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의관 1 - 법의관 케이 스카페타 시리즈 15
퍼트리샤 콘웰 지음, 유소영 옮김 / 노블하우스 / 2004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내가 추리소설을 읽을 때 사용하는 (지극히 자의적인) 구분법은 '레이먼드 챈들러 이전/이후'다. 챈들러 이전(BC)과 말로 이후(AM)라고나 할까. 이 구분법은 전적으로 내 빈약한 추리소설 독서 경험에서 나온 것이다. 2003년에 (박찬욱 감독이 언급했다는 이유만으로 절판된 녀석을 출판사에 전화까지 해서 애써 구해서) 읽었던 페터 회의 『눈에 대한 스밀라의 감각』이 시발점이었다. 사건을 자꾸 부풀리고 인물도 계속해서 추가되는 그 복잡한 플롯 속에서 길을 헤매며 가까스로 작품을 다 읽었을 때, 나는 분명히 이 작품이 기존에 읽었던 아서 코난 도일이나 모리스 르블랑, 혹은 애거서 크리스티의 작품들과는 어딘가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2004년에 북하우스에서 출간을 시작한 레이먼드 챈들러의 필립 말로 시리즈를 보고 나서 그 느낌은 좀 더 분명해졌다. 작품들이 추리소설로서의 추리 구조 외에 다른 것을, 주인공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을 담아내려고 하고 있다는 느낌.

 그게 아마도 장르가 자의식을 갖게 된 일종의 분기점 같은 게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한 장르가 자신이 갖추고 있는 아이콘과 플롯, 이야기 방식 등을 엮어내는 즐거움 속에서 노닐다가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 그렇게 놀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그런 순간이 있다. 내가 지금까지 왜 이렇게 놀고 있었을까, 나는 왜 이런 놀이 방식을 좋아하는 걸까, 기타 등등. 자기 행동에서 의미를 찾아가기 시작하는 것, 그것이 장르가 겪게 되는 성장이라고 본다(물론, 사람의 발달 과정과 매우 흡사하다. 신생아들은 외부 환경이 가져다주는 자극에 익숙해진 다음에야 자신을 인식하지 않던가). 한 장르의 맥이 완전히 끊겨버리지 않는 한, 후대의 작가들은 선대의 작품들 위에서 자라나기 마련이며, 따라서 장르가 '자신을 돌아보는', 이 성장 과정은 필연적인 듯 하다.

 그리고 특히 수많은 장르들 중에서도 추리소설의 성장 과정은 무척 흥미롭다. 그것은 아마도 이 장르가 다루고 있는 '범죄'라는 요소가 사회 탄생 이래 단 한 번도 떨어져 본 적이 없는, 인간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기 때문인 듯 하다. 추리소설의 자기의식이 강해져 감에 따라, 이 장르는 점차 사람과 사회를 담아내는 데에 능숙해지고 있다. 아서 코난 도일의 시기만 해도 '아편쟁이 홈스' 운운하며 독자들에게 사소한 즐거움을 던져주는 정도의 요소에 불과했던 추리소설의 '캐릭터'는 이제 더 이상 범죄를 수사하는 역할을 맡는 데에 그치지 않고 사건과 관련을 맺는 유기적인 구성요소로서 존재하게 된다. 스밀라(『눈에 대한 스밀라의 감각』), 해리 보슈(마이클 코넬리의 해리 보슈 시리즈. 우리나라엔 『블랙 에코』와 『블랙 아이스』밖에 소개되지 않았다), 쿠르트 발란더(헤닝 만켈의 쿠르트 발란더 시리즈. 좋은책만들기 출판사를 통해 이 시리즈의 중요한 작품들 몇 편이 소개되었다) 등의 '탐정'들과 사건 사이의 거리는 셜록 홈스나 에르퀼 푸아로의 그것보다 훨씬 더 가깝다. 객관적인 관찰자, 해결사, 장르를 즐기는 태도… 오늘날의 추리소설들은 그런 것들을 상당부분 벗어던지고 있다.

 장르 이야기가 이토록 길었던 것은, 이번에 읽게 된 퍼트리샤 콘웰의 케이 스카페타 시리즈 제1작인 『법의관』이 바로 그러한 현대 추리소설의 특징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법의관』은 추리소설의 장르적 특징에도 충실한, 추리소설다운 추리소설이다. 역자 유소영 씨가 역자 해설에서 언급한 것처럼, 주인공인 버지니아 주 법의국장 케이 스카페타는 법의학자로서의 전문 지식을 최대한 동원하며 사건을 논리적으로 파헤쳐 나가는 20세기(본작은 1990년에 발표되었다)의 셜록 홈스와 같은 인물이다. 단서를 중심으로 사건의 구조를 밝혀내고 전체의 얼개를 그려내는 과정은 충분히 설득력 있게 제시되고 있다.

 그러나 『법의관』을 짜임새 있는 추리소설 이상으로 만드는 것은 이 소설이 담고 있는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력이다. 케이 스카페타는 더 이상 전대의 명탐정들 같은 '사고기계'가 아니다. 사건에 대한 수사 내용만큼이나 전면에 부각되고 있는 그녀의 삶은 독자들에게 단지 캐릭터에 대한 자그마한 즐거움(셜록 홈스가 코카인 상용자라는 사실이 셜록키언들에게 제공해주는 것과 같은)을 제공해주는 데에 그치지 않고 작품 전체의 내용과 맞물려가며 소설이 담고 있는 삶의 모습을 깊이 드러낸다. 연쇄 살인 사건의 네 번째 피해자이자 이 작품의 도입부에 등장하는 로라 피터슨의 살해 현장에서 그녀가 자신처럼 의사였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동질감을 느끼게 된다. 이런 케이의 모습은 이후 작품 속에서 여러 번 등장하면서 그녀가 범죄를 마주하며 느끼는 두려움과 분노를 보여줌과 동시에 사건 해결의 열쇠가 되기도 한다. 조카인 루시와의 관계도 마찬가지. 자식에게 무책임한 동생 대신 잠시 루시를 맡고 있는 케이는 사건을 수사하는 중간 중간 계속해서 조카를 의식하며 그녀와의 관계 맺기에 주의를 기울인다. "장미꽃에 양분을 공급하는 것은 토론이 아니며, 인간관계의 기반은 논리가 아니다. 나는 지성과 이성이라는 벽 뒤로 숨어버리는 것은 타인의 행복을 희생하여 자기 보호를 꾀하는 비겁한 행동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와 같은, 뼈를 저리게 하는 문장 속에서 이뤄져 가는 케이와 루시의 관계는 타인에 대한 이해의 과정에서 오는 잔잔한 즐거움을 제공해주는 동시에 사건의 전개와도 깊은 연관을 맺게 된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타인을 이해한다는 측면에서 특히 나를 감탄하게 했던 것은 저돌적인 형사 마리노가 아내가 죽은 지 몇 시간도 되지 않아 유창하게 진술을 하는 모습을 보고 의심하자 케이가 그 남편을 옹호하며 했던 말이었다. "그에게는 세상이 다 언어예요, 마리노. 미술가라면 그림을 그려줬겠죠. 피터슨은 말로서 그림을 그려준 거라고요. 그게 그 사람의 존재 방식이고 표현 방식이에요. 오로지 언어를 통해서. 이런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한다는 것은 그것을 언어로 표현하는 것과 다르지 않아요." 실로 심장과 폐부를 꿰뚫는 통찰력이 아닌가! 이런 말은 쉽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음성 언어와 문자 언어로 자신을 드러내는 일을 곧잘 하는 사람들이라면 케이의(혹은 콘웰의) 이 말 한 마디가 타인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 얼마나 깊은 지점을 건드리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이 작품이 '스릴러'임을 생각해 본다면 퍼트리샤 콘웰이 얼마나 글을 잘 쓰는 작가인지 실감이 날 듯 하다. 정교하고 복잡한 추리소설의 구조를 엮어내고, 그 속에서 인간에 대한 깊이 있는 시선을 유지하고, 출간 당시에는 생소한 영역이었던 법의학에 대한 전문적 지식을 알기 쉽게 제시하면서, 스릴러로서의 속도감까지 가꿔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콘웰은 그 쉽지 않은 일을 성공적으로 이뤄냈다.

 1990년에 시작된 이 시리즈를 이제야 제대로 만나게 됐다는 것이 아쉽게 느껴질 법도 하지만 나는 오히려 이제부터 접하게 될 케이 스카페타 시리즈에 대한 기대감 때문에 아쉬움을 느낄 겨를이 없다. 아무쪼록 노블하우스 출판사의 시도가 성공적으로 이뤄지길 간절히(정말 간절히 빌어야 한다. 그간 시장성 부족을 이유로 중도하차하는 시리즈 번역물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바란다.

 

 덧. 『법의관』은 두 권으로 분권 출간되었으며, 케이 스카페타 시리즈 제2작인 『소설가의 죽음』 역시 두 권으로 분권 출간되었다. 노블하우스의 분권 정책에 대해서는 여러 이야기가 오가고 있는데, 무조건 잘게 쪼개놓고 사 보라고 하는 밉살맞은 출판사들과 달리 노블하우스는 이 문제에 대한 견해를 밝히는 데에 주저함이 없어서 무척 반갑다. 『법의관』 이하 이 출판사의 분권에 관한 최근의 토의를 보시려면 국내 유명 추리소설 홈페이지인 HOWMYSTRY.COM의 자유게시판 2004년 12월 5일자 글과 그 글에 달린 여러 덧글들을 확인하시길. 주소는 다음과 같다.

http://www.howmystery.com/zeroboard/zboard.php?id=c1&page=7&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1332

 개인적으로 역시 분권은 싫어하는 입장이지만 출판사가 독자들과의 교류를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의사교환에 앞장선다면 (마음 넓은 나로서는) 이해해주고도 남는다. 분권과 별개로, 책의 판형과 표지 디자인, 종이질과 무게 모두가 마음에 들었다. 편집의 경우 더 빡빡한 편집을 원하는 사람도 있을 법 하다. 내 경우는 시각적으로 헐렁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아서(내가 페이지 당 줄 수가 줄어들고 글자 크기가 커지는 경향에 불만을 품는 이유는 물론 페이지 수가 늘어나 책값이 비싸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이전에 그게 시각적으로 헐렁해 보여서 종이를 낭비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별 불만이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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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wup 2005-10-13 1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제 처음으로 읽어보는 작가라... 내용에 관한 것은 흐릿하게 보구요. 전반적인 평은 '제대로' 읽었습니다. 빽빽한 데도 아주 잘 읽히는 리뷰입니다.
 
갱스 오브 뉴욕 (2disc) - 아웃케이스 있음
마틴 스콜세지 감독,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외 출연 / 엔터원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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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포스터에 적힌 한 줄의 문구. AMERICA WAS BORN IN THE STREETS. 아아, 이 문장만큼 마틴 스콜세지를 극명하게 드러내주는 말이 또 어디 있을까? 어쩌면 스콜세지는 정말로 〈갱스 오브 뉴욕〉을 통해 자기 영화 인생의 토대를 다듬어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이미 여러 편의 영화(그것도 대부분이 수작의 경계를 가볍게 뛰어넘고, 몇 편은 걸작의 반열에 올라버린)를 통해 뉴욕의 ‘거리’를 전면에 드러낸 그로서도, ‘태초의 뉴욕’을 다섯 개의 거리가 만나는 구역, 파이브 포인츠를 통해 그려낸다는 계획은 정말이지 저항하기 힘든 유혹이었을 것이다. 19세기 중반의 뉴욕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곧 토박이들과 이주민들, 남북 전쟁-흑인-정부, 분화되어가는 계층, 그 모든 모습을 담아내겠다는 것이었으며, 제대로만 된다면 사실상 미국의 창세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터. 아카데미가 또 상을 안준다 한들 무슨 상관이랴. 세기의 걸작 냄새가 물씬 풍기는데.

 사실, 모든 아이템은 다 갖춰져 있었다. 암스테르담(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과 빌(다니엘 데이 루이스)의 세계, 다시 말해 파이브 포인츠 갱들의 세계를 굳건히 다져내는 것만으로도 이 모든 요소를 다룰 수 있었단 말이다. 암스테르담과 빌의 대립은 이주민들과 토박이들의 대립이었고, 중국인, 흑인들을 포함한 이주민들을 모두 배척하면서 파이브 포인츠를 지배하는 빌의 갱들은 곧 남북전쟁 중인 정부의 대립항이었다. 그런가하면 그 와중에 유권자들의 표를 얻기 위해 갱들과 결탁하는 정치인들은 파이브 포인츠와 떨어진 번화가에서 살아가는 부유층이었고. 그러니까, 암스테르담과 빌의 세계 속에서 벌어지는 갈등 요소를 긴밀하게 다뤄낸다면 구태여 팔을 두르며 온갖 아이템을 끌어 모으려고 하지 않더라도 자연히 계획은 성공할 참이었다.

 그리고 마틴 스콜세지는 그런 걸 정말 잘 한다. 움직임 많기로 악명 높은 스콜세지의 카메라는 그렇게 사람들 사이를 휘저으며 파고들어, 이야기의 주인공들을 언제나 한 사람의 개인이 아니라 그가 몸담고 있는 세계에 대한 대유법으로서 존재하게 했다. 물론 인간이 사회적 존재인 이상 모든 등장인물은 그가 몸담고 있는 사회를 드러내기 마련이지만 스콜세지 정도로 깊고 넓게 그 작업을 행하는 이가 얼마나 되랴.

 〈갱스 오브 뉴욕〉에서도 그는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아주 작심하고 돈을 퍼 부어서 지은 19세기 뉴욕의 세트(죽인다!) 속에서 영화는 정말 ‘창세기’의 뉴욕을 고스란히 담아낸다. 눈이 쌓인 천국의 광장에서 벌어지는 토박이 파와 죽은 토끼 파의 혈투를 그려낸 오프닝부터가 보는 이의 눈과 귀를 흠씬 두들겨 패서 끌고 들어간다. 많은 이들이 엔딩 크레딧에서 흘러나오는 U2의 주제가 ‘The Hands That Built America’를 두고 칭송했지만 오프닝의 BGM 사용은 사실 그 이상이었다. ‘프리스트’ 발론(리암 니슨)이 이끄는 죽은 토끼 파의 박진감 넘치는 등장과, 전투가 시작되며 울리는 기묘하게 현대적인 음악 및 점점 빨라지는 컷 속에서 흩뿌려지는 피를 보고 있자면 거의 돌아버릴 지경이 된다. 이런 박력과 몰입은 절대, 저얼대, 저얼대로 물량 공세로 되는 게 아니다(자연히 〈브레이브 하트〉의 평원 회전과 〈반지의 제왕〉의 오프닝을 떠올리게 된다… 감히 고백하자면, 열등 비교를 위해서!).

 그 후에도 영화는 암스테르담에게 초점을 맞춰 일사천리로 진행되면서, 동시에 꼼꼼하게 주변을 담아낸다. 그가 막 출소해서 본토에 발을 디디는 장면은 이주민들에 대한 토박이들의 경멸과 분노를, 그가 친구 자니(헨리 토마스. 이 배우는 스티븐 스필버그의 〈E.T.〉의 엘리엇이다)를 만나 불타는 집을 터는 장면은 소방 기관 하나 없는―무정부 상태에서 힘의 논리에 의해 움직이는 뉴욕의 모습을 보여준다. 특히 중반부 ‘도살자’ 빌과 정치꾼 트위드(짐 브로드벤트)가 부두에서 불화를 일으키는 장면은 사실상 영화의 핵심을 몽땅 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무정부상태의 지배자인 갱과 타협하려드는 정치인들, 그 옆에서 막 이민 온 사람들, 급료 제공을 내세우며 이주민들을 입대시키려 하는 정부, 꼬임에 넘어가 군복을 입고 배를 타는 그들의 머리 위로 지나가는 전사자들의 관. 한 테이크에 이 모든 것을 담아내면서, 스콜세지는 〈갱스 오브 뉴욕〉에 퍼부은 자신의 야심을 명백히 드러낸다. 그리고 물론, 그 야심은 충분히 매혹적이고.

 익히 알려진 다니엘 데이 루이스의 연기는 ‘포스트 드 니로’ 운운하는 게 이해가 될 뿐만 아니라 사실 어떤 면에선 드 니로보다 더 매혹적이며(칼 던지기 시퀀스에서 그의 연기는 정말… 아아…), 어쩐지 싫었던 〈타이타닉〉 이후 꾸준히 미움 받고 있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조차 멋진 연기를 펼쳐 보인다. 그 외의 조역들도 충분히 좋은 연기를 하고 있고.

 무엇보다도 마음에 드는 건 결말인데, 스콜세지는 그렇게 두 시간 반 넘게 쌓아온 두 중심인물들의 세계를 한 방에 박살낸다. 사실 중심인물의 세계가 그 동안 스리슬쩍 얽혀왔던 주변세계에 의해 무너지는 건 여타 영화에서도 쉬이 볼 수 있는 설정이지만(갱들은 대게 그렇다) 특히나 〈갱스 오브 뉴욕〉의 라스트가 도발적인 것은 그런 설정이 단순히 무너진 주인공들에 대한 연민이나 운명적인 비극의 힘으로 느껴지기 보다는 뉴욕, 혹은 미국에 대한 처절한 풍자처럼 다가오기 때문이다. 핏물이 질척이는 토박이 파와 죽은 토끼 파의 세계, 그토록 공들여 쌓은 갱들의 세계, 그 원초적인 갈등과 폭력이 더 거대한 폭력, 정부의 폭력과 세월의 폭력 속에서 삽시간에 스러지며 덮여버리는 이 라스트는, 그래서 결국 끊임없이 미국 세계 아래 ‘거리’가 있음을 지적해왔던 스콜세지 테마의 결정판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반전(反轉) 영화’라는 게 정말 있다면(이라고 말하는 건 내게 이 개념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기 때문인데) 〈갱스 오브 뉴욕〉이야말로 그 중에서도 최고로 꼽혀야 하는 영화가 아닐까.

 …라고 말하고 이 글을 마칠 수 있다면 나도 정말 좋겠다. 그러나 여전히 사람들은 〈성난 황소〉가 (물론 취향에 따라서는 〈택시 드라이버〉나 〈좋은 친구들〉, 뭐 기타 등등이) 마틴 스콜세지의 최고작이라고 말하고 있으니, 아무래도 이야기를 여기서 마치긴 곤란할 듯 하다. 그래. 솔직히 말해서 이것은 그의 최고작이 아니다. 야심도 있었고, 능력도 됐고, 제반 여건도 대부분 따라줬지만, 어쨌든 결국 지금의 〈갱스 오브 뉴욕〉은 부족하다.

 제작을 맡은 미라맥스의 하비 와인스타인은 스콜세지가 내놓은, 네 시간 반이 넘는 편집본을 보고 얼굴을 찌푸렸고, 결국 스콜세지는 “그럼 대신 DVD는 열두 시간짜리로 할 테다!”라며 극장판을 두 시간 46분으로 편집해서 내놓고 말았다. 그러니까, 난 감독이 원래 계획했던 것에 비해서 약 두 시간이 부족한 버전을 본 것이다. 세상에, 두 시간이라니! 영화 한 편 분량이 없어졌다! 그리하여 아무리 뛰어난 연출력을 선보이며 19세기 뉴욕의 다양한 요소들을 겹쳐 넣었더라도 결국 영화 속의 고리들은 느슨해져 버린 것이다. 암스테르담과 빌이라는 인물들은 어느 정도 명확하게 구축되었지만 그들과 바깥세상을 연결해줄 끈은 사라지거나 짧아졌다. 토박이들과 이주민들의 대립은 암스테르담의 개인사, 혹은 빌의 개인적인 성향 정도에서 그치고 말았고, 따라서 가끔씩 보이는 남북전쟁과 흑인 문제도 다소 생뚱맞게 느껴진다. 클라이맥스에 해당하는 '폭동의 날' 연출로 미루어 볼 때, 그리고 이 영화의 기획을 볼 때, 분명 스토리상 일익을 담당했을 부층 정치꾼들의 비중은 그야말로 대폭 축소되어서, 여러 차례 제시되는 트위드의 존재만으로는 그들의 입장을 살리기 힘들어졌다. 게다가 포스터에 얼굴까지 박힌 제니(카메론 디아즈)의 경우 그 역할이 지나치게 밋밋해졌다. 홍보 문구에 나온 ‘복수와 사랑의 잔혹한 갈림길’ 운운하는 소리야 원래 스토리와 별 상관없지만, 그렇더라도 분명히 영화적 즐거움을 더함과 동시에 갈등 요소를 한층 복잡하게 만들어줬을(제니란 캐릭터는 빌로부터 암스테르담을 향해 움직이는, 가장 격렬한 갈등을 내포하고 있는 캐릭터가 아닌가) 캐릭터가 이렇게 단순화 된 것은 크나큰 비극이다. 카메론 디아즈의 나무랄 데 없는 연기를 생각하면 더욱더. 하비 와인스타인, 〈화씨 9/11〉 배급에 열을 올리기에 좋아해주려고 했더니 〈킬 빌〉이 두 조각 난 뒤(시기적으론 〈갱스 오브 뉴욕〉이 먼저지만)로 다시 한 번 미운 꼴이 보이는 구나(“처음부터 좀 더 꽉 짜여진 연출을 했으면 될 게 아니냐.”는 소리는 무의미하겠지. 다 찍어놓고 편집했는데 그래놨으니. 피터 잭슨처럼 필요하면 다시 촬영 하는 게 아무 여건에서나 되는 게 아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그래서 난 이 영화가 무척 마음에 든다(166분짜리 영화를 이틀 연속으로 반복 감상한다는 게 흔한 일은 아니잖은가). 그러니까, 거의 반 토막이 나서도 이 정도의 생명력을 자랑하는 영화라니. 스콜세지의 연출이라는 건 정말이지 믿을 수 없을 지경이다. 뼈대만 남았을지언정 핵심은 살아있고, 다소 여유 없이 나가긴 해도(당연히 좀 더 늦게 끊었으면 좋겠다 싶은 장면들이 있었다) 이야기를 끌어나가는 에너지는 철철 넘친다. 주역들의 연기야 말할 것도 없고, 다소 단순하게 다듬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몇몇 조역들은 여전히 매력적이며, 스콜세지 영화의 음악에 대해서는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스콜세지의 세계 전체를 담아내는 〈갱스 오브 뉴욕〉의 마지막 장면만으로도 이 영화는 충분히 훌륭하다.

 

 덧 하나. 위에서 말한 열두 시간짜리 DVD 말인데, 미확인 루머에 가깝다. 그러나 적어도 네 시간 반짜리 감독판에 대한 기대는 해볼만 하다고 본다. 2006년에 〈무간도〉의 리메이크 버전인 〈The Departed〉를 발표할 예정이라서 일정이 빡센 건 알겠지만… 그래도 이거 어떻게 좀 마무리 해주면 안 될까. 10주년 기념판 같은 걸 기다리긴 너무 힘들다(물론 리들리 스콧이 예전 디렉터스 컷도 성에 안 찬다며 〈블레이드 러너〉의 새 디렉터스 컷을 공개하려고 기획 중이라는데 고작 10년 가지고 무슨 투정이냐 싶기도 하지만). 〈반지의 제왕 확장판〉 기다리는 것보다 훨씬 더 애가 탈 지경. 좋아, 코폴라도 했는데 당신이라고 ‘리덕스’ 내지 말라는 법 있습니까! 기다릴게요, 스콜세지!


 덧 둘. 엔터원에서 나온 디스크 두 장짜리 DVD는… 음… 일단 세 시간도 안 되는 영화가 둘로 나뉘어져 담겨 있다는 데에 불만을 품어봄직 하지만 사실 나는 중간에 끊기는 거 신경 안 쓰니까 상관없다(실은 나는 내가 겪어보지 못한 ‘대작 영화의 인터미션’ 전통에 애절한 향수를 느끼는 인간이다). 하지만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디스크 둘에 영화도 나눠 넣고 서플먼트도 나눠 넣은 걸 보고 있으면 한심해죽겠다. 대체 왜 그러는데? 영화가 끊어지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 구성 기획의 문제가 아닌가. DVD 디스크 한 장이면 두 시간 46분짜리 영화 통째로 넣고 음성해설 트랙까지 넣을 수 있다. 코드3 타이틀을 내놓은 엔터원의 문제가 아니라 애초에 코드1부터 그랬다고 하니 대체 무슨 속셈인지 이해할 수가 없다.


 덧 셋. 본편의 번역은 나름대로 마음에 든다. 각 조직의 이름을 의미를 살려 번역한 건 좋았다(그러나 개봉 당시에 ‘데드 래빗’을 뭐하러 ‘죽은 토끼’로 번역했냐고 하는 관객들도 있어서 좀 심란했다. 이름처럼 수 세대에 걸쳐 관습화된 고유명사라면 모를까, 조직명은 의미를 살려주는 게 좋지 않나? “네이티브 대 데드 래빗”하고 “토박이 파 대 죽은 토끼 파” 중 어느 게 좋다고 생각하시는지?). 다만 몇몇 조직들은 그게 조직명인지 아니면 그냥 일반 명사로 사용되는 건지 애매한 경우가 있었다(이를테면, ‘꼭두새벽’이라는 조직이 있다. 빌이 암스테르담 패거리에게 “꼭두새벽보다 먼저 털어야 해.”라고 지시를 내리는 부분에서 잠시 이게 어설프기 짝이 없는 직역이 아닌가 하고 의심했었다. 다행히 바로 다음에 그게 조직명이었음을 밝혀주지만). 작은따옴표로 묶거나 뒤에 ‘파’를 넣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다. 극장 개봉 당시에 이미도가 번역했다고 하던가? 극장에서 보질 않아 번역이 얼마나 바뀐 건지는 모르겠는데 속어 사용에서 이미도 번역의 기미가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이 갱들의 세계를 볼 때 오히려 어울리는 역어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서플먼트의 번역은 정말 짜증난다. 자막을 넣어준다고 능사가 아니다. 제발 본편하고 대조하면서 검수 좀 해줬으면 좋겠다. 아직 마틴 스콜세지의 음성해설은 안 들었는데, 번역이 어떨지 좀 두렵다.


 덧 넷. '갱스 오브 뉴욕' 말고 '뉴욕의 갱들'이면 어디가 덧나? 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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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벌 공장
이언 뱅크스 지음, 김상훈 옮김 / 열린책들 / 2005년 1월
평점 :
절판


 김상훈 씨의 새 번역작. 김상훈 씨의 빠돌이(…)로서 출간 정보가 뜬 당일 샀는데, 표지가 멋져서 두근거렸고, 변태 패륜 소설이라기에 두근두근했고, 다 읽고나니 가슴이 너무 뛰어서 죽을 지경. 그렇게 좋다는 게 아니라, 어딘가 미쳐버린 것 같은 느낌이 가슴을 옥죄어 들어오면서 괜히 무서워졌다는 이야기. 끝부분을 읽을 때쯤엔 몸이 떨려서 이불 속을 파고 들어가 봤다. 제길.

 대체 이 작품에 대해서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할까. 아마도 멀찍이 떨어져서 바라본다면 비교적 평이한 줄거리에 자극적인 소재로만 점철된 쓰레기 소설이라고 쉽게 단정 지을 수 있겠지만… 문제는 이 작품은 멀찍이 떨어질 수 없게 한다는 것. 불길하고 음침하면서 건조한 도입부는 확실히 읽는 이의 흥미를 유발하는 데가 있으며, 그렇게 살짝살짝 발길을 내딛다보면 어느새 강박적으로 미쳐버린 주인공 프랭크의 세계가 드러난다.

 프랭크는 아버지가 히피 시절 얻어놓고는 출생 신고를 하지 않은 탓에 공식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소년이며, 아버지와 둘이서 살고 있는 작은 섬의 ‘지배자’다. 흔히 자기의 생활공간 속에서 자기만의 비밀 장소를 선정하여 나름의 이름을 붙여 부르는 어린이의 특성이 프랭크의 폐쇄적인 생활 및 비밀스러운 과거와 얽히는 순간, 그건 그냥 '애들 장난'이 아니라 일종의 '신화 체계'로서 구현된다. 두려운 건 그 신화 체계가 지극히 상징적인 동시에 지극히 인공적이고, 분명한 목적을 가진 것처럼 느껴진다는 사실. 자신이 벌이는 신화적 행위들이, 한 발 떨어져 보았을 때는 우스꽝스럽고 유치한 짓일 수 있음을 알면서도 그 안에서 확신을 가지고 스스로의 세계를 구축해 나가는 프랭크의 모습은 정말 소름끼쳤다.

 『말벌 공장』은 전체적으로 일종의 추리소설적 구조를 띠면서 프랭크가 자신의 신화 체계 근원을 점점 드러내거나 파헤쳐 나가는 방향으로 전개되는데, 그렇게 모든 일의 근원이 되는 어린 시절의 이야기들이 하나씩 밝혀질 때마다 두려움은 더욱 커져서, 마지막 장(章)에 다가갈수록 정말 페이지를 넘기기가 싫어졌다. 그리고 결말. 이런 식의 소설에서 내가 좋아하는, 앞서의 이야기들이 뒤집혀 보이게 하는 훌륭한 반전이 나와 버리면 정말 미칠 지경이 된다. 책을 가득 채우는 온갖 폭력을 만들어낸 신화 체계는 단숨에 박살나 버리고 남는 건 이미 저질러진 폭력뿐이니. 그리고 거기까지 이르는 과정을 서술하는 이언 뱅크스의 필력은 놀랍도록 아름답고(!) 웃기기에(!!) 더욱 끔찍하다.

 그런 상황에서 여전히 주인공의 입을 통해 담담하게 사건의 전말을 서술하는 마지막 부분은 읽는 이에게 '꼬인 이야기를 설명해주기 위한, 안이한 서술 형태의 결말'을 제시해주지 못한다. 오히려 그렇게 단순히 설명하는 것만으로는 해결될 수 없고, 부정할 수 없는, 질퍽한 핏물과 거기에 다가가는 과정을 강조해줄 뿐. 프랭크의 등 뒤에 있는 문은 프랭크 자신이 말한 것처럼 닫히지 않았다. 오히려 남는 건 지금까지 지나온 길이다. 비로소 자신의 신화 체계에서 벗어난 그의 미래가 어떻게 될까 궁금해지기보다는, 책을 다 읽자마자 서둘러 책의 가장 앞 장을 펴서 다시 읽어보게 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리라. 그래서 내게 『말벌 공장』은 반(反)성장소설처럼 느껴진다.

 지독히 끔찍한 마약 같은 책. 나는 결국 이 책을 다시 집어 들게 될 테고, 앞으로 열린책들에서 나올 이언 뱅크스의 다른 책들을 고려해보자면 이 책을 추천함으로써 출판사에 조금이나마 힘을 실어주는 게 독자로서의 도리라고 생각되긴 하지만… 어쩌랴, '추천하기엔 너무 먼 당신'인 것을. 역자 해설에는 이 작품에 관한 열네 편의 짤막한 서평(대부분 이 책이 처음 출간되었을 때 언론의 반응인 듯 하다)이 인용되어 있는데, 좀 뻔하긴 해도 「데일리 익스프레스」의 서평 한 토막을 인용하는 것으로 글을 끝내면 적당할 듯 하다. "용기가 있는 사람만 읽어 볼 것."

 덧. 표지 디자인은 올해 읽어본 책들 중 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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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스크월드 1 - 마법의 색 시공사 장르문학 시리즈
테리 프래쳇 지음, 이수현 옮김 / 시공사 / 2004년 12월
평점 :
절판


 사실, 허구를 다루고 있는 예술 작품을 즐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기 마련이며, 불행하게도(혹은 다행스럽게도) 예술가 역시 그런 사람들에 속하는 무리이기에, 모든 예술 작품들은 저마다 다른 현실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의 예술 작품을 접한다는 것은 감상자가 살고 있는 세계와는 다른 세계와 만나는 일이며, 아무래도 그걸 즐기자면 다른 세계의 법칙을 체화할 필요가 있다. 이해가 잘 안된다면, 주변에선 온갖 괴상망측한 물고기들이 잘만 돌아다니는데 혼자서 헤엄을 못 쳐서 물 먹고 있는 새를 상상해보시라. 아무래도 그 새는 수중세계라는 이름을 가진, 자신이 펄럭펄럭 노닐던 세계와는 다른 그 새로운 세계를 즐기고 있을 것 같지 않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인간의 적응력이라는 건 우리 종족의 여러 가지 다양한 특성 중에서도 제법 내세울만한 것이 되는지, 우리는 어떻게 해서인지 그럭저럭 이 문제를 해결해 가며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세계사라든가 풍속사에 대해서는 쥐뿔도 모르는 내가 『몽테크리스토 백작』을 (아마도 프랑스의 독자들만큼이나) 즐겁게 읽고 있는 모습을 떠올려보자면 스스로가 참으로 자랑스럽기 그지없다. 19세기 프랑스 이야기를 당연하다는 듯이 즐기고 있는 21세기의 한국인이라니. 시공간을 초월하는 우리 종족의 적응력에 대해서 좀 더 자부심을 가져봐도 좋지 않겠는가?

 그런데 우리 종족은 얼마 전에 돌아가신 자끄 데리다 옹의 사상 체계를 어느 정도 본능적으로 체화하고 있었던 모양인지, 좀처럼 그런 적응력에 만족하질 못하고 자꾸 인간 본연의 적응력에 한계가 있음을 드러내고자 하는 시도를 한다. 그것도 자기 자신의 상상력을 이용해서. 자신의 힘을 이용해서 자신의 힘에 한계가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니 이것이야말로 해체의 본질 아니랴(아니라고? 뭐 어때. 신경 쓰지 마시길. 여러분은 이 글이 『디스크월드 시리즈 1 - 마법의 색』(이하 『마법의 색』)에 관한 글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리하여 일부 반동적인 성향을 지닌 인간들은 자기네들 스스로도 없다고 믿는 걸 자꾸 만들어내서 선량한 나머지 부류를 혼란에 빠뜨려 인간 세상을 파멸시키려고 하고 있다. 용과 기사, 지평선 너머에서 나타나 지평선으로 사라지는 황야의 총잡이, 트렌치코트를 입고 담배를 꼬나문 사립탐정, 길을 걷다가 갑자기 허공에서 들려오는 오케스트라 반주에 맞춰 춤추며 노래 부르는 건달들, 폭포를 거스르며 솟구쳐 올라 기암절벽에 장풍을 갈겨 시를 써 내리는 백의청년, 이런 게 정말 있다고 거짓말을 하는 거다.

 다행히 인간의 다수(로 보이지만 실은 소수)는 이런 거짓말을 한 눈에 꿰뚫어보는 심원한 통찰력을 갖춤으로써 인간 사회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에 의해 원활하게(정말?) 돌아가는 데에 큰 몫을 담당하고 있다. 그러나 개탄스럽게도 일부 무지몽매한 이들은 이 거짓말에 속아 넘어가 그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으니, 이들이 바로 '다차원 우주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들, 좀 더 고급스럽고 학술적인 용어를 원한다면, 장르 문학 독자들이라 불리는 무리들이다.

 이 히치하이커들이 하는 일이란, 일반적으로 해외 여행 중독증에 걸린 행객들(물론 골프 여행, 도박 여행, 매춘 여행, 이런 거 말고 학기내내 노동력을 착취당한 끝에 벌어들인 돈을 일거에 쏟아붓는 순진무구한 대학생들로 대표되는 배낭 여행객들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다)이 하는 일을 정신적으로, 혹은 다차원 우주적으로 확대 재생산하는 것과 같다.

 삶의 터전, 혹은 조국을 등지는 일에 익숙한 여행객들은 크게 두 가지에서 즐거움을 느낀다. 하나는 자기 눈앞에 펼쳐진 새로운 세계가 던져주는 충격(이지만 그들은 이것을 즐거움으로 승화시킨다)이고, 또 다른 하나는 그 세계에 익숙해져서 이방인이자 원주민으로서 그 세계를 휘젓고 다니는 것이다. 이들의 확대 재생산 버전인 장르 문학 독자들 역시 기본적으로(는) 같은 종류의 즐거움을 찾아 헤맨다. 다만 그들이 헤매는 세계는 좀(실은 많이) 더 기괴해 보인다는 게 다를 뿐.

 그리고 여기, 영국의 작가 테리 프래쳇이 1983년 이래 지금까지 스물아홉 권의 책을 통해 안내하고 있는 세계, 디스크월드는 그 수많은 다차원 우주 중에서도 가히 압권이라고 할만한 곳이다. 정신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금세 혼백이 아스트랄계로 날아가 버릴 수 있으니 집중하시라. 여긴 발 딛고 사는 땅부터가 제정신이 아니다. 광활하여 끝을 알 수 없는 우주 어딘가, 거대한 거북이가 걸어가고 있다(혹은 헤엄치거나, 기어가거나, 우주유영 하거나. 아무려면 어떤가). 운석에 난타당한 흔적이 수없이 남아있는 이 거북의 등 위엔 코끼리 네 마리가 서 있다. 그리고 그 코끼리들의 어깨 위에는 커다란 원판 - 디스크가 올려져 있다. 이 디스크는 천천히 회전하고 있고, 그 위엔 물과 대륙이 얹혀져 있다. 물은, 물론 디스크 가장자리로 끊임없이 흘러내리며 테폭포를 형성하고 있다. 자, 지금까지 사용된 어휘 중 어떤 것도 은유법을 위해 사용된 게 아니다. 지금 여러분이 떠올리고 계실 그 우스꽝스러운(그러나 최대한 장엄하게 떠올려주시라!) 모습이 바로 디스크월드의 '기본'이다.

 전체 세계가 생겨먹은 게 그런데 하물며 세부사항은 어떻겠는가? (1권만 봤을 때) 이 세계의 최강자는 주인공이 끌고 다니는 다리가 무수히 달린 짐짝(제발, 은유가 아니다!)이며, '죽음'이라는 이름의 신은 목표를 놓치기 일쑤인데다, 바빠서 자기 부하인 질병 - 그 이름도 위대하신 '연주창' - 에게 대신 일을 맡기기도 한다. 아아, 게다가, 한국의 팬터지 독자층에게 특히 감명 깊게 다가오겠지만, '투명드래건'도 나온다! 간단히 말해, 이 작품은, 광고 문구로 쓰인 『아이작 아시모프의 SF 매거진』의 문구를 재인용 하자면,

 "일관되게, 독창적으로 미쳤다."

 상상하기 난해할 정도로 황당하기에 오히려 독자로 하여금 포복절도하기에 충분한 힘을 발휘하고 있는 이 디스크월드의 세계는, 사실 기존 장르 팬터지에 대한 패러디로서 존재하는 세계이다. 단지 감옥에 갇힌 '용사'가 "이제 어떻게 될까요?"라는 동료의 걱정스러운 질문에 "아, 곧 문이 활짝 열리고 난 신전 경기장 같은 곳으로 끌려 나가 거대 거미 몇 마리 아니면 발이 여덟 개 달린 클라치 정글 출신 노예와 싸울 것이고 그런 다음 제단에서 왕녀나 그 비슷한 여자를 구해서 호위병이든 뭐든 몇 놈 죽일 것이고 그러면 이 여자가 이곳에서 나가는 비밀 통로를 가르쳐줘서 함께 말을 몇 마리 강탈하고 보물을 챙겨 탈출하겠지."라고 대꾸하는 것만 가지고 패러디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디스크월드 시리즈는 장르의 보편적인 규범을 놀려먹는 거친 패러디에는 사실 그렇게 신경을 쓰고 있지 않다. 그 존재 자체가 이미 패러디이기 때문에! 마법을 못 쓰는 마법사, 사람도 잡아먹는 최강의 짐짝, 상상으로 죽였다 살려내는 드래건, 평면 세계, 주사위 놀이를 하면서 등장인물들을 조롱하는 신들, 그 신들의 실수, 그런 모든 캐릭터, 모든 사건들이 사실상 장르 팬터지를 제법 익숙히 읽은 독자들과 만날 때 적극적인 웃음을 유발해 낼 수 있는 것이다. 디스크월드는 그렇게 장르 팬터지의 어떤 부분은 과장하고, 어떤 부분은 깔아뭉개면서 패러디인 동시에 독창적인 세계를 만들어낸다.

 그 외 이 작품을 더글라스 아담스의 코믹 SF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시리즈와 맞먹는 코미디 소설로 만든 데에는 테리 프래쳇이 보여주는(발 빠른 독자들이라면 이미 작년에 나온 테리 프래쳇 · 닐 게이먼의 코믹 팬터지 『멋진 징조들』을 통해 그의 유머 감각을 맛본 바 있을 것이다. 그 때는 몰랐지만 지금 『마법의 색』을 보고 나니 『멋진 징조들』의 유머 감각 상당수는 테리 프래쳇에게서 나왔으리라는 심증이 간다) 영국식 유머 감각과 영미 문화에 대한 패러디의 공헌도 상당하다. 그러나 그런 부분들에 대해서는 직접 읽어보면서 판단하시길. 특정 문화권의 유머 감각을 강요할 수야 없는 일 아닌가. 분명한 것은, 그런 유머 감각을 차치하더라도 이 작품은 장르 팬터지로서 극한까지 치닫는 상상력을 발휘함으로써 이미 충분히, 장엄하게 웃긴다는 사실이다.

 자, 디스크월드는 이런 곳이다. 가급적이면 다른 세계에 뛰어들어 몸을 풍덩 적시는 방법을 제법 익힌 히치하이커들에게 권하고 싶은 장소이지만, 혹시 적응력이 남달리 강해서 모르도르 쯤이야 집 앞 공터로 보이고 등하교를 라마를 타고 하시는 분들이라면 디스크월드를 찾아보시는 것을 말리지는 않으련다. 머리를 싸매고 그 기괴한 풍경을 그려내고자 시도해 볼만한 가치가 있다.

 아, 끝으로, 그래도 아직까지 순수한 '다차원 우주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가 되질 못해서 여전히 시장경제 원리에 묶여 있는 양식 있는 사람으로서 한 마디 하자면, 이거 잘 안 팔리면 나처럼 외국어 못하는 여행객은 스물아홉 번째 권은커녕 당장 세 번째 권(일단 광고 때렸으니 두 번째 권까지는 분명 나올 것이다)을 볼 수 있느냐 하는 것부터가 위태로울 지경이다. 대한민국은 아직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시장이 활성화 되지 못한 탓이다. 그러니 부디, 제발, 당장 사라. 사서보고 돌리고 한 권 더 사라. 난 이 세계에서 보다 오랫동안 노닥거리고 싶다. 읽어보신다면 여러분들도 그러고 싶은 마음이 생기실 터이고(흐음. 이쯤에서 굳이 내게 출판사 관계자가 아니란 소리를 해야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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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s-angel 2005-01-02 2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마이리뷰를 쓰고싶은데...........이걸 보니 도저히 쓸 생각이 안드네요...으음...sabbath님께서 중요한 건 대충 써 주셨으니...전 가볍게 감상이라도 써볼까요?

투명고냥이 2005-01-07 0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이 리뷰를 너무 잘 써 주셔서 제 허접한 리뷰를 올리기 무서울 정도네요. ^_^ 하지만 저도 비슷한 이유로(디스크 월드를 떠나기 싫은) 결국은 용기를 냈습니다만. 어쨌든, 이 책도 좀 유명해 져서 29권...까지는 욕심이겠지만 3,4권까지는 계속 볼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당신 인생의 이야기 행복한책읽기 작가선집 1
테드 창 지음, 김상훈 옮김 / 행복한책읽기 / 2004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과학을 세계를 파악하는 (비교적) 객관적이고 엄밀한 논리에 기반하고 있는 인식의 틀이라고 한다면, 그런 과학을 중심으로 하는 SF 소설의 세계는 기본적으로 '현실적이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현실은 '우리가 사는 태양계'라는 식의 특정 시공간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그 시공간을 바라보는 관찰자의 시각에 의해 구축된다. 즉, 이우혁의 『퇴마록』은 행성 지구를 무대로 하고 있지만 그 세계는 엄밀한 과학적 논리에 의해 제시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배경으로 기능할 뿐이며, 작품의 전개를 지배하는 것은 환상적인 힘과 인물의 주관적 인식틀이므로 SF에서 말하는 '현실적'인 세계와 거리가 멀다. 반면에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세계 라마를 바탕으로 하는 아서 C. 클라크의 『라마』는 비록 세계 자체는 허구이지만 그 세계를 파악하는 시선은 정밀한 과학 논리에서 나온 것이기에 '현실적'이다.

 (물론 여기서 이 이야기가 지극히 제한된 범위의 SF -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소위 하드 SF에 해당하는 작품들에 어울리는 이야기임을 밝힐 필요가 있다. 젤라즈니식 뉴웨이브쯤 나가면 이 SF의 S, 혹은 Science의 의미부터가 상당히 달라지는 듯 한데, 거기까지 포괄해서 이야기를 할만한 자신은 없다. 그리고 실상 지금 내가 하고 싶은 건 SF라는 장르의 의미를 명확히 제시한 뒤 거기에서 이야기를 끌어내는 게 아니라 『당신 인생의 이야기』라는 특정 작품집의 특성을 이야기하기 위해 내가 평소 몇몇 SF 소설들에서 느꼈던 이 장르의 주목할만한 특성에서부터 이야기를 전개해나가는 것일 뿐이다. 뭐, 변명은 이 정도로 해두기로 하자)

 그리고 SF의 힘은 바로 이 '현실성'에서 나온다. 분명히 현실 논리를 딛고 나가다보면 어느 순간 어쩔 수 없이 '비현실'을 인정해야하는 상황에 이르게 되는, 바로 그 순간이야말로 SF를 읽으면서 느끼게 되는 가장 짜릿한 순간이 아닌가 싶다(물론 다른 종류의 짜릿함도 있지만). SF 장르의 가장 큰 힘 중 하나는 그렇게 극과 극을 과학이라는 다리로 단숨에 이어내는 경계, 틀, 인식의 파괴에 있다는 이야기다(문득 로저 젤라즈니의 『앰버 연대기』에서 앰버와 혼돈의 궁정을 잇는 검은 길이 떠오르는구나. 그럼 코윈은 SF의 원동력, 과학 그 자체란 말인가. 『앰버 연대기』는 어쩌면 메타SF였을지도).

 여기 이 책, 『당신 인생의 이야기』는 SF의 그러한 힘을 여실히 증명해 주는 실로 경이로운 단편집이다. 테드 창의 작업은 극과 극을 이어내는 작업 그 자체다. 「바빌론의 탑」부터 「이해」, 「0으로 나누면」 등 그의 작품 대부분은 일견 공존이 불가능해 보이는 두 개의 틀을 기가 막히다 싶을 정도로 과감하게(『쿼런틴』에서 그렉 이건이 양자역학 관측의 문제를 끝까지 파고들어 인류의 전우주적 학살이라는 개념을 끌어내는 것과 같은 정도의 과감함!) 붙여내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모든 작품을 다 다루면서 앞으로 이 책을 읽게 될 분들의 즐거움을 저해하고, 동시에 이 엄청난 작품집의 가치를 부족한 글 솜씨로 몽땅 훼손할 필요는 없을 것 같으니 여기 실린 여덟 작품 중 단연 백미(물론 개인차는 있을 수 있겠다)라고 할만한 「네 인생의 이야기」만을 가지고 이야기해 보자면…

 이 중편의 구조는 언어학자인 주인공이 자신의 아이에게 하는 이야기와, 이 주인공이 외계 종족 헵타포드의 언어를 익히면서 벌어지는 사건들, 이 두 줄기의 이야기가 번갈아가며 제시되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또, 주인공이 언어학자로서 헵타포트어를 배우는 과정에서 인류의 언어와 헵타포드의 언어라는 두 언어의 상이함이 나타나고, 두 언어의 상이함은 이내 각각의 종족이 가진 세계관의 상이함으로 이어진다.

 물질 우주는 완벽하게 양의적(兩義的)인 문법을 가진 하나의 언어이다. 모든 물리적 사건은 두 가지의 완전히 상이한 방식으로 분석할 수 있는 언술에 해당된다. 한 방식은 인과적이고, 다른 방식은 목적론적이다. 두 가지 모두 타당하고, 한쪽에서 아무리 많은 문맥을 동원하더라도 다른 한쪽이 부적격 판정을 받는 일은 없다. - 테드 창, 「네 인생의 이야기」 中

 그리고 주인공이 이 상이함을 인식하고 그 간극을 뛰어넘어 다른 인식 체계에 이르렀음을 선언하는 순간, 지금까지 완전히 분리된 것처럼 보였던 어머니와 딸의 이야기는 인류와 외계인의 이야기에 철썩 달라 붙으며, 동시에 완전히 다른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독자의 정신을 흔들어 놓는다. 그렇게 하여 과학적 엄밀함과 인간 냄새 물씬 풍기는 극적 감동 모두를 휘어잡으니 어찌 감동하지 않을 수 있을까.

 특히 주목할 것은 테드 창이 과학적으로 접근하는 대상이 순수 자연과학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미 「네 인생의 이야기」나 「0으로 나누면」에서 드러나듯 그의 시선은 언어학이며 수학을 종횡무진 넘나드는가 하면 「이해」에서처럼 주인공의 인식 범위를 무지막지하게 넓혀가며 우주의 전체 체계를 하나의 미학적으로 완성된 예술로 바라보는 - 사실상 인간을 신의 반열에 올려놓는다고나 할까 - 폭거를 감행하기도 한다. 심지어 「지옥은 신의 부재」에서 신의 사랑마저도 무소불위의 법칙으로 간주하며 그에 대한 인간의 반응을 과학적으로 따져가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그야말로 이 테드 창이라는 작자가 자신의 과학적 접근법과 상상력을 세상에 들이대는 데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는, 갈 데까지 가는 인간이라는 것이 명명백백히 느껴진다.

 그런가하면 그 방법론을 표현해내는 실력에 있어서는 '군더더기 하나 없다'라는 표현이 그렇게 어울릴 수가 없다. 장편으로 길게 늘어놓아야 될법한 아이디어를 정밀하게 압축해서 중 · 단편으로 내놓은 결과물을 보자면 그 밀도는 기가 막힐 지경. 사실 그 밀도 때문에 독해 자체가 다소 난해해지는 경향도 있기는 하지만 그 몇 십 페이지의 이야기가 담고 있는 세계를 일단 펼쳐낸 다음에는 오로지 벅찬 감격만 있을 뿐이었다. 아아, 살아있길 정말 잘했어. 앞의 몇 편을 읽었을 때는 '재미는 있는데 아무래도 장르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에게 추천하기는 무리가 아닐까'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천해야 한다'로 마음을 돌렸다. "누구나 쉽게 잡아들어지지 않는 분야의 책이 있거니와, SF도 장벽이 높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것, 그러나 이 책은 그렇게 놓치기엔 너무 안타깝다고 생각한다."라는 알라딘 김명남 편집장의 말이 이만큼 절절하게 와 닿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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