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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ㅣ 펭귄클래식 6
프란츠 카프카 지음, 홍성광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8년 5월
평점 :
품절
이 서평은 펭귄클래식코리아에서 2008년 5월에 출간된 《성》에 한정지은 것이며 책을 다 읽고 쓴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책의 개관과 주제에 대한 이해가 담겨 있지 않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 책을 106p까지 읽었으며 화, 수, 목, 금 4일이 걸렸다. 지금 내 조급한 성격의 한계에 와 있으며 그렇지 않아도 난해한 텍스트를 난해하게 번역한 번역자를 원망하고 있다. 번역을 해보지도 않았고 해보지 않았으면 사소한 것에 왈가왈부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번역인 것도 안다. 그렇지만 지극히 개인적인 차원에서 이 책의 번역에 대한 원망을 풀어놔야겠으니 애교로 봐 주었으면 한다. 이 서평은 내가 이 책을 이해하지 못하고 짜증이 솟구쳐 덮게 된 이유와 경위를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지극히 개인적인 차원에서 나열한 쓸모없는 서평이 될 것이다.
1. 이 책, 이 소설을 난해하게 만드는 요소 중 하나는 단연 연관성 없는 상황 속에서의 관념어의 과용과 상념의 연결이다. 시간의 전개 속에서 어떤 상황이 펼쳐지는 동안 또 다른 어떤 상념이 끼어들어 이야기에 집중하지 못하게 한다. 물론 이야기 전개 속에서 캐릭터의 주관적인 독백이 등장하는 건 여타 소설에서도 익히 등장하는 상황 전개지만 그 상념에는 자신도 이해하지 못할 만한 관념어들이 응축되어 있어 내용을 종잡을 수 없게 만드는 난해함이 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원서와 비교해보지 못했기 때문에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내 느낌에 불과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흔히 문학 해석에 대해 ‘꿈보다 해몽’이라는 다소 회의적인 수사를 쓰곤 하는데 보통은 꿈에 대한 해석이 그 꿈보다 난해할 때 그런 수사를 사용한다. 이를테면 이렇다. 이 소설에 대한 번역자이자 해설자인 홍성광은 이 소설의 해설에서 “카프카의 작품에서 시간의 개념은 우리의 일상적이고 상식적인 개념과는 다르게 나타난다. 카프카의 잠언 및 일기에서 묘사되는 시간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관념과 이미지들에서는 당대의 역사주의와 다원주의의 중요한 시간관념인 진보적 시간 의식이 해체되고 있다”고 말한다. 106p 밖에 읽지 못해서인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해설임과 동시에 카프카의 소설보다 더 개념어들을 남용하고 있다. “진보적 시간”은 도대체 무엇인가. 이것이 어디까지나 내 무지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이 아님을 변명하자면 나는 홍성광이 언급한 카프카의 작품에 대한 다양한 해석 즉, “신의 심판과 은총, 신과의 실질적 단절, 원죄의 문제를 중신으로 풀어가려는 종교적 해석, 공산주의 입장의 해석, 카프카가 자신의 부친에 갖는 콤플렉스, 실존주의적 해석, 시온주의적 해석”을 나름대로 이해하고 있다.
2. 이 책은 이런 난해함에 더해 빈번한 비문과 지칭어의 남용으로 내용 이해와 집중을 끈질기게 방해한다. ‘그것은 그렇기 때문에 그래야 한다’는 식의 문장이 지칭어의 남용이다. 이 책의 해설에 홍성광이 줄거리를 적어 놨는데 그 중 가장 눈에 띄는 비문은 “그 후에 k는 마부인 게어슈테커의 청으로 그와 함께 그의 집으로 간다”라는 문장이다. 이런 비문들의 번역의 과정에서 이 소설에 반영되었다고 본다.
쪼잔하게 비문 하나 꼬투리 잡아서 번역 전체를 폄하하고 있다 라던가 네가 멍청해서 이해를 못하는 거다 라고 하면 할 말은 없다. 해설자가 적어 놓은 줄거리도 이해하지 못하겠는데 어쩔 수 없다. 촛불 집회와 개인적인 사정으로 소설에 집중할 수 없었던 상황도 고려해 본다면 앞서 여러 번 말했다시피 굉장히 개인적인 차원에서 책을 이해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런 이유에서 어떤 계기가 없는 이상 다시는 이 책을 펼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어떤 할 말도 없어야 한다.
이 소설을 명확히 이해하고 있거나 내가 언급한 것들이 별 문제가 안 되면서 이 소설을 읽을 수 있는 방법을 아시는 분들의 연락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음을 밝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