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키치, 우리들의 행복한 세계 - 예술사 이야기 ㅣ 지식전람회 21
조중걸 지음 / 프로네시스(웅진) / 2007년 1월
평점 :
절판
키치의 이해
이 책을 읽고 나서 단 번에 ‘키치는 무엇’이라고 정의할 수 없는 이유는 개념이라는 것이 단 번에 정의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개념은 역사적으로 그 개념이 사용된 파편적인 배경을 번호가 적힌 조각 맞추기 하듯 하나하나 순서대로 맞춰 봄으로써 그 개념의 전체 이미지를 그려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이고, 어떻게 현실에 적용 가능한 지 생각해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저자는 이런 개념의 특성을 알고 있으며 예술사의 과정에서 키치의 파편적인 조각을 모아 키치의 전체 이미지를 그려내고 있다.
키치는 “고급예술인 채 하는 통속예술”이다. 저자는 ‘자연’을 실재라고 규정하고 인간 이성의 인식으로 이해하기 힘든 이 난해하고 고통스러운 실재를 해석하기 위해 노력한 예술을 고급예술이라 한다. 다시 말해 고급예술은 “인간과 삶과 우주에 대해 진실하고 깊이 있는 통찰을 보여주”는 것이다. 인간과 삶과 우주에 대한 통찰은 인간과 자연 사이에 있는 간극—인간이 이 자연세계의 신비함을 이해할 수 없는 현실—을 제거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이런 고급예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에 걸 맞는 지적 수준과 교양이 필요하다.
“산업혁명 이래 조성된 일상적 삶의 조건” 즉 멈출 수 없는 물질적 생산 때문에 “탈진할 정도의 근로”를 해야 하고 그로 인해 “공허하고 무의미한 활동욕구”에 사로 잡혀 있으며, “초조함”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난해하고 상당한 지적 수준을 요구하는 고급예술은 고통스러운 삶에 무게를 더욱 무겁게 할 뿐이다. 그보다는 잠깐이나마 쉴 수 있는, 현실의 난해함을 잊고 환상에 젖을 수 있는 예술이 그들에게 필요하다. 마이클 무어 감독의 부시 행정부 외교정책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다큐멘터리 영화 <화씨 9/11>이나 얼마 전 개봉한 <식코sicko>보다 환상적인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는 영웅의 이야기를 담은 <인디애나 존스>나 <아이언 맨>이 잠시나마 삶의 고통을 덜어주기에는 충분한 것이다. 이런 예술이 통속 예술이고 앞서 언급한 산업사회의 특성이 통속예술을 폭발적으로 증대시켰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보자. 저자가 말했듯이 키치는 “고급예술인 채 하는 통속예술”이다. 통속예술은 고급예술인 채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키치와 다르다. 통속예술은 그 가벼움과 환각을 드러내놓지만 키치는 “기와로 만들어진 독립기념관이나 서울대학교의 규장각”, “그리스와 중세의 건축 양식을 모방한 경희대학교 캠퍼스”처럼 진지한 채 한다.
이쯤 되면 키치는 왜 통속예술과 달리 고급예술의 고귀함과 품격, 혁신성을 모방하고 있는지 의문이 생긴다. 이 의문에 대한 답은 키치의 근대적 탄생 배경을 살펴봄으로써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찰리 채플린의 영화 <모던 타임즈>는 산업사회 노동자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유명하다. 산업사회의 노동자는 일관 작업대에서 기계처럼 반복적인 움직임으로 분업화 된 노동을 해야 한다. 이런 노동에 창조와 보람은 없다. 노동에서 어떤 창조적 의미도 발견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노동을 통한 창조적 의미의 발견은 곧 노동을 통한 자아실현을 의미 한다. 자아실현이 불가능한 산업사회의 노동자—일반 시민(대중)—들은 무엇으로 자아실현을 이룰 수 있을까. 기계적인 노동으로 벌어들인 돈을 이용한 소비를 통해서만 자아실현이 가능하다. 그에 따라 산업사회의 모든 것은 소비되기 위해 존재한다. 지식, 예술, 여행, 인간 등 모든 것이 소비의 대상이다. 키치는 소비자의 허위의식과 소비욕구를 부추긴다. 키치는 자본과 긴밀하게 연관된 기획 상품 같은 것이다. 키치는 창조성을 갖고 자아실현이 가능한 것으로 보이기 위해 고급예술의 특성을 모방하는 것이다. 키치는 고급예술의 모방을 넘어 소비자에게 아부하고 이것이 현실이라고 속이며 기만하는 것이다.
키치는 이렇게 자본 상품 소비를 통해 일상생활 속으로 들어오게 됐다. 이후 키치는 “특정한 종류의 예술 작품을 지칭할 뿐만 아니라 하나의 삶의 양식을 가리키는 용도”로도 쓰이게 됐다. 이는 19세기말 부를 축적한 유럽의 부르주아들이 그들 이전에 권력을 지배하던 귀족들의 문화를 경쟁적으로 흉내 내기 시작한 것과 같다. 이미 귀족들의 관심사도 아닌 그럴 듯해 보이는 미술품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는 안목 없이 마구 사들여(남경태의 《개념어 사전》에서 키치 항목 참고)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물들이 얼토당토않게 공존해 있게”된 것이다. “일부러 어색하게 꾸민 패션이나 복고풍의 유행”이 그것인데, 일반적으로 일상생활에서의 사용되고 있는 키치란 개념은 이렇게 시간과 공간이 서로 어울리지 않는 사물끼리의 공존을 표현하는 데 쓰인다.
키치는 예술에서와 마찬가지로 상품을 상품 자체가 아닌 상품의 구입을 통해 남들과 구별되는 차별적인 자아를 형성할 수 있는 것처럼 환상을 심어준다. 그리고 소비를 통해 자신의 지위와 부를 드러낼 수 있다고 부추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생산력의 증대로 인한 부의 증대가 쓸모를 넘어선 속물근성과 낭비를 부른다. “구매력이 있는 계층에게는 키치를, 없는 계층에게는 소외와 박탈감”을 심어준다. “키치는 비반성적이고 비자각적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