제를 제기햐냐고 하는 것은 비판하는 상대방에 대한 기본적인 성실함을 가지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중략)

-지승호 - 홍윤기 교수가 “적지 않은 이들이 언어적 폭력을 당하고 있다고 느낀다. 어떤 이들에게 폭력은 자기에게 남은 자기 표현의 마지막 매체일 수 있다”고 했습니다.  

=문부식 - 전적으로 맞는 말이고, 멋진 말이고, 실제로 그렇습니다. 하지만 모든 게 정당한 폭력이었다고 얘기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는 겁니다. 자기 성찰을 해야한다는 거죠. 바우닌의 ‘전쟁의 슬픔’에 보면 북베트남 민족해방투쟁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전쟁에 길들여져 있다가 전쟁이 끝나는 날, 적들의 여성 시체를 발로 차고, 쓰레기 더미에 던져버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불가피하게 쇠파이프를 들더라도 상대방에 대한 연민이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은 다릅니다. 폭력에 대한 감수성이 ‘성찰’이 없는 경우 무뎌집니다. 프락치로 오인한 사람을 운동의 이름으로 죽이는 경우도 있었지 않습니까? 그런 것에 대한 책임은 져야합니다. 수천명을 죽이고도 책임지지 않는 권력과 다른 점을 보여줘야 합니다.  

‘우리 안의 폭력을 반성해야지만, 국가의 폭력을 제대로 성찰할 수 있다’는 말에서 제대로에 방점이 찍혀야지, 순서론이 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 안의 폭력을 반성한 다음에야 국가의 폭력을 성찰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분단체제하에서 한국의 국가 권력은 ‘국가 안보’를 명분으로 자행한 극악한 폭력은 물론이고, 자신이 행사해 온 모든 폭력을 정당한 공권력 행사였다고 주장해왔습니다. 이러한 권력으로부터의 폭력은 그에 비례하는 다른 형태의 저항의 폭력을 낳게 되고, 어느 순간부터 폭력은 상호적인 것이 됩니다. 이렇게 폭력이 연쇄와 순환의 법칙을 따르게 될 때 폭력은 반성의 계기를 찾기가 더욱 어려워집니다. 폭력에 대해 숨기기는 대항폭력의 경우도 마찬가지라는 거죠. 저 역시 국가폭력과 저항폭력을 동일시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무차별적으로 섞는 것은 반대하지만, 폭력에 대한 성찰은 동시적이어야 한다는 것이죠.  

-지승호 - 그렇다고는 하더라도 국가폭력에 대응하려고 했던 사람들에 대한 과도한 공격일 수도 있다는 비판은 여전히 남아 있는데요.  

=문부식 - 군사정권의 폭력행사가 다반사로 이루어지고 현실의 정세를 변화시켜야 하는 절박한 요구가 존재하던 시기에 운동진영의 과잉된 폭력들을 감추는 것은 상황 논리상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상당 기간이 지난 지금도 과장된 명분에 의해 뒷받침되고 갈수록 관성화되어 갔던 지난 시기의 폭력들과 그것이 낳은 결과들에 대한 성찰이 지체되고 있는 현상은 더 이상 옹호할 수도 납득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적과 싸우면서 닮아가는 것, 우리 안의 파시즘을 비판하자는 것은 우리 안에 남아 있을 수 있는 국가폭력을 보자는 것이고, 국가의 광기가 내 안에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성찰해보자는 겁니다. 국가폭력 비판하기 바빠서 못한다는 것은 과장된 것입니다. 상주도 매일 울기만 하는 것은 아니잖아요. 국가폭력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사람이 정작 자기 쪽의 폭력에 둔감할 수는 있더도, 자기 자신의 폭력과 허위에 진정으로 엄격한 자가 현실의 불의한 권력에 무관심한 경우는 없습니다.  

-지승호 - 조선일보는 “80년대의 폭력과 광기에서 벗어나고 싶었다”는 맥락으로 운동진영을 비판하는데 사용했는데요.  

=문부식 - 조선일보는 언제나 그랬습니다. 모든 논의와 맥락을 자기화하는 것, 그것은 조선일보의 탁월한 능력입니다. 그런 재주로 버텨온거죠.(웃음) 제가 스스로 잘 변별해내지 못하고, 설명하지 못하는 한계도 있을 수 있습니다. 차별이 있는 것을 균질화하거나, 무조건 섞음으로서 문제를 호도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한나 아렌트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폭력은 정당화될 수는 있다. 그러나 정당한 것은 아니다”.  

이 말처럼 폭력은 항상 정당화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폭력의 확대는 그것을 정당화하려는 이데올로기를 야기합니다. 폭력이 본질일 수는 없으며, 폭력이 이론화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제가 정교하지 못했고, 조선일보에 인터뷰가 실림으로서 빌미를 줄 수 있었다고는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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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의 덫
장하준 지음 / 부키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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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자 장하준 씨가 최근 몇년간 각종 매체에 기고한 칼럼들을 엮은 책이다. 얇고 비슷한 이야기가 반복되어 지루한 감이 없지 않지만, 뭔가 뭔지 알 수 없이 미쳐 돌아가는 지금의 나라 경제를 바라볼 수 있는 굉장히 설득력 있는 시각을 제공한다. 

높은 실업률, 신규 일자리는 생겨나지 않는데 이것이 고도로 발전한 자본주의의 필연적인 결과인지 아니면 신자유주의 경제 정책 때문인지, 비정규직이 늘어나는데 왜 그런건지, 외국의 노동자들과 경쟁하는 것이 불가피한 것인지 대안은 없는건지, 자본의 해외이전은 세계의 통합에 따른 필연적인 결과인 건지, 혁명 아님 순응 양자택일의 선택 외에는 존재하지 않는건지... (게다가 전자는 사실상 혹은 당분간 불가능해 보이니..)

먹고 살기는 점점 힘들어지는 반면, 왜 이렇게 되어버렸는지 세상은 더욱 이해할 수 없고 그만큼 대안도 없어 보이는 요즘. 장하준의 시각은 내가 접한 어떤 시장주의자보다 합리적이고 논리적으로 일관성을 갖추고 있다. 

조선일보부터 오마이뉴스나 말지에 이르기까지, 책에 등장하는 칼럼들의 다양한 출신성분에서도 드러나지만 그는 '스펙트럼'을 구분하기에 애매하다. 굳이 그런 걸 구분해야하는 것도 한숨새어나오는 일이긴 하지만, 하여간 그래서 그는 우파에게는 좌파라는 좌파에게는 우파라는 비난을 받는다. (글들 중 하나는 그가 자신의 '스펙트럼'에 대한 규정 혹은 애매함을 어떻게 바라보는지에 할애되어있다.) 

그의 글 전반에 걸쳐 강조되고 있는 주장을 정리해보면. 

1. 주주 자본주의, 무역장벽의 철폐와 자본 및 모든 종류의 상품(인력, 서비스, 문화 등을 포함한)의 자유로운 이동, 정부 규모와 역할의 축소 및 시장에 대한 개입 중지, 전통적인 사회기간망을 포함한 전면적인 민영화, 노동 유연성 극대화 등 현재 글로벌 스탠다드로 일컬어지는 신자유주의의 의제에 대해. 과연 그것이 '글로벌 스탠다드'인가?  

일단 '글로벌 스탠다드'는 존재하지 않는다. 현재 글로벌 스탠다드라고 주장되는 위와 같은 신자유주의 의제들은 실은 미국식 스탠다드일 뿐, 선진국에 해당하는 유럽 국가들은 물론 미국과 그나마 가장 가까운 경제정책을 운영하고 있는 영국이나 캐나다만 봐도 신자유주의를 전도하는 이들이 강변하는 스탠다드와는 아주 다른 정책을 고수하고 있다. 그들의 노동유연성은 두터운 사회안전망을 기반으로 하고 있으며 ('경직된' 노동정책을 고수하는 국가들도 많은 것은 물론), 70-80%에 달하는 노조조직률로 대표되는 강력한 시민-노동세력의 힘을 기반으로 한 사회적 합의에 의해 경제정책, 기업정책이 결정된다.  

또한 많은 국가에서 공기업이 경제영역의 중요한 영역을 차지하고 있다. 일례로, IMF 이후 신자유주의자들이 요구하는 부실기업 처리, 외국자본과의 인수합병의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인 르노-삼성을 보자. 르노 자동차는 96년까지 프랑스의 공기업이었고 합병 당시에도 정부지분이 절반에 가까운 사실상의 공기업이었다. 오스트리아의 경우 주요 기업들이 대부분 공기업이라고 하며 (정말 믿거나 말거나에 가까운..;;) 이 정도까지는 아니라도 유럽의 많은 나라들에서 정부가 기업의 지분을 상당부분 보유함으로써 경영을 안정시키고 기업의 경영이 주주의 사익 추구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국가 경제 전반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견제한다. 

심지어 미국의 경제가 그야말로 순수하게 그들이 말하는 글로벌 스탠다드 방식으로 흘러가는지도 지극히 의문이다. 신자유주의가 발효하기 시작한 80년대에도 이미 그들은 금융권 부실 때문에 미국 경제가 위기에 처하자 엄청난 규모의 공적자금을 퍼부은 바 있다. R&D 수행을 위한 연구자금의 2/3 이상이 정부에서 흘러나온다. 세계 식량시장에서 절대적 우위를 차지하고 있을만큼 '경쟁력'있다는 그들의 농산물은 엄청난 정부보조금을 받아 생산되고 있다. 

2. '글로벌 스탠다드'는 역사의 산물일 뿐. 이것은 경제공동체의 맥락에 대한 고려없이 반드시 이식되어야 하는 규범으로서 가치를 갖지 않는다. 선진국들은 처음부터 자유무역을 그렇게 좋아했나. 자유무역을 전세계에 전도하는데 앞장서는 미국은 2차대전 이전까지만 해도 세계에서 가장 높은 관세율을 고수하던 국가였다. 영국은, 양 키워서 모직물 원료 수출을 하던 유럽의 2등 국가 시절 강력한 보호무역과 관세보조금으로 자국의 공업을 발전시켰던 과거가 있다. 자유무역, 자본에 대한 모든 장벽의 철폐를 주장하는 것은 오직 그것으로 이득을 볼만큼 경제력이 확실하게 강해질 경우에만 해당될 뿐, 그렇지 않을 당시에는 지금의 선진국들도 모두 철저하게 보호경제를 꾸려왔던 것이다.  

그렇다고 지금의 신자유주의가 기술 발전으로 인한 불가피한 현상인가. '구'자유주의의 소위 황금기로 꼽히는 19세기 말 ~ 20세기 초에는 이민을 포함한 노동력의 이동, 자본의 이동, 무역량 등 거의 모든 시장 부문에서 거의 현재에 준하는, 혹은 그 이상의 세계적 통합이 이루어져 있었다. 통신, 교통 등에서 지금보다 훨씬 열악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주요 자본주의 국가들 사이의 합의에 의한 것이다. 대공황 이후 금본위체제로 옮겨가면서 주요 선진국들이 각국의 시장을 상당히 폐쇄(?)적으로 운영했었다는 데에서도 이를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기술의 발전은 세계적 통합의 maximum을 한계지을 뿐 그 정도 자체를 결정짓는 요소는 아니라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3. 제조업은 사양산업이고, 금융업을 비롯한 서비스업 등 고부가가치 산업을 중점적으로 발전시켜야 한다는 주장의 허구성.  

금융업을 비롯한 서비스업은 실제로는 대부분 end-user를 대상으로 하고 있지 않으며 제조업을 중심으로 하는 산업체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 쉽게 말해, 미용실이나 편의점이 아닌 이상, 흔히 말하는 금융이나 법률, 컨설팅 등 서비스업의 사용자가 누구인지는 명확하다. 결국은 실질적인 부가가치를 생산하는 무언가가 있어야 하는데, 이건 제조업이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저자는 아시아 금융의 중심지라는 싱가포르나, 우리가 서비스업으로 세계 최고 수준의 국민소득을 누린다고 알고 있는 스위스의 예를 든다. 이들 국가 역시 실은 제조업 분야에서 강국임을 간과해서는 안된다고.  

약간은 논외지만, 저자는 이공계 기피문제를 제조업의 몰락에 따른 현상으로 보고 있다. IT같은 분야가 있긴 하지만 절대 다수의 이공계 인력을 사용하는 부분은 공장, 생산현장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 즉 제조업이다. 이공계의 가장 크고 대표적인 부분인 기계전공이 IMF 이후로 학생 수가 거의 20% 이하로 줄어든 것이 그 단적인 예다. 그들은 졸업하면 거의 대부분 중공업, 자동차 회사 등으로 취직했었는데 얘네들이 다 외국으로 넘어가거나 문을 닫은 것이다. 우리가 흔히 간과하는 부분이지만, 흔히 주장하는 수요-공급 어쩌구, 과포화, 선진국에서는 다 겪는 일이네 하는 얘기보다 열배는 명확한 주장이다.

 

4. 70-80년대 정부주도의 경제개발정책에 대하여. 그것이 정말 그렇게 문제인가? 그것이 IMF의 원인이고 이제 글로벌 스탠다드에 따라 (시장)민주주의 - 그 정체는 주주 민주(?)주의이다 -, 어떤 '정치적'인 통제로부터도 자유로운 시장에 모든 것을 맡김으로써 해결해야 하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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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타적 인간의 출현 - 게임이론으로 푸는 인간 본성 진화의 수수께끼
최정규 지음 / 뿌리와이파리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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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이론에 대해 약간의 맛보기를 할 기회가 생겼다.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수학적 기호들의 바다에 풍덩 빠져 허우적거리기 전에 섬이 어디에 있는지 항구는 어디에 있는지 미리 견식이나 할까 하는 취지로 "이타적 인간의 출현"이라는 책을 집어들다.

"죄수의 딜레마" -같은 제목의 책도 있다- 라는 표현으로 유명한 게임이론은, "경쟁 주체가 상대편의 대처행동을 고려하면서 자기의 이익을 효과적으로 달성하기 위해 수단을 합리적으로 선택하는 행동을 수학적으로 분석하는 이론"이다. (네이버 백과사전 발췌) 다시 말해, 두 명 이상의 행위자가 존재하고 각 행위자가 취할 수 있는 전략이 있는 상황에서, 행위자가 특정 전략을 선택해서 얻을 수 있는 payoff (부호가 있는 보수)가 자신이 선택한 전략 뿐 아니라 다른 행위자의 전략에도 역시 dependent한 경우 이들이 게임적 상황에 있다고 표현한다. 게임적 상황에서 행위자들의 전략 선택에 대한 이론이 게임이론이다.

 노이만(참, 안 끼는데가 없는 사람이다 -_-;;)과 모르겐슈타인이라는 사람이 게임이론을 정식화하고 이론적 토대를 만들었다고 하며, "뷰티풀 마인드"로 유명한 내쉬는 게임이론을 공부하다보면 가장 처음 등장하는 개념 중 하나인 Nash Equilibrium의 존재 증명(plus 그 개수는 항상 홀수다!)으로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했다고 한다. Nash Equilibrium은 모든 행위자들의 전략 조합 (s_1, s_2, ..., s_n)으로 어떤 행위자도 다른 행위자의 전략이 변화하지 않은 상황에서 전략의 변화를 꾀할 유인이 없는 상태를 뜻한다. 한마디로 "지금이 좋다, 내가 다른 짓을 해봐야 얻을 게 없으니" 정도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때 s_i는 행위자 i의 전략이며, 이 전략은 i가 선택할 수 있는 여러 순수 전략 pure strategy의 확률적 조합 mixed strategy일 수도 있다. 어떤 게임적 상황에서도 항상 Nash Equilibrium이 존재한다, 게다가 그 수는 (mixed strategy profile을 포함해) 항상 홀수다, 라니 참 신기하지 않나.

 이타적 인간의 존재는 진화론이나 경제학의 입장에서 보면 수수께끼이다. 이타적 행동 혹은 인간은 자신에게는 손해인데 다른 행위자에게 이익이 되는 행동, 혹은 그런 행동을 하는 존재라고 정의할 수 있다. fittest가 살아남는 진화의 역사에서 어떻게 이타적인 동물이나 인간이 탄생할 수 있나? 이를테면 동족을 지키기 위해 가미가제처럼 죽음을 택하는 꿀벌이나 다른 동물들은 다윈 시절부터 설명해내기 난감한 사례였다. 다윈 자신은 집단선택가설을 도입했지만 이 가설은 개체의 선택과 진화보다 집단선택의 속도가 상대적으로 매우 느리기 때문에 유효한 설명이 되기 어렵다. 이러한 난점을 설명하기 위해, 혈연선택 가설, 이의 극단으로 "이기적 유전자"같은 스타일의 가설이 등장한다. 개체의 입장에서는 이타적인 행동이지만 유전자의 입장에서는 사실 이기적인 행동으로 볼 수 있다는 것. 개체는 단지 유전자를 담는 그릇이고 유전자는 자신의 존재를 널리 퍼뜨리기 위해 동일 유전자를 담고 있는 다른 그릇(다른 개체)에게 도움이 되는 행동을 자신의 손해에도 불구하고 서슴치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설명은 혈연 관계가 없는 이들에게까지 이타적인 행동을 하는 동물과 인간사회의 행태에는 적합치 않다.

 여기에서 재미있는 실험이 등장한다. 죄수의 딜레마 게임을 한번만 시행하는 경우에는 무조건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놈이 이긴다. 그러나 매우 오래 (얼마나 오랫동안일지 행위자들이 예측하기 어렵도록) 반복하는 경우에는? 놀랍게도 tit for tat 즉 눈에는 눈 이에는 이, 호혜평등적 행위자가 이기적인 행위자와 그외 응모된 여타 어떤 전략을 수행하는 행위자보다 over all payoff가 높다는 것이 1947년 PD Prisoners' Dillema 콘테스트의 결과였다.

 이타적 행위자들끼리 모인 집단과 이기적 행위자들끼리 집단을 생각해보면, 이타적 행위자 집단의 평균 payoff가 높다. 즉 이기적 행위자의 높은 payoff는 다른 이타적 행위자가 존재해 그에 무임승차하지 않는 이상 불가능한 것이다. 여기에서 이타적 행위자의 존재가 유유상종 효과에 의한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과 탐색이 시작된다. 유유상종 효과가 이타적 존재들을 살아남을 수 있게 만들었다는 아이디어에 대한 매우 강력한 뒷받침은 다음과 같은 실험이다. 먼저 '살아남는다'는 표현을 좀더 엄밀하게 만들어보자. 각 행위자들은 다른 행위자와 게임을 하고, 다음번 게임에서는 payoff가 높았던 일군의 행위자들의 전략을 "배운다". 이를테면 내가 이타적으로 행동했는데 손해를 봤고, 저 사람들은 이기적으로 행동했는데 이득을 보더라, 고 관찰하면 다음번 게임에서는 이기적으로 행동해야지, 하고 결심을 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전체 행위자 중에서 이타적인 존재의 비율이 줄어들게 된다.

 만약 내가 나의 "이웃들"로부터 전략을 벤치마킹한다고 생각해보자. 사실 우리는 보통 잘 모르는 사람들보다 가까이 있는 사람들의 행동에 더 영향을 많이 받으므로 이러한 가정은 상당히 타당하다. 토러스 모양을 갖는 그리드 상에 행위자들을 뿌려놓고 이들중 이타적 인간과 이기적 인간의 비율이 반반인 상태로 반복게임을 시작하고, 각 행위자는 자신의 이웃들 중 평균 payoff가 높은 전략을 배워 다음 턴의 게임을 진행한다고 하자. 반복적으로 게임을 수행할 경우 Simulation결과는, 놀랍게도, 첫 턴에서 이타적인간들이 주르륵 죽어서 10% 비율로 떨어졌다가 그 다음부터는 그 수가 증가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열 턴 정도 게임이 진행되고 나면 이타적 인간의 비율이 60% 대로 올라서가 그 선에서 약간의 변동을 반복하는 패턴을 보인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첫 턴에서 살아남은 10%의 이타적 행위자들이 유유상종했던 애들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군집을 이루고, 군집의 변두리에 있던 이기적 행위자들은 "감화"를 받아 (이후 게임에서 군집 내의 이타적 행위자들은, 이 변두리의 이기적 행위자 입장에서 볼 때 이기적 행위자들보다 높은 payoff를 얻는다) 이타적 행위자 무리에 합류하게 되는 것이다. (공간구조의 효과)

 위의 실험은 반복적 게임 상황에서 어떻게 이타적인 인간, 혹은 호혜적 인간이 살아남았는가에 대한 게임이론에서의 설명이다. 그렇다면 과연 호혜적인 인간이 존재하는가에 대해서, 책은 많은 페이지를 관련 실험에 할애해놓았다 (책에서는 순서가 반대임). 최후통첩 게임이나 독재자 게임, 공공재 게임 등이 그것이다. 죄수의 딜레마 게임에서 이타적 행동을 합의하는 것(즉, 우리 자백하지 말자!)은 값싼 수다떨기cheap talk에 불과하고 합의는 더 나은 payoff앞에서 쉽게 무너져버릴 수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험 결과는 수다떨기가 그저 값싸지만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쉽게 말해, 자신에게는 덜 이익이 되더라도 전체를 위해서는 좋은 선택을, 토론과 신뢰쌓기를 통해 배신없이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최후통첩 게임에서 매우 많은 행위자들이 "경제적 인간"의 최적 전략을 선택하지 않고 "공정한 것" "공정하지 않은 것에는 자신의 손해에도 불구하고 응징하는 것" 등을 선택한다는 실험 결과들 역시 호혜적 인간이 존재함을 보여준다.

세상은 강자(살아남은 자, 이타적 인간을 이긴 행위자, 이타적 행동을 발판으로 payoff를 높인 자)를 중심으로 발전하고 진화한다는 약육강식의 논리를 이제는 '단순'하고 '무식'한 것으로 비웃어 줄 수도 있다. 개인의 payoff를 극대화하는 것이 경제적 사회적으로 필연적인 선택이며, 개인의 이러한 선택이 자연의 진화와 부합되는, 따라서 사회 전체적으로도 합당한 것이라는 강변은 무적이 아니며 탄탄한 안티를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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