둠즈데이 북
코니 윌리스 지음, 최용준 옮김 / 열린책들 / 2005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코니 윌리스의 "둠스데이 북" (열린책들)을 읽다.

나 역시 다른 팬들처럼 "개는 말할 것도 없고" 를 읽고 코니 윌리스 아줌마의 입담에 반했다. 이 책이 출간된다는 소식을 듣고 또 어떤 수다를 낄낄거리며 웃을 수 있을까 기대했었고.

뚜껑을 열어보니 말 많은 건 여전하지만 "개는.."과는 매우 다른 분위기의 소설이라는 것. "개는.."이 코미디의 진수라면 이 책은 갈 데까지간 비극, 그야말로 둠스데이를 다룬다.

시간여행 SF라는 장르에서 펼쳐보일 수 있는 역사적 상상력 - 한 때 내가 무척이나 좋아했던 표현이다 -의 최대치를 끄집어내어보자는 게 아마 작가의 의도였던 것 같다. 말그대로 종말이 도래한 어느 시대 어느 공간에 현대적 인간을 뚝 떨어뜨려놓고, 그 인간의 생각과 느낌 종적을 세밀하게 따라가보기. 게다가 이 종말 공간은 SF적으로 가공된 것이 아니라 역사상 실재했던 시대이다. 매우 구체적으로 연도 (1348년, 페스트가 유럽에 창궐하기 시작한 시기이다)와 위치 (옥스퍼드 근교의 후미진 장원)를 설정해놓고 상당히 세밀한 고증까지 거쳐, 도대체 작가의 "역사적 상상력"이 그려내는 둠스데이를 거부하지 못하게 만들어놓는다.

코니 윌리스의 미래 2050년에 살고 있는 역사연구가들에게 역사란 단지 상상 속에서나 재현해볼 수 있는 죽은 과거가 아닌 현실이다. 그 시대를 동시대인들과 교감하고 직접 겪어내는 역사가들. 과거, 역사, 기록 속에 묻혀버렸던 인생들이 다시 살아나는 시간여행, 혹은 코니 윌리스의 "역사적 상상력". 

책에서 결정적으로 아쉬운 점 (쪼금 스포일러) : "현재"에 퍼진 전염병과 "과거"에 퍼진 전염병 사이에 아무런 연관관계가 없다. 기사의 무덤에서 인플루엔자가 시작된 것으로 설정되어 있는데 그런 식으로 설정해야할 필연성이 없음. "현재"와 "과거"에서 동시(?)에 병이 돌기 시작하고 그것이 과거로의 여행이 시작된 시점과 거의 일치한다면 당연히 독자는 둘 사이의 연관관계를 추리하기 시작할 수 밖에 없다. 800페이지가 넘는 책의 3/4지점까지 작가가 인색하게 던져주는 몇 가지 단서라고 할 만한 것도 계속해서 이런 점을 암시하고 있고. 둘 사이에 아무런 관계가 없고, 단지 기술자가 실수 (매우 치명적인 실수)를 하게 만들기 위한 원인으로 "현재"의 전염병을 설정한 것 뿐임이 밝혀는 것이 막판 일종의 반전인데.. 매우 실망스러운 반전이라고밖에. 시간 여행상의 실수를 만들어내기 위해 꼭 그런 대규모 전염병을 만들어내야 했는지. 독자에 대한 일종의 사기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 게다가 기사의 무덤과 1348년, "현재" 인플루엔자 시작지점들 사이에 연관관계를 분명하게 암시하면서 결국 정확한 해명없이 넘어간 건 흠...아줌마가 자기 수다에 질려 서둘러 책을 끝맺은 거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 수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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