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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농장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
조지 오웰 지음, 도정일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평점 :
우화, 풍자 소설인 《동물농장》의 플롯이 어떻게, 줄거리는 간략하게 이러이러하다는 요약보다. 조지 오웰이 이 소설을 통해 제기한 근본적인 물음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이 플롯과 줄거리를 아우르면서 현실 세계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는 방법이라 생각한다.
우선 오웰은 자신의 글이 분명히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있으며 “전체주의에 반대하고, 민주적 사회주의를 위한”것이라고 「나는 왜 쓰는가」에서 밝히고 있다.
이 소설을 읽고 내가 던져본 질문은 이렇다.
1. 혁명은 혁명의 약속을 배반하는가
2. 혁명 이후의 성과는 혁명을 주도했거나 권력과 재정 능력을 지닌 지식인에게만 돌아가는가.
3. 대중은 왜 갈팡질팡하고 생각하지 못하는가.
4. 나는 왜 사회과학 서적을 읽는가.
우선 1,2,3번의 질문은 이 책의 해설에 역자 도정일이 언급한 것과 같으며, 모두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다. 1번 질문에 대한 질문이자 답은 2번이며 3번과 4번도 마찬가지다. 이 소설을 읽고 던질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질문인 동시에 오웰 자신의 의도가 담긴 질문이기 때문일 것이다. 4번 질문은 3번 질문과 깊은 관계가 있다. 4번은 내 자신이 나에게 던진 질문이자 모두에게 말하고 싶은 답이다.
우리는 익히 역사적인 사건을 토대로 한 소설, 영화, 드라마 등의 작품을 통해 부패한 기존 지배 권력을 뒤엎고 새로운 시대를 여는 상황을 많이 보았다. 어찌 보면 역사는 어떤 책 제목처럼 ‘배반의 역사’라고 불리는 게 가장 적절한 지도 모르겠다. 새로운 시대를 여는 상황, 한 단어로 ‘혁명’을 경험하진 못해도 매체를 통해 보아온 우리는 혁명 이후 지배 계층이 기존 지배 권력처럼 권력에 찌들고 부패해 가는 과정 또한 익히 보아왔다. 그런 상황 속에서 현 시대에 우리는 인간은 권력 속에서 부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진리처럼 받아들이며 습관처럼 말하고 있다. 사실적이고 눈앞에 내놓을 수 있는 증거가 없다면 어떤 가정도 무의미할 수밖에 없다. 혁명 이후에 부패하지 않은 사실적인 흔히 말하는 ‘산증인’과 다름없는 상황을 보여줄 수 없다면 여전히 “혁명은 당초의 약속을 배반하”는 것이 되고 불필요한 공수레 공수거일 뿐이다.
오웰은 이 소설에서 혁명 이후의 혁명 배반을 그리고 있으며 배반을 통한 혁명과 모든 것의 소멸을 암시하고 있다. 이것은 오웰이 혁명은 꼭 배반성을 내포하고 있는가와 같은 물음에 자신 또한 고민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 혁명에 대한 배반은 어떻게 발생하는가.
혁명에 대한 배반은 보통 혁명을 주도했거나 재정을 담당할 수 있는 지식인의 몫이다. 자신들의 역할을 이용해 권력을 형성하고 지배체제를 더욱 굳건히 하는 과정은 익숙하다. 애초에 혁명의 목표는 소설 속 클로버의 기대처럼 “굶주림과 회초리에서 벗어난 동물들의 사회, 모든 동물이 평등하고 모두가 자기 능력에 따라 일하는 사회……강자가 약자를 보호해 주는 그런 사회”를 만드는 것이지만, ‘혁명 권력’이 어떤 견제 없이 잠시 동안의 평화로움과 긴장의 끈을 놓은 여유를 틈타 부패하기 시작한다. 이는 분명히 팽팽한 긴장 상황에서 벗어나 축 늘어진 고무줄 같은 상황이다. 어떤 견제도 없는 상황에서 권력은 부패하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혁명 권력의 횡포를 애초에 방지하는 길은 무엇인가.
이 소설에서 동물들은 돼지들의 명석함에 모든 걸 믿고 맡기며 열심히 일만 한다. 존즈 시대보다는 자유롭기 때문에 더 행복하다는 생각에서다. 혁명을 이룬 초기에는 나폴레옹과 스노볼이 서로 반대 의견을 제시하며 긴장 상태를 유지했기 때문에 어느 정도 혁명의 평화로움과 여유가 지속됐지만 나폴레옹이 무력으로 스노볼을 몰아냄으로써 혁명 권력의 횡포는 본격적으로 가속 페달을 밟기 시작한다. 분명히 체제라는 것은 서로를 견제할 수 있고 긴장 상태를 유지시킬 수 있으며 서로의 제안을 비판적으로 검토할 수 있는 세력이 필요하다. 동물(대중)들은 어떤 세력이 어떤 가치를 최우선으로 하고 있는지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길렀어야 했다. 무조건 시키는 대로 일 할 것이 아니라 견제 수단도 마련했어야 하는 것이다.
인간에게 이런 견제 수단을 어떻게 마련되는가를 생각해 볼 때 나는 “사회과학 서적”을 읽고 인간 사회의 갖가지 부조리한 것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 그 방법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한 가지 비관적이고 절망적인 사실은 다수의 인간들은 항상 그것과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신변잡기 일본 소설과 아부의 기술을 터득하라고 명령하는 자기 계발 서적은 판매 순위에서 단연 1, 2위다. 대부분의 인간들이 ‘정치’가 뭔지도 모르면서 정치와 정치인을 혐오하며 투표하지 않은 것을 자랑스럽게 여김과 동시에 정책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는다. 분명 인간의 모든 것을 정치로 치환할 수는 없지만 인간 실생활의 거의 모든 공동체적 결정은 정치적이다. 인간들이 권력에 대해 견제 능력을 가지려면 우선 체제에 대해 알아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 체제 안에서 모든 의사 결정이 어떻게 이루어지며 자신들이 어떤 권리를 행사할 수 있고 어떤 권리를 행사해야 하는지 끈임 없이 생각하고 고민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소수의 권력에 인류의 성과를 고스란히 갖다 바치는 것을 막는 유일한 길이다. 인간의 삶이 이렇게 피곤할 수밖에 없는가란 질문에도 그렇다라고 답할 수밖에 없다.
오웰의 이 우화, 풍자 소설은 2008년 지금에 와서 어떤 신선한 재미를 주지는 못하지만 끈질긴 문제의식을 던진다는 점에 그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