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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의 세기- 실패한 프로젝트?
에릭 홉스봄 외 지음, 임지현 엮음 / 삼인 / 200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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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제국의 시대
에릭 홉스봄 지음, 김동택 옮김 / 한길사 / 199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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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주문하면 "5월 8일 출고" 예상(출고후 1~2일 이내 수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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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의 시대
에릭 홉스봄 지음, 정도영 옮김, 김동택 해제 / 한길사 / 199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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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의 시대
에릭 홉스봄 지음, 정도영.차명수 옮김 / 한길사 / 1998년 9월
28,000원 → 26,600원(5%할인) / 마일리지 840원(3%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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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농장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
조지 오웰 지음, 도정일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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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화, 풍자 소설인 《동물농장》의 플롯이 어떻게, 줄거리는 간략하게 이러이러하다는 요약보다. 조지 오웰이 이 소설을 통해 제기한 근본적인 물음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이 플롯과 줄거리를 아우르면서 현실 세계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는 방법이라 생각한다.

우선 오웰은 자신의 글이 분명히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있으며 “전체주의에 반대하고, 민주적 사회주의를 위한”것이라고 「나는 왜 쓰는가」에서 밝히고 있다.

이 소설을 읽고 내가 던져본 질문은 이렇다.
1. 혁명은 혁명의 약속을 배반하는가
2. 혁명 이후의 성과는 혁명을 주도했거나 권력과 재정 능력을 지닌 지식인에게만 돌아가는가.
3. 대중은 왜 갈팡질팡하고 생각하지 못하는가.
4. 나는 왜 사회과학 서적을 읽는가.

우선 1,2,3번의 질문은 이 책의 해설에 역자 도정일이 언급한 것과 같으며, 모두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다. 1번 질문에 대한 질문이자 답은 2번이며 3번과 4번도 마찬가지다. 이 소설을 읽고 던질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질문인 동시에 오웰 자신의 의도가 담긴 질문이기 때문일 것이다. 4번 질문은 3번 질문과 깊은 관계가 있다. 4번은 내 자신이 나에게 던진 질문이자 모두에게 말하고 싶은 답이다.

우리는 익히 역사적인 사건을 토대로 한 소설, 영화, 드라마 등의 작품을 통해 부패한 기존 지배 권력을 뒤엎고 새로운 시대를 여는 상황을 많이 보았다. 어찌 보면 역사는 어떤 책 제목처럼 ‘배반의 역사’라고 불리는 게 가장 적절한 지도 모르겠다. 새로운 시대를 여는 상황, 한 단어로 ‘혁명’을 경험하진 못해도 매체를 통해 보아온 우리는 혁명 이후 지배 계층이 기존 지배 권력처럼 권력에 찌들고 부패해 가는 과정 또한 익히 보아왔다. 그런 상황 속에서 현 시대에 우리는 인간은 권력 속에서 부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진리처럼 받아들이며 습관처럼 말하고 있다. 사실적이고 눈앞에 내놓을 수 있는 증거가 없다면 어떤 가정도 무의미할 수밖에 없다. 혁명 이후에 부패하지 않은 사실적인 흔히 말하는 ‘산증인’과 다름없는 상황을 보여줄 수 없다면 여전히 “혁명은 당초의 약속을 배반하”는 것이 되고 불필요한 공수레 공수거일 뿐이다.

오웰은 이 소설에서 혁명 이후의 혁명 배반을 그리고 있으며 배반을 통한 혁명과 모든 것의 소멸을 암시하고 있다. 이것은 오웰이 혁명은 꼭 배반성을 내포하고 있는가와 같은 물음에 자신 또한 고민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 혁명에 대한 배반은 어떻게 발생하는가.

혁명에 대한 배반은 보통 혁명을 주도했거나 재정을 담당할 수 있는 지식인의 몫이다. 자신들의 역할을 이용해 권력을 형성하고 지배체제를 더욱 굳건히 하는 과정은 익숙하다. 애초에 혁명의 목표는 소설 속 클로버의 기대처럼 “굶주림과 회초리에서 벗어난 동물들의 사회, 모든 동물이 평등하고 모두가 자기 능력에 따라 일하는 사회……강자가 약자를 보호해 주는 그런 사회”를 만드는 것이지만, ‘혁명 권력’이 어떤 견제 없이 잠시 동안의 평화로움과 긴장의 끈을 놓은 여유를 틈타 부패하기 시작한다. 이는 분명히 팽팽한 긴장 상황에서 벗어나 축 늘어진 고무줄 같은 상황이다. 어떤 견제도 없는 상황에서 권력은 부패하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혁명 권력의 횡포를 애초에 방지하는 길은 무엇인가.

이 소설에서 동물들은 돼지들의 명석함에 모든 걸 믿고 맡기며 열심히 일만 한다. 존즈 시대보다는 자유롭기 때문에 더 행복하다는 생각에서다. 혁명을 이룬 초기에는 나폴레옹과 스노볼이 서로 반대 의견을 제시하며 긴장 상태를 유지했기 때문에 어느 정도 혁명의 평화로움과 여유가 지속됐지만 나폴레옹이 무력으로 스노볼을 몰아냄으로써 혁명 권력의 횡포는 본격적으로 가속 페달을 밟기 시작한다. 분명히 체제라는 것은 서로를 견제할 수 있고 긴장 상태를 유지시킬 수 있으며 서로의 제안을 비판적으로 검토할 수 있는 세력이 필요하다. 동물(대중)들은 어떤 세력이 어떤 가치를 최우선으로 하고 있는지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길렀어야 했다. 무조건 시키는 대로 일 할 것이 아니라 견제 수단도 마련했어야 하는 것이다.

인간에게 이런 견제 수단을 어떻게 마련되는가를 생각해 볼 때 나는 “사회과학 서적”을 읽고 인간 사회의 갖가지 부조리한 것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 그 방법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한 가지 비관적이고 절망적인 사실은 다수의 인간들은 항상 그것과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신변잡기 일본 소설과 아부의 기술을 터득하라고 명령하는 자기 계발 서적은 판매 순위에서 단연 1, 2위다. 대부분의 인간들이 ‘정치’가 뭔지도 모르면서 정치와 정치인을 혐오하며 투표하지 않은 것을 자랑스럽게 여김과 동시에 정책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는다. 분명 인간의 모든 것을 정치로 치환할 수는 없지만 인간 실생활의 거의 모든 공동체적 결정은 정치적이다. 인간들이 권력에 대해 견제 능력을 가지려면 우선 체제에 대해 알아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 체제 안에서 모든 의사 결정이 어떻게 이루어지며 자신들이 어떤 권리를 행사할 수 있고 어떤 권리를 행사해야 하는지 끈임 없이 생각하고 고민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소수의 권력에 인류의 성과를 고스란히 갖다 바치는 것을 막는 유일한 길이다. 인간의 삶이 이렇게 피곤할 수밖에 없는가란 질문에도 그렇다라고 답할 수밖에 없다.

오웰의 이 우화, 풍자 소설은 2008년 지금에 와서 어떤 신선한 재미를 주지는 못하지만 끈질긴 문제의식을 던진다는 점에 그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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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치, 우리들의 행복한 세계 - 예술사 이야기 지식전람회 21
조중걸 지음 / 프로네시스(웅진)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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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키치의 이해

이 책을 읽고 나서 단 번에 ‘키치는 무엇’이라고 정의할 수 없는 이유는 개념이라는 것이 단 번에 정의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개념은 역사적으로 그 개념이 사용된 파편적인 배경을 번호가 적힌 조각 맞추기 하듯 하나하나 순서대로 맞춰 봄으로써 그 개념의 전체 이미지를 그려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이고, 어떻게 현실에 적용 가능한 지 생각해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저자는 이런 개념의 특성을 알고 있으며 예술사의 과정에서 키치의 파편적인 조각을 모아 키치의 전체 이미지를 그려내고 있다.

키치는 “고급예술인 채 하는 통속예술”이다. 저자는 ‘자연’을 실재라고 규정하고 인간 이성의 인식으로 이해하기 힘든 이 난해하고 고통스러운 실재를 해석하기 위해 노력한 예술을 고급예술이라 한다. 다시 말해 고급예술은 “인간과 삶과 우주에 대해 진실하고 깊이 있는 통찰을 보여주”는 것이다. 인간과 삶과 우주에 대한 통찰은 인간과 자연 사이에 있는 간극—인간이 이 자연세계의 신비함을 이해할 수 없는 현실—을 제거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이런 고급예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에 걸 맞는 지적 수준과 교양이 필요하다.

“산업혁명 이래 조성된 일상적 삶의 조건” 즉 멈출 수 없는 물질적 생산 때문에 “탈진할 정도의 근로”를 해야 하고 그로 인해 “공허하고 무의미한 활동욕구”에 사로 잡혀 있으며, “초조함”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난해하고 상당한 지적 수준을 요구하는 고급예술은 고통스러운 삶에 무게를 더욱 무겁게 할 뿐이다. 그보다는 잠깐이나마 쉴 수 있는, 현실의 난해함을 잊고 환상에 젖을 수 있는 예술이 그들에게 필요하다. 마이클 무어 감독의 부시 행정부 외교정책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다큐멘터리 영화 <화씨 9/11>이나 얼마 전 개봉한 <식코sicko>보다 환상적인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는 영웅의 이야기를 담은 <인디애나 존스>나 <아이언 맨>이 잠시나마 삶의 고통을 덜어주기에는 충분한 것이다. 이런 예술이 통속 예술이고 앞서 언급한 산업사회의 특성이 통속예술을 폭발적으로 증대시켰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보자. 저자가 말했듯이 키치는 “고급예술인 채 하는 통속예술”이다. 통속예술은 고급예술인 채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키치와 다르다. 통속예술은 그 가벼움과 환각을 드러내놓지만 키치는 “기와로 만들어진 독립기념관이나 서울대학교의 규장각”, “그리스와 중세의 건축 양식을 모방한 경희대학교 캠퍼스”처럼 진지한 채 한다.

이쯤 되면 키치는 왜 통속예술과 달리 고급예술의 고귀함과 품격, 혁신성을 모방하고 있는지 의문이 생긴다. 이 의문에 대한 답은 키치의 근대적 탄생 배경을 살펴봄으로써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찰리 채플린의 영화 <모던 타임즈>는 산업사회 노동자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유명하다. 산업사회의 노동자는 일관 작업대에서 기계처럼 반복적인 움직임으로 분업화 된 노동을 해야 한다. 이런 노동에 창조와 보람은 없다. 노동에서 어떤 창조적 의미도 발견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노동을 통한 창조적 의미의 발견은 곧 노동을 통한 자아실현을 의미 한다. 자아실현이 불가능한 산업사회의 노동자—일반 시민(대중)—들은 무엇으로 자아실현을 이룰 수 있을까. 기계적인 노동으로 벌어들인 돈을 이용한 소비를 통해서만 자아실현이 가능하다. 그에 따라 산업사회의 모든 것은 소비되기 위해 존재한다. 지식, 예술, 여행, 인간 등 모든 것이 소비의 대상이다. 키치는 소비자의 허위의식과 소비욕구를 부추긴다. 키치는 자본과 긴밀하게 연관된 기획 상품 같은 것이다. 키치는 창조성을 갖고 자아실현이 가능한 것으로 보이기 위해 고급예술의 특성을 모방하는 것이다. 키치는 고급예술의 모방을 넘어 소비자에게 아부하고 이것이 현실이라고 속이며 기만하는 것이다.

키치는 이렇게 자본 상품 소비를 통해 일상생활 속으로 들어오게 됐다. 이후 키치는 “특정한 종류의 예술 작품을 지칭할 뿐만 아니라 하나의 삶의 양식을 가리키는 용도”로도 쓰이게 됐다. 이는 19세기말 부를 축적한 유럽의 부르주아들이 그들 이전에 권력을 지배하던 귀족들의 문화를 경쟁적으로 흉내 내기 시작한 것과 같다. 이미 귀족들의 관심사도 아닌 그럴 듯해 보이는 미술품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는 안목 없이 마구 사들여(남경태의 《개념어 사전》에서 키치 항목 참고)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물들이 얼토당토않게 공존해 있게”된 것이다. “일부러 어색하게 꾸민 패션이나 복고풍의 유행”이 그것인데, 일반적으로 일상생활에서의 사용되고 있는 키치란 개념은 이렇게 시간과 공간이 서로 어울리지 않는 사물끼리의 공존을 표현하는 데 쓰인다.

키치는 예술에서와 마찬가지로 상품을 상품 자체가 아닌 상품의 구입을 통해 남들과 구별되는 차별적인 자아를 형성할 수 있는 것처럼 환상을 심어준다. 그리고 소비를 통해 자신의 지위와 부를 드러낼 수 있다고 부추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생산력의 증대로 인한 부의 증대가 쓸모를 넘어선 속물근성과 낭비를 부른다. “구매력이 있는 계층에게는 키치를, 없는 계층에게는 소외와 박탈감”을 심어준다. “키치는 비반성적이고 비자각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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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 - 움베르토 에코의 세상 비틀어 보기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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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세상의 짜증나고 이해할 수 없는 일들에 대해 다 비판하자면 오디세우스가 트로이 전쟁을 마치고 이타카로 돌아오는 끈질긴 모험의 시간보다 오래 걸릴 것만 같다. 짜증의 고통은 고스란히 내 자신의 것이 된다. ‘도서관에서’ 소근 소근 대화하는 어른들, 필통을 뒤적거려 달그락 소리를 내는 학생들, 도서관 바닥을 질질 끌며 걷는 사람들, 굽이 있는 구두를 신고 또깍 또깍 걷는 여자들, ‘지하철에서’ 문이 열리면 내리는 사람이 먼저 임에도 타는 사람과 내리는 사람의 어깨를 시간차로 밀치고 지하철 안으로 들어서는 사람들, 다리를 쩍 벌리고 앉은 무신경한 사람들, ‘좌파 강연자의 강연에서’ 좌파들이 한 일이 무엇이냐며 궤변을 토하며 조롱하다 자신의 논리가 좌파 강연자에 의해 일방적으로 조롱당하자 분을 이기지 못해 “국민들은 항상 옳은 선택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좌파는 나라를 운영할 능력이 없어요.”라고 소리치며 달아나는 자칭 우파 인기 누리꾼, 그 누리꾼을 조롱하는 좌파 강연자에게 박수를 보내는 좌파 강연자의 강연을 들으러 모인 200여명의 청중 혹은 대중, 강연 중에 후루룩 소리를 내며 뜨거운 커피를 몇 차례에 걸쳐 나눠 마시고 자신의 지도 교수 차례가 끝나자 기립박수갈채를 보내고 사라지는 몰상식한 지식인. 한참 남았지만 아껴두고 묵혀둔 후 차례차례 웃어주기로 하자.

2.
움베르토 에코는 이런 짜증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보다 자신에게 짜증을 유발한 이들을 유머로 조롱함으로써 자신에게 고스란히 남아야할 짜증을 익명의 사람들에게 전달하거나 증발시킨다. 진중권이 “네 무덤을 침을 뱉으마”라며 극우꼴통들은 상대할 필요도 없는 조롱해야할 대상이라고 여기는 것과 같은 맥락으로 보인다. 실제로 이 책을 읽으면서 진중권의 ‘조롱문체’가 생각나지 않을 수 없었다. 김규항의 경우 “나는 왜 불온한가”라고 자신에게 묻고 있는데 이는 꽤 진지하다. 조롱보다 혐오를 담고 있다. 일종의 ‘혐오문체’다. 에코나 진중권은 조롱체를 통해 짜증을 분출하지만 김규항은 혐오체를 통해 짜증을 다시금 몸에 담아둔다. 정말 불온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3.
에코는 서로 다를 수 있는 상대적인 것을 어설프게 일반화시켜 조롱하기도 한다. “독일의 택시 운전사들은 친절하고 예의 바르다”는 것이 그 직접적이 예다. 설명할 필요도 없이 에코는 이렇게 적었어야 한다. “독일에서 내가 탔던 택시의 운전사들은 친절하고 예의 바른 사람들이었다.” 에코는 일반화와 동시에 맥락을 잃었는데 독일의 택시 운전사는 날씨가 무더울 땐 예의 바르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럴 때 에코는 “독일의 택시 운전사들은 날씨가 무더워 불쾌지수가 올랐을 때도 친절하고 예의 바르다”라고 적었어야 했다.

4.
기호학자로서 에코는 책 전체에서 언어의 유희를 적극 활용하고 있다. 이른바 언어의 미학, 함의의 미학이다.

5.
그러나 상대의 백치를 조롱함으로써 상대적으로 내가 우월하다고 느끼는 함정에 빠져서는 안 될 것만 같다. 이명박을 조롱하는 지식인들은 ‘대통령(어찌되었든 투표를 통해 당선된)’ 이명박의 정책을 비판하면서 상대적으로 우월감을 느끼는 함정에 빠져서는 곤란하다. 나는 고스란히 나대로 남아있는 상태에서 상대의 백치를 조롱해 깨우치게 하는 것도 백치에 경종을 울리는 한 가지 방법이라 하겠다.

6.
에코의 글이 가지는 현실적인 쓰임새는 「도둑맞은 운전면허증을 재발급 받는 방법」에 정확히 나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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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크 - 21세기를 지배하는 네트워크 과학
알버트 라즐로 바라바시 지음, 강병남 외 옮김 / 동아시아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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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에서는 흔히 세 다리 건너면 모두 아는 사람이라는 말이 진리처럼 통한다. 그러나 세 다리 건너면 모두 아는 사람이라는 풍문은 말로만 존재할 때 인간관계를 고민하는 인간의 감정적인 기분에 시원한 바람을 쐬어 환기시켜주는 것 이외에 어떤 역할도 하지 않는 것 같다. 다만 세 다리에 안에 있는 사람에게 도움을 받은 후에 생각해 보면 앞서 말한 것처럼 세 다리 건너면 모두 아는 사람이라는 풍문이 진리라고 믿고 싶어진다.

이 책은 이런 풍문이 풍문만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으며, 20세기의 과학을 배후에서 이끈 주된 원동력인 환원주의에서 벗어나 복잡성, 즉 요소들의 관계인 ‘네트워크’가 “어떻게 생겨나며, 어떤 모양이고, 어떻게 진화하는가”를 다룸과 동시에 “자연, 사회 그리고 비지니스에 대한 그물망적 시작을 제시한다.”

나는 이 서평에서 현실의 복잡성을 현재까지 가장 정확하게 단순화한 ‘척도 없는 네트워크’와 인간 사회의 네트워크를 빗대보고, ‘웹의 지속 성장’과 인간 생활의 성장을 비교해 볼 생각이다.

척도 없는 네트워크란 기존의 여타 네트워크 이론들(에르되스-레니의 무작의적 네트워크, 와츠-스트로가츠의 클러스터링)에 비해 현실 세계를 가장 잘 반영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이전까지의 이론들이 링크의 평등성을 절대 기준으로 삼고 전개한 이론이라면 척도 없는 네트워크는 불균등성, 즉 현실에서 발견되는 불평등을 이론 자체가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척도 없는 네트워크의 불평등성에 대한 증거로 현실 사회의 불균등성, 다수의 링크를 얻은 소수의 존재(허브, 커넥터)를 들고 있다. 그리고 이런 불균등성에서 승리한 존재들이 자기 강화할 수밖에 없는 구조를 “성장”과 “선호적 연결” 그리고 “적합성”으로 증명하고 있다.

예컨대 어떤 웹사이트는 다른 웹사이트들보다 방문자 수가 확연히 많고, 어떤 기업은 다른 기업들보다 거래하는 기업의 수가 많고 수입 또한 많다. 이런 불평등이 네트워크의 지속적인 “성장”과 이미 성공한 것들만을 선택하고 싶은 “선호적 연결”, 가장 적합한 것들이 승리하고 독식하는 “적합성”으로 굳어진다는 것이다.

이런 척도 없는 네트워크의 관점에서 인간 사회를 보자. 불평등의 연속이다. 물론 척도 없는 네트워크의 경우와 다르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변수가 존재하지만 그것들을 차치하더라도 불평등은 인간 사회에서 때놓을 수 없다. 부의 차이로 인한 계급의 형성, 교육의 정도로 인한 차이가 인간 사회에서 나타나고 있는 불평등의 가장 효과적이고 직접적인 예라고 할 수 있고, 많은 사람을 사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존재하는 것도 인간 사회에서의 불평등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척도 없는 네트워크에 따른 인간 사회에서 ‘불평등’은 현실 세계에 반드시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해보자. 불평등으로 인해 인간 사회에서 여러 가지 사회문제가 발생한다고 했을 때 불평등은 해결해야 하는 과제다. 단순히 웹 사이트 접속자수의 차이가 아니라 인간의 생존이 달린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세포 안에 존재하는 네트워크의 구조를 이해하여야 한다는 것이다.”라고 적고 있다. 이것이 네트워크를 이해하기 위한 이 책의 현실적 쓸모라고 할 때 불평등 또한 불평등 네트워크를 이해함으로써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웹에서의 불평등 네트워크는 무엇인가. 웹에서 정보의 접근성은 정보가 가진 가시성의 정도에 따라 달라지는데 가시성이 높으면 높을 수록 접근성은 높아진다. 웹에서 정보의 가시성은 검색 엔진에 의해 검색이 가능한가의 여부에 달려있는데 웹에 존재하는 정보의 대략 10건 중 6건은 그 어떤 검색 엔진도 찾아내지 못한다. 부익부, 승자독식. 웹이 성장하면 성장할 수록 정보의 가시성 불평등은 심화될 것이고 검색 엔진이 보여주지 않는 가시성이 낮은 정보는 쌓여만 갈 것이다. 물론 가시성이 높을 수록 정보의 효용성이 높을 수 있다. 문제는 가시성이 낮은 정보는 효용성의 여부를 판단한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히 비효율이다. 그렇다면 웹에서 가시성이 낮은 정보들이 정보의 효용성을 판단할 수 있을 정도의 가시성을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웹에서 기회의 평등은 아무래도 불가능할 것만 같다. 다만 웹의 가시성 불평등을 통해 인간 사회의 불평등을 조망해 볼 수 있다.

인간 사회의 불평등 네트워크는 웹 보다 훨씬 많은 변수가 작용하고 있다. 게다가 웹에서의 불평등이 인간 사회에서의 불평등을 통한 환경 파괴나 각종 사회문제 같은 삶과 결부된 심각한 문제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다. 그러나 불평등의 현실에서 승자들은 웹에서와 마찬가지로 지속적인 성장과 자기 강화의 과정을 통해 평등의 요소를 제거함과 동시에 과시적 소비로 환경을 파괴하고 있다. 웹에서 정보 생산을 절제하는 것으로 불평등을 해소하는 것은 의미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인간 사회에서 생산을 절제하는 것은 자기 강화의 과정에서 비롯되는 비효율과 과시적 소비로 인한 환경 파괴의 부작용을 해소할 수 있다.

그러나 부자들은 더 많은 부를 획득하기 위해 가오나시처럼 배불리는 짓을 멈추지 않고 서민들은 부자들의 소비를 모방하는 저급한 문화 현상을 반복하고 있다. 카드빚이 쌓여도 명품을 소비하고 그것도 부족하면 짝퉁으로 자기 자신마저 속인다. 인간 사회가 이런 맥락에있을 때 인간 사회에 희망적인 미래는 없다. 정말 뿐이다. 과연 인간 사회에 절제란 존재할 수 있는 걸가. 사회적 합의는 가능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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