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째 아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
도리스 레싱 지음, 정덕애 옮김 / 민음사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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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대 런던 근교, 평범한 중산층 핵가족의 형성(곧 '아내'와 '남편'이 될 두 남녀의 운명적인 만남)부터 붕괴까지를 차분-하게 그려낸 소설이다. 해리엇과 데이비드는 혼전 성관계, 찰라적인 연애가 난무하는 도시 속에서 고리타분하다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자신들의 신념, 이상적이고 아름다운 가족에 대한 신념을 꿋꿋이 지키면서 사는 쇤님들이다. 어느 겨울 파티에서 서로를 발견하고 말 한마디 나눠보지 않은채 상대가 자신의 천생연분임 알아본 그들은 곧 결혼을 한다. 그리고 허리띠 졸라매고 고생한 끝에, 런던 근교를 샅샅이 뒤져 찾아낸 빅토리아풍의 크고 아름다운 저택을 손에 넣는다. 둘의 가족들 대부분 이 저택의 구입을 어리석은 짓이라고 (넘 비싼데다가 얘들은 이 저택을 줄줄이 낳은 자식들로 그득그득 채우겠다는 야무진 꿈까지 꾸고 있는 상태다) 말려보지만, 귀여운 아이들과 가족 친지가 북적대는 따스한 넓은 거실에 대한 이들의 '신념'은 굳건하다.

하여간 주변 사람들의 은근한, 때론 노골적인 반대와 질책을 무릅쓰고 아이를 줄줄이 넷이나 낳은 이 부부는 재미없고 인기없던 처녀총각 시절과는 달리 자신들의 저택을 주변의 친지들의 허브로 자리매김하는데 성공한다. 부활절, 여름 휴가,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면 열흘 때론 한달씩 3-40명의 친지들이 모여 자고 먹고 놀며 휴가를 보낸다. 그야말로 '따뜻한 벽난로와 북실북실한 양탄자가 있는 넓은 거실에서 한쪽에는 어른들이 재치있고 화기애애한 대화를 나누고 있고 한쪽에서는 귀엽고 온순한 어린 아이들이 놀고 있는 (이 풍경에 길고 아름다운 털을 가진 커다란 개 한마리 정도 있으면 금상첨화)' 중산층 가정의 판타지를 이루어낸 것이다.

완벽해보이는 이들의 이상향은, 예기치 않게 임신하게 된 다섯째 아이 (이 부부도, 애가 넷씩이나 되니 한동안은 임신하지 말아야겠다는 최소한의 지각은 있었다)로 인해 파열되기 시작한다. 다섯번째의 원치않는 임신, 산모를 미칠 지경으로 만든 고통스러운 임신과정에 대한 묘사가 시작되면서 점잖은 중산층 가정의 스케치같던 이 소설은 점차 호러틱해진다. 초반에는 임신한 해리엇 밖에 모르던 다섯째 아이의 '괴물성'은 -어느 정도냐 하니, 모성애의 현신같던 그녀가 하루에 진정제를 수알씩 먹고, 뱃속의 아이를 협박하며, 아이가 죽기를 바란다- 아이가 태어난 순간부터 주변의 모든 사람을 잠식하기 시작한다.

이들의 불행이 단지 돌연변이 같은 이 아이로 인해 일어난 운명의 장난같은 거라고 해석한다면 이 소설은 단순한 호러, 것도 아주 무섭지는 않은 호러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다섯째 아이 벤은 아무 없이 끼어든, 빙하시대 원시인의 갑작스런 발현이 아니다. 그의 존재는, 너희의 핵가족 판타지가 이토록 연약한 기반 위에 서있는 것임을 비춰보여준다. 자신들의 '신념'을 무리하게라도 실현시키려고 했던 해리엇과 데이비드. 그들의 노력은 현실에서 금전적인 능력에 뒷받침되지 않았고 (결국 부자인 데이비드의 아버지가 지속적으로 도울 수 밖에 없다), 육체적인 능력에도 뒷받침되지 않는다 (해리엇의 나이든 어머니가 줄줄이 낳은 아이들의 양육을 도울 수 밖에 없다). 다산을 찬양하고 피임을 죄악시하는 사고방식으로 인해 해리엇은 몸이 완전히 혹사될 때까지 임신을 반복했다. 데이비드는 많은 자식들을 먹여살리고 저택을 유지하기 위해 죽어라 일할 수 밖에 없다. 또한 '부활절 기간에 모여든 친지들의 몇 주에 걸친 멋진 휴가'라는 자부심을 위해 이들은 무리한 지출을 감당할 수 밖에 없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모로 심신이 소모된 상태에서도 이는 포기할 수 없는 자존심이며 그들 자신의 존재와 가치를 증명해주는 주춧돌이다. 그들의 판타지를 실현하는 것은, 여러가지 은밀한 댓가를 필요로 했다. 그 댓가는 점차 커지고, 눈덩이가 굴러가듯이 커져서, 벤의 출생으로 자신의 무시무시한 존재를 드러낸다. 

이들의 판타지가 퇴색된 풍경으로, 집착으로, 집착이 악몽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읽는 건 고통스럽다. 아름다운 연인은 대화조차 나눌 수 없는 고통스런 부부가 되고, 더 시간이 지나서는 아예 얼굴조차 마주대하지 않는다. 사랑스런 아이들은 주눅들고 괴로워하거나 신경질적이 되어가고 좀 제앞가림을 할 나이가 되어서는 부모 곁을 떠난다. 교양있는 친지들이 휴가를 보내던 거실은 벤을 주축으로한 갱단의 또다른 파티 현장으로 되어버린다. 정상성, 정상가정에 대한 강한 집착으로 벤을 없애려고 했던 데이비드나, 스스로를 모성애의 노예로 만들어버린 해리엇이나 별로 다를바는 없어 보인다.

우아한 백조가 호수 밑에서는 발바닥에 땀나게 물을 젖고 있듯이, 판타지는 그 자체로 고고하게 존재하지 않는다. 다섯째 아이는, '정상가족 판타지'가 치르는 댓가, 그 발랄함을 위해 숨겨진 고통의 에피소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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