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이제부터 해야 할 일은 K를 국가에 가두지 않고, 좀 더 열린 상태에서 새로운 인자를 수용하려는 마음을갖는 것입니다. 그만큼 지금의 사회 변화에 공명함으로써 새로운 K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 가장 필요합니다. 이를 위해서해야 하는 일은 지키는 것이 아니라 개방성을 갖추는 일입니다. 박제하듯 문화재처럼 보존하고 전승하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지금도 새롭게 합의되고 확장되며 만들어지는 과정을 일상화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시기 - P40
최근에 귀납이 주목받고 있습니다. 귀납이 바로 머신러닝machine learning, 즉 기계 학습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기계학습은 발생하는 현상을 기반으로 패턴을 바라보고 규칙을탐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능해진 이유가 빅데이터와 AI덕분입니다. 다양성 시대에 맞는 인간의 태세를 정해야 합니다. ‘오리너구리‘를 수용하는 것뿐 아니라 본인이 ‘오리너구리‘가 되는 것을 주저하지 말아야 합니다. 경계를 버리고, 감각을 버리는 것이 필요합니다. - P64
넷플릭스 출신인 도반 L에게서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L이 본 넷플릭스는 일이 늘어나는 걸 막기 위해 매니저들이 존재하는 것 같았다고 합니다. 어떤 일을 할 때마다 끊임없이 ‘이게 진짜 필요한 일이야? 이게 정말 해야 되는 일이야?‘를 까다롭게 물어본다는 것입니다. 규모가 큰 조직일수록 반드시 해야 하는 일과 그렇지 않은 일을 판단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시스템 자체가 관료화되어 있으면 의도적으로 또는 본의 아니게 본질에서 벗어난 프로세스에 시간과 인력이 투입되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 P172
건전한 부모 자식 관계는 무리한 요구는 거절할 수 있음을 전제로 합니다. 무엇보다 거절당한 후 상처받지 않는 ‘상호 신뢰‘와 ‘막역함‘ 또한 이러한 관계의 선행조건입니다. 새로운 삶의 시도를 자유롭게 누려볼 수 있을 정도로 가족의 신뢰를 얻고, 기후가 변화무쌍한 바깥의 삶을 누려볼 수있었기에 이슬아는 부모에게 관계의 재정립을 제안할 수 있었으리라 짐작해 봅니다. ‘가장‘의 탄생 설화는 그 부모의 ‘억압 없음‘에서부터 시작된 것일 수 있습니다. - P220
가장 아름다운 것은 서로 깔끔하게 주고받는 것입니다. 또는 주고받는 게 없는 관계이거나 말입니다. 받는 걸 당연히 여기거나 ‘나는 적어도 이만큼은 받아야 하는데‘라는 자세는 위험합니다. 어린아이도 용돈을 받으면 고마워할 줄 압니다. 그것이 우리 사회를 건강하게 움직이는 일종의 ‘염치‘ 라는 것입니다. - P236
60세가 넘으면 귀가 순해지는 이순이라는데, 귀가 순해진 게 아니라 더 까탈스러워진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내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고 ‘약한 부분‘을 공유해야 ‘관계‘가 생기는데, 그 연습의 장이 거의 없었던 것입니다. 약점을 노출하면 무시당하고 손해보았던 상처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 P258
륭한이 장면에 많은 사람들이 공감의 박수를 쳤다고 합니다. 다들 느끼고 있었던 것입니다. ‘모두가 훌륭한 사람이 될 필요는 없다. 내 존재의 의미를 갖고 주체적으로 살 수 있다면충분하다‘라고 말입니다. - P261
지금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자는 것입니다. ‘나는 소중하기에‘ 내 소중한 삶을 유예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관계 속책무는 자신이 지켜나가야 할 ‘내 삶의 일부입니다. 하지만누군가를 부양하기 위한 도구로 내가 태어난 것은 아닙니다. 각자의 삶의 중심은 자기 자신에게 있습니다. 부양의 의무는 ‘내가 해야 할 일‘ 중에 하나일 뿐이지 그것이 ‘나의 모든것‘이 될 수는 없습니다. - P263
파키스탄 사람과 결혼한 도반 L의 경우처럼 핵개인들은 ‘타자‘를 맞이할 때에 그 태도에서 더욱 빛을 발합니다. 그들은 낯선 이를 경계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스스로도 자신이타자가 될 수 있음을 겁내지 않고, 새로운 타자를 만났을 때에도 주저함이 없습니다. 결론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하지않습니다. 다양성이 생태계의 희망입니다. - P272
세계의 누구도 하지 않은 고민을 계속하면 적어도 그누구보다 앞에 선 나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내가 맨 앞에있다면, 먼저 최대한 많이 고민해 본 것이라면, 그때 비교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스스로에게 너그러워질 수 있습니다. 그다음에 오는 것은 산의 정상에 오른 뒤에야 산의 높이를 나타내는 숫자가 목표가 아니었음을 깨닫는 것과 같습니다. 결국 인정의 정점에는 나 자신으로부터의 인정이 있습니다. 이 시점에 이르면 밖으로부터의 인정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가 행하는 것이 결국 내 인생‘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우리는 자유로워집니다. 그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최고‘라는 상댓값이 아니라, 가장 잎에 선 자가 맛보는 ‘최선‘이라는 절댓값입니다. - P2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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