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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크 - 21세기를 지배하는 네트워크 과학
알버트 라즐로 바라바시 지음, 강병남 외 옮김 / 동아시아 / 2002년 10월
평점 :
한국 사회에서는 흔히 세 다리 건너면 모두 아는 사람이라는 말이 진리처럼 통한다. 그러나 세 다리 건너면 모두 아는 사람이라는 풍문은 말로만 존재할 때 인간관계를 고민하는 인간의 감정적인 기분에 시원한 바람을 쐬어 환기시켜주는 것 이외에 어떤 역할도 하지 않는 것 같다. 다만 세 다리에 안에 있는 사람에게 도움을 받은 후에 생각해 보면 앞서 말한 것처럼 세 다리 건너면 모두 아는 사람이라는 풍문이 진리라고 믿고 싶어진다.
이 책은 이런 풍문이 풍문만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으며, 20세기의 과학을 배후에서 이끈 주된 원동력인 환원주의에서 벗어나 복잡성, 즉 요소들의 관계인 ‘네트워크’가 “어떻게 생겨나며, 어떤 모양이고, 어떻게 진화하는가”를 다룸과 동시에 “자연, 사회 그리고 비지니스에 대한 그물망적 시작을 제시한다.”
나는 이 서평에서 현실의 복잡성을 현재까지 가장 정확하게 단순화한 ‘척도 없는 네트워크’와 인간 사회의 네트워크를 빗대보고, ‘웹의 지속 성장’과 인간 생활의 성장을 비교해 볼 생각이다.
척도 없는 네트워크란 기존의 여타 네트워크 이론들(에르되스-레니의 무작의적 네트워크, 와츠-스트로가츠의 클러스터링)에 비해 현실 세계를 가장 잘 반영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이전까지의 이론들이 링크의 평등성을 절대 기준으로 삼고 전개한 이론이라면 척도 없는 네트워크는 불균등성, 즉 현실에서 발견되는 불평등을 이론 자체가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척도 없는 네트워크의 불평등성에 대한 증거로 현실 사회의 불균등성, 다수의 링크를 얻은 소수의 존재(허브, 커넥터)를 들고 있다. 그리고 이런 불균등성에서 승리한 존재들이 자기 강화할 수밖에 없는 구조를 “성장”과 “선호적 연결” 그리고 “적합성”으로 증명하고 있다.
예컨대 어떤 웹사이트는 다른 웹사이트들보다 방문자 수가 확연히 많고, 어떤 기업은 다른 기업들보다 거래하는 기업의 수가 많고 수입 또한 많다. 이런 불평등이 네트워크의 지속적인 “성장”과 이미 성공한 것들만을 선택하고 싶은 “선호적 연결”, 가장 적합한 것들이 승리하고 독식하는 “적합성”으로 굳어진다는 것이다.
이런 척도 없는 네트워크의 관점에서 인간 사회를 보자. 불평등의 연속이다. 물론 척도 없는 네트워크의 경우와 다르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변수가 존재하지만 그것들을 차치하더라도 불평등은 인간 사회에서 때놓을 수 없다. 부의 차이로 인한 계급의 형성, 교육의 정도로 인한 차이가 인간 사회에서 나타나고 있는 불평등의 가장 효과적이고 직접적인 예라고 할 수 있고, 많은 사람을 사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존재하는 것도 인간 사회에서의 불평등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척도 없는 네트워크에 따른 인간 사회에서 ‘불평등’은 현실 세계에 반드시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해보자. 불평등으로 인해 인간 사회에서 여러 가지 사회문제가 발생한다고 했을 때 불평등은 해결해야 하는 과제다. 단순히 웹 사이트 접속자수의 차이가 아니라 인간의 생존이 달린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세포 안에 존재하는 네트워크의 구조를 이해하여야 한다는 것이다.”라고 적고 있다. 이것이 네트워크를 이해하기 위한 이 책의 현실적 쓸모라고 할 때 불평등 또한 불평등 네트워크를 이해함으로써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웹에서의 불평등 네트워크는 무엇인가. 웹에서 정보의 접근성은 정보가 가진 가시성의 정도에 따라 달라지는데 가시성이 높으면 높을 수록 접근성은 높아진다. 웹에서 정보의 가시성은 검색 엔진에 의해 검색이 가능한가의 여부에 달려있는데 웹에 존재하는 정보의 대략 10건 중 6건은 그 어떤 검색 엔진도 찾아내지 못한다. 부익부, 승자독식. 웹이 성장하면 성장할 수록 정보의 가시성 불평등은 심화될 것이고 검색 엔진이 보여주지 않는 가시성이 낮은 정보는 쌓여만 갈 것이다. 물론 가시성이 높을 수록 정보의 효용성이 높을 수 있다. 문제는 가시성이 낮은 정보는 효용성의 여부를 판단한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히 비효율이다. 그렇다면 웹에서 가시성이 낮은 정보들이 정보의 효용성을 판단할 수 있을 정도의 가시성을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웹에서 기회의 평등은 아무래도 불가능할 것만 같다. 다만 웹의 가시성 불평등을 통해 인간 사회의 불평등을 조망해 볼 수 있다.
인간 사회의 불평등 네트워크는 웹 보다 훨씬 많은 변수가 작용하고 있다. 게다가 웹에서의 불평등이 인간 사회에서의 불평등을 통한 환경 파괴나 각종 사회문제 같은 삶과 결부된 심각한 문제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다. 그러나 불평등의 현실에서 승자들은 웹에서와 마찬가지로 지속적인 성장과 자기 강화의 과정을 통해 평등의 요소를 제거함과 동시에 과시적 소비로 환경을 파괴하고 있다. 웹에서 정보 생산을 절제하는 것으로 불평등을 해소하는 것은 의미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인간 사회에서 생산을 절제하는 것은 자기 강화의 과정에서 비롯되는 비효율과 과시적 소비로 인한 환경 파괴의 부작용을 해소할 수 있다.
그러나 부자들은 더 많은 부를 획득하기 위해 가오나시처럼 배불리는 짓을 멈추지 않고 서민들은 부자들의 소비를 모방하는 저급한 문화 현상을 반복하고 있다. 카드빚이 쌓여도 명품을 소비하고 그것도 부족하면 짝퉁으로 자기 자신마저 속인다. 인간 사회가 이런 맥락에있을 때 인간 사회에 희망적인 미래는 없다. 정말 뿐이다. 과연 인간 사회에 절제란 존재할 수 있는 걸가. 사회적 합의는 가능한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