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혹
크리스토퍼 프리스트 지음, 김상훈 옮김 / 열린책들 / 2006년 8월
평점 :
절판


 남자의 이름은 리처드 그레이. 그는 해안가의 요양소에 있다. 전직 스튜디오 촬영기사인 그는 어느 날 런던에서 벌어진 폭탄 테러에 휘말려 중상을 입고 수술을 받은 뒤 회복 중이다. 사고의 충격 탓에 사고 직전 몇 주 동안의 기억을 상실한 상태. 그러던 어느 날, 리처드의 앞에 수잔 큘리라는 여자가 등장한다. 그녀는 자신이 리처드가 기억하지 못하는 몇 주 동안 사귀었던 애인이라고 말하며, 그 말에 거짓은 없어 보인다. 리처드는 수와의 대화를 통해 과거 자신과 수가 수의 옛 애인 나이얼이 얽힌 문제 때문에 소원해진 상태로 헤어졌음을 알게 되지만, 그가 당시의 기억을 잃은 지금 두 사람은 다시금 서로에게 매력을 느낀다. 결국 둘의 관계는 점차 돈독해져 가지만, 리처드의 잃어버린 기억들이 다시 돌아오면서 나이얼의 존재 또한 서서히 둘의 관계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다…….

 아니, 로저 젤라즈니를 비롯한 남성적 액션 SF/팬터지, 혹은 머리가 빠개지는 과학적 사고의 전개로 출간 때마다 SF 팬덤을 요동케 했던 하드 SF들을 꾸준히 번역해왔던 장르 문학계의 믿음직한 번역자 김상훈이 오랜만에 "경계소설"이랍시고 번역한 작품의 실체가 삼각관계와 기억상실증이 교차하는, 공중파 미니시리즈스러운 트렌디 로맨스에 불과했단 말인가!

 「내가 말을 다 할 때까지 기다려 주십시오. 난 당신을 기억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마치 당신을 알고 있다는 듯한 느낌이 드는군요. 솔직히 말해서 내가 정말로 당신을 알기 때문에 그런 건지, 아니면 내가 그렇게 생각하고 싶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게 뭐든 간에 내가 이곳에 온 이래 처음으로 느끼는 진짜 감정이라는 점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영국 작가 크리스토퍼 프리스트의 일곱 번째 장편 [매혹]에는 이와 같은 개탄을 방지하는 요소가 최소한 둘은 있다. ① 워낙 보기에 인상적이어서 용서가 된다. (심지어 지금까지 나온 몇 안 되는 [매혹] 감상문 중 가장 큰 혹평에도 '그래도 아름다운 풍경 묘사는 좋았다' 같은 말은 있었다) ② 리처드의 기억이 돌아온 뒤에도 그는 부잣집 도련님이나 수의 오빠/남동생이 아니며, 출생의 비밀도 밝혀지지 않는다.

 물론 이것은 반쯤은 농담에 불과하지만, 어쨌든 [매혹]의 특성에 관한 이야기다. 즉, ② 이 작품에서 기억은 기억하거나/말거나의 양면으로 나뉜 극적 도구로서의 기능("앗, 모르고 이랬는데 알고 보니 저 따위야! 어떻게 해!")을 하기보다는, 인간의 불확실한/깔끔하게 편집되지 않은 기억 자체를 강조하듯 매끄러운 전개 속에 군데군데 균열을 만들어 놓은 뒤, 그 빈자리를 어떻게든 흡족하게 메우려드는 등장인물과 독자의 시도를 계속 좌절시키는 소재이자 주제 자체로 활약한다. 다시 말해서, 여기서는 어느 순간부터 잃어버린 기억의 진실보다는 그 잃어버린 기억을 무마하려는 태도/과정 자체가 중요해진다.

 「기억이 모두 뒤죽박죽이야. 이사한 날 생각이 나는군. 밴 안쪽에 융단을 실어 놓았기 때문에 가져다 놓은 가구를 다시 치워야 했어. 또 나중에 당신이 거기 있었을 때의 기억도 나지만, 같은 장소라는 느낌이 들지 않아. 당시 모습들을 동시에 머리에 떠올릴 수 있거든. 겹친 상태로 말이야. 무슨 말인지 알겠어?」

 ① 그리고 그 과정은 있는 그대로를 세밀하게 옮겨내고자 하는 기나긴 묘사가 아니라, 순간순간을 지배하는 시각적 인상을 간결하게 잡아채는 주관적 시선을 통해 이루어진다. 계속해서 시점이 변화하며 전개되는 이야기 속에서 이 '시선'이란 등장인물의 시선이자 독자의 시선이기도 한데, 바로 이 시선을 통해 전달되는 정보가 기억의 뒤틀림 속에서 자꾸 어긋나고 충돌한다. 결국 기억상실 속에서 삼각관계를 추적하는 [매혹] 속의 이야기는 개개의 등장인물과 독자가 봤고 기억하는 것, 봤다고 기억하는 것, 보지 못했으나 짐작하여 기억하는 것, 봤으나 기억하지 못하는 것 사이의 관계를 두 인물(혹은 세 인물)이 끊임없이 의심하거나 정당화하려는 일종의 대결구도를 갖춘 스릴러이기도 하다.

 「자, 또 모르는 사람들의 모임에 갔다고 생각해 봐. 남자 열 명에 여자 한 명이 참석하고 있어. 당신이 방에 들어간 순간 아름답고 관능적인 그 여자는 춤을 추며 옷을 벗기 시작했어. 그녀가 옷을 벗어 던지자마자 당신은 그 방을 떠나. 그런 다음 그곳에 있던 남자들을 당신은 몇 명까지 묘사할 수 있을 것 같아? 아홉 명이 아니라 열 명 있었던 것이 확실한지, 또 있는지도 몰랐던 어떤 사람이 없었다고 단언할 수 있어?」

 삼각관계의 긴장이 세 사람이 한데 모인 자리에서 직설적으로 박 터지게 싸우는 과정보다는 세 사람이 2:1로 갈렸을 때 벌어지는 '눈치' 신경전에 의해 빚어짐을 생각해 보면, 이처럼 시선과 기억이 어쩌고 하는 추상적인 주제가 사실은 그 외피에 딱 들어맞음을 알 수 있다. 리처드-수-나이얼의 관계에서 나오는 세 쌍의 인물들(리처드-수 / 리처드-나이얼 / 수-나이얼)은 각각 작중에서 끊임없이 비교 · 대조되면서 서로를 제거하거나 차지하고 싶어 하는데, 그 알력은 물리적 힘이 아니라 그들이 서로를 보거나 보지 못하는 '인식의 차이' 속에서 발생한다. 그렇기에 삼각관계 로맨스라는 [매혹]의 외피는 보다 심각한 주제로 독자를 안내하기 위해 서두에서만 제시될 뿐인 당의/미끼/핑계라기보다는, 작품 전체에서 추상적 논의를 직접적/시각적/매혹적으로 반영하고 있는 체계라고 할 수 있다. [매혹]의 진정한 매력은 그처럼 작품의 여러 가지 층위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어, 가볍게 따사로운 로맨스를 읽으려던 독자든 심각하게 인상 쓰며 텍스트 분석에 매달리고 싶은 독자든 결국 그 모든 영역을 만끽하며 능동적으로 뛰어들게 하는 데에 있다.

 어긋나는 기억을 다루는 방식에 있어서도 이 작품은 매혹적이다. 다른 시각/기억 사이의 알력이라는 측면에서 이 작품을 보자면 (역자가 지적한 것처럼) 홍상수 감독의 [오! 수정(2000)]을 연상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매혹]에서 중심에 두고 있는 것은 인물에 따라서 달라지는 기억의 모습들 자체라기보다는 그렇게 기억이 달라지는 이유, 혹은 다른 기억들에 대한 해석, 그리고 같은 기억을 다르게 이해하는 방식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여기서는 이 기억과 저 기억이 공유하는 지점과 달라지는 지점을 비교하면서 그 차이에서 흥미진진한 미스터리를 끌어낸다기보다는 (물론 중반까지는 그런 즐거움도 크지만) 그 차이를 직시하고 있는 인물/독자들이 차이를 해석하고 그 해석에 대해 반응하는 과정에 무게가 실려 있다. 그런 점에서 [매혹]은 일종의 SF로도 읽힐 수 있을 텐데, SF적인 소도구들을 구축하고 있는 실제적인 과학이 아니라 지극히 일상적인 삶의 풍경을 바라보는 방식으로서의 과학, 즉 대상에 접근하는 과학적 사고 자체를 다루고 있기에 '순수 문학'에 대한 '장르적 변용'을 보는 듯한 쾌감마저 느껴진다. (그렇기에 "프리스트가 경계 소설 기획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슬림스트림〉 개념의 중심축에 서 있는 작가"라는 역자의 말에는 십분 공감할 수밖에 없다)

 그레이는 자신이 영화관 안에서 그 영화를 보고 있는 동안 그의 실제 인생은 영화관 밖에서 진행되었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러나 그런 영화를 본 기억은 그가 실제 인생의 대용으로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었다.

 세계를 바라보는 태도 자체에 주목하는 작품인 만큼, 작가 크리스토퍼 프리스트는 이와 같은 주제를 중심 플롯과는 큰 상관이 없어 보이는 디테일한 지점에까지 심어두고 있다. 심지어 낭만적이기만 한 것처럼 보이는 남프랑스의 풍경 묘사조차도 다시 보면 예사로 읽히지 않을 지경. 작가는 언뜻 매끄러운 이야기를 펼쳐 나가고 있는 것 같은 태도를 취하면서도 중간 중간 '음? 이 부분 약간 이상하지 않나요? 하긴, 이러저러하게 설명될 수 있는 부분이니까 넘어가도 괜찮겠죠?' 같은 능글맞은 터치를 가하며, 그 때문에 (특히 이 작품을 다시 읽을 때) 독자는 (처음에는 지나쳤을 수 있는) 그 모든 부분을 의식하며 (오히려 처음보다 더) 적극적으로 글의 내용에 참여하게 된다. 리처드-수-나이얼이 그들의 차원에서 벌이고 있는 기억에 관한 알력이 독자와 책/작가 사이에서도 발생하는 셈이다. 그 과정에서 [매혹]의 전체 이야기는 허구의 등장인물 세 명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더 넓은 범위에서 그 이야기를 읽는 독자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함을 실감할 수 있게 된다.

 그제야 그레이는 스튜어 옆에 다른 사람이 서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젊은 여자였다. 그레이를 바라보던 그녀는 불안한 듯 우드브리지를 흘낏 보며 소개해 주기를 기다렸다. 여자를 지금까지 못 본 것은 그녀가 신문 기자와 함께 앉아 있었고, 일어섰을 때는 기자의 몸에 가려진 탓이리라.

 이런 치밀함은 특히 결말부에서 빛을 발한다. (역자 해설의 표현을 빌려) "본서가 읽는 이의 능동적 참여를 촉발하는 중층적 구조를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을 민감하게 받아들이지 못한 독자라면 경우에 따라 무책임하거나, 사기 같거나, 심지어 진부하게도 느껴질 수 있는 결말일 텐데, 그런 이들에게는 감히 재독을 권하고 싶다. (그럼 처음부터 결말을 흥미진진하게 읽은 독자는 재독할 필요가 없단 거? 설마. 그런 독자라면 누가 권하지 않아도 당연히 재독하게 될 거라고 생각한다) 감춰져 있던 미스터리 혹은 이 책이 유도하고 있는 방향을 한 번 본 다음 다시 읽는다면, 결말부에서 [매혹]이 지적하고 있는 바가 실은 첫 장부터 교묘하게 독자를 끌어들이고 있음을 반드시 실감할 수 있을 테니. 그렇게 처음부터 매번 다른 목소리로 술회되는 순간들을 기억해가며 그 기억들 사이의 울퉁불퉁한 어긋남과 맞서려 들 때, 나는 결국 [매혹]에 매혹 당했음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게 실은 이…

 여기까지.

 이 이야기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기억해 보려고 했다.



 덧 하나.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된 크리스토퍼 프리스트는 실로 흥미진진한 작품을 여러 편 써낸 거장급 작가인 모양이다. 역자 김상훈의 해설을 읽고 나면 언제나 그렇듯 줄거리만 살짝 소개된 다른 장편들을 직접 맛보고 싶어지는 가운데, 특히 휴고상 장편 부문 수상작의 자리를 두고 어슐러 K. 르 귄의 [빼앗긴 자들(The Dispossessed)]과 끝까지 맞장을 떴다는 세 번째 장편 [역전된 세계(The Inverted World)]와, 크리스토퍼 놀란이 연출하고 크리스천 베일, 휴 잭맨, 스칼렛 요한슨, 마이클 케인이 출연하는 영화로 제작 중인 아홉 번째 장편 [명성(The Prestige)]이 무척 궁금하다. 이 중 [명성]은 영화화에 힘입어 10월 중에 북앳(@)북스 출판사에서 출간을 준비 중이라고 한다. 다만 출판사 측에서는 그 작품을 스릴러로 밀려고 하는 모양인데, [매혹]을 읽어본 바로는 그렇게 단순하게 분류될 리가 없으니… 아무튼 모쪼록 좋은 번역(과 영화와 상관없는 디자인)으로 나와 주길 바랄 뿐이다. 설마 고마쓰 사쿄의 [일본침몰(日本沈沒)] 꼴이 나는 건 아니겠지. (← 영화 때문에 관심도 안 두고 계셨던 분들은 이번에 재간된 이 작품을 꼭 읽어보시라)


 덧 둘. 2001년에 [앰버 연대기-앰버의 아홉 왕자(The Chronicles of Amber Book1: Nine Princes in Amber)]를 만난 이후 지금까지 꾸준히 역자 김상훈의 열렬한 팬이었다. 아마 김상훈 이름을 달고 나온(강수백 이름도) 작품은 다 샀고, 다 읽어보지 않았나 싶은데… 그렇게 5년쯤 되고 나니 이제는 글에서 '상훈체'가 보여서 재미있다. 설명은 못하겠지만 "뉴스를 보내는 유일한 방법은 현상하지도 않은 필름을 가장 가까운 공항으로 직접 보내서 런던이나 뉴욕, 혹은 암스테르담 행 비행기에 싣는 것일 때조차 있었다."라든가 "일찍이 나는 이토록 깊은 고독을 경험한 적이 없었다." 혹은 "나 자신 그보다 나은 설명을 내놓을 수 없었기 때문에 적어도 그녀 이야기의 일부는 진실로 받아들였다." 같은 문장을 읽고 있노라면 이 사람 밖에 쓰지 않을 문장 구조와 번역어로 이뤄져있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자신"이라는 어휘는 굉장히 자주 등장한다. 어쩌면 역자가 번역을 다듬는 과정에는 "자신"을 솎아내는 과정도 있지 않을까?) 실제 작가의 문체와 번역가의 문체 사이의 결락에 대해서 고민하고자 하는 독자들이 있으리라는 것도 짐작 가능하지만 나 자신 그 차이를 지적할 능력이 없기에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았다.


 덧 셋. 따지고 보면 얼마 전에 출간되어 아직 읽은 사람도 많지 않고 감상문은 더더구나 없는 책에 관해 이야기하기 위해 내가 읽고 기억하는 것, 읽었다고 기억하는 것, 읽지 않았으나 짐작하여 기억하는 것, 읽었지만 기억하지 못하는 것 사이를 교묘히 오간 이 감상문을 작성한 나의 태도는 [매혹]적인 현실 인식의 한 버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이 시점에서 내 머리의 일단(一段)을 사로잡는 것은 "낚시"라는 어휘이지만, 나 자신 새로운 인식적 충격을 던지는 소설에 목말랐던 때를 돌이켜보면 낚시야말로 이상적이고 필수불가결한 감상문의 모습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조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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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9-25 00: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onebe 2006-11-18 15: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상훈씨의 해설보다 도리어 명쾌한 해제 라고 느꼈습니다 ^^
어떤 의미에서 재독해야지만 즉 되새겨봐야지만 비로소 그 재미가 발생하는 이야기라는 생각입니다.
근데 대다수 읽으시는 분들은 구태여 두번씩이나 읽지 않으시니 아쉽게도
이 책의 진가를 느끼시지 못하는 사태가...
곱씹어볼 구석이 충분한데 아쉽지요.
읽고 나서 흥미로웠던 건 이본이 5가지나 존재한다는 사실.
왠지 의미심장하지요.

가넷 2006-12-28 2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첫번째받은 인상이 흥미롭지 못하면(?) 다시 살펴보지는 않아서... 다시 한번 읽어 볼까 싶네요.

pjy 2009-05-03 1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멋진 리뷰를 쓰시는 분이 감탄하는 책이라...궁금해지네요~
 
죄와 벌 - 상 - 도스또예프스끼 전집 도스토예프스키 전집
도스또예프스끼 지음, 홍대화 옮김 / 열린책들 / 2002년 1월
평점 :
절판


 한 사람의 심리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죄와 벌]의 주인공 라스꼴리니꼬프의 성격, 심리 변화를 간추려서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혹은 그런 짓을 해서는 안 된다) 번역판으로 8백여 페이지에 이르는 이 소설 전부가 사실상 라스꼴리니꼬프의 심리에 대한 해부도이며, 라스꼴리니꼬프가 만나는 거의 모든 등장인물들이 사실 그의 일부분이다. 사실 [죄와 벌]은 라스꼴리니꼬프의 모노드라마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장광설'로 이야기되곤 하는(물론 빚에 허덕이던 도스또예프스끼가 원고료를 많이 받아먹기 위해 열심히 분량을 늘린 결과라는 말도 있고, 아마 어느 정도는 사실일 것이다. 그런 이야기는 도스또예프스끼의 아내인 안나 그리고리예브나 도스또예프스까야의 책을 보면 나와있지 않을까 싶은데, 아직 안 읽었다) 도스또예프스끼의 치열한 인물 탐구는 각각의 인물들이 처한 외부 환경을 넘어서 그들의 심리 상태까지를 담아냄으로써 그들을 라스꼴리니꼬프와 견주기 위한 수단으로 보인다.

 그리고 물론, 그 인물들은 서로 비슷비슷한 상황과 성격을 지니지 않았다. 즉, 라스꼴리니꼬프의 성격은 어느 하나로 규정될 수 없다. 라스꼴리니꼬프의 행위나 심리가 종종 그의 적대자인 뾰뜨르 뻬드로비치 루쥔이나 스비드리가일로프와 일치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건 흥미로운 일이다. 루쥔은 똑똑하지만 가난한 아내를 맞아들여 아내로 하여금 평생 자신을 경외하도록 하겠다는 생각을 가진 인물인데, 라스꼴리니꼬프는 그런 인물이 자신의 동생 두냐와 결혼하고자 한다는 사실을 참지 못한다. 그리고 (루쥔의 성품을 알 정도로 똑똑한) 두냐가 그런 인물과 결혼하는 데에 동의한 것은 오로지 가난해서 학업을 이어나가지 못하고 있는 대학생인 자신 때문이리라는 생각에 더욱 분노한다. 하지만 라스꼴리니꼬프 자신도 똑똑하지만 가난한 소냐 앞에서는 세상사는 이치에 통달한 것 마냥 일장연설을 늘어놓으며 잘난 척 하는 인물이며, 그가 노파를 살해한 이유 중 하나는 역시 자신의 가난 때문이었다. 두냐가 루쥔의 성품을 어느 정도 알면서도 그 안에서 자신의 입지를 세워나갈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갖고 자신을 희생하려 한 것은 라스꼴리니꼬프가 인간을 비범한 사람과 평범한 사람으로 나누어 비범한 사람은 자신의 이상을 위해 평범한 사람을 희생할 권리가 있다는 이론을 내세우며 노파를 죽이는 것과 유사해 보인다. 즉, 그는 루쥔이자 두냐다.

 그런가하면 스비드리가일로프는 파렴치한 욕정의 화신이지만 자신의 파렴치함을 잘 알고 드러내는 인물인데, 자기 주변의 인물들을 파멸시켜가며 자신의 욕망을 채우던 그가 스스로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 인물이라고 규정한 두냐와의 만남에 이르러 흔들리고 구원/파멸을 향해 치닫는다는 것, 그리고 그런 동시에 소냐에게 자선을 베푼다는 것은 라스꼴리니꼬프를 연상시킨다. 한편 두냐와 소냐는 자기를 희생하여 가망 없는 가족을 부양하려는 인물로서 서로 동일시되는 인물이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라스꼴리니꼬프≒루쥔≒스비드리가일로프를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면서 그들을 변화시키고자 노력한다는 점에서 그들의 위에 서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결말부에서 소냐가 쓴 편지에 대해 두냐와 라주미힌은 그 편지가 일체의 사적인 해석 없이 사실만을 전달함으로써 오히려 라스꼴리니꼬프의 실제를 명확히 전달하고 있다고 하는데, 이것이 며칠이고 방 안에 틀어박혀 공상하며 만들어낸 자신만의 사상에 따라 살아가고, 타인의 행동 하나하나를 집요하게 파고들어 매번 의미를 부여해내는 라스꼴리니꼬프의 방법론과 완전히 반대되는 것임을 생각해보면 소냐(와 두냐)는 라스꼴리니꼬프의 대척점에 서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이처럼 자신이 적대하는 인물과 동일시되기도 하고 자신이 사랑하는 인물들과 대치되기도 하는 라스꼴리니꼬프의 심리가 하나로 규정될 수 없음은 당연한 일. [죄와 벌]은 노파의 살해, 즉 라스꼴리니꼬프가 스스로 만들어낸 사상을 실천으로 옮김으로써 한 극단에 이른 이후 그가 주변 사람들에게서 자신의 양면성을 발견하고 그 사이에서 방황하며 답을 구하는 내용이다. 우연처럼 등장과 퇴장을 반복하는 인물들은 계속해서 라스꼴리니꼬프의 심리를 파장으로 엮어가면서 그를 조금씩 옭아맨다. 재밌게도 읽는 도중 때때로 미국 현대 스릴러 소설들─퍼트리샤 콘웰의 케이 스카페타 시리즈 같은─이 떠올랐던 이유가 아마 그 파장의 느낌 때문이 아닐까 싶다.

 라스꼴리니꼬프를 에워싸는 압박이 다소 느슨해졌을 때 느끼는 안도감은 곧이어 또 다른 압박이 시작될 것임을 전제로 하고 있는데, 그 지점에서 독자로서 갖게 되는 심정은 스릴러 소설의 주인공들이 잠시 조연들과 짧은 휴식(쇼핑, 식사, 섹스, 대화, 기타 등등)을 가질 때 느껴지는 것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굳이 스릴러 소설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주인공을 둘러싼 긴장의 강약과 리듬을 조절하는 능력이야말로 이야기꾼으로서의 역량을 판가름하는 중요한 요소가 아닌가 싶은데, 비록 한 땀 한 땀 호흡이 길긴 하지만 도스또예프스끼도 그런 역량은 충분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영화를 볼 때 매 컷의 길이가 짧아서 빠르게 느껴지는 영화도 있고 매 컷의 길이는 긴데 컷과 컷이 연결될 때 그 전개 속도가 빨라서 빠르게 느껴지는 영화도 있는데 비유하자면 도스또예프스끼는 후자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이 전개에 힘을 더해주는 것은 물론 [죄와 벌]이 가지고 있는 추리소설로서의 기능이다. (그런 의미에서 스릴러 소설처럼 얘기했던 것도 썩 잘 어울린다) 굳이 분류하자면 도서추리(도치형 서술 추리inverted mystery : 누가 어떻게 범행을 저질렀나를 밝히는 고전 퍼즐 미스터리에서 벗어나 범인의 정체와 범행 방식 대신 범행 과정의 심리에 관심을 기울이는 형태의 미스터리)에 속할 이 작품은 살인 과정과 이후의 수사 과정을 대부분 범인 라스꼴리니꼬프의 시선 속에서 풀어내면서 심리적인 서스펜스를 만들어낸다. 특히 정체불명의 사나이가 갑자기 다가와 라스꼴리니꼬프를 살인자라고 부르는 장면, 그리고 라스꼴리니꼬프를 앞에 둔 예심판사 뽀르피리 뻬뜨로비치가 천연덕스럽게 범죄자의 심리에 대해서 논하는 장면에서의 긴장감은 최상급이다.

 또 도스또예프스끼는 라스꼴리니꼬프에게 집중되어 있던 시선을 잠시 돌려서 라스꼴리니꼬프가 죄를 고백하는 장면을 엿듣는 다른 인물을 보여줌으로써 긴장을 더하기도 하는데, 물론 이것은 히치콕식 맥거핀이 아니라 "반드시 사용되는 벽난로 위의 총"으로, 후반부에 이어질 또 한 차례의 설전(혹은 장광설)에 당위성을 부여해주는 복선으로서의 기능도 충실히 하고 있다. 그런가하면 정보의 공개가 지연됨으로써 앞부분에 일어났던 사건에 새로운 의미가 더해지기도 한다. 예를 들어 초반에 라스꼴리니꼬프가 노파를 죽이는 장면까지만 읽었을 때는 불명확하던 살인 동기는 그가 예심 판사 뽀르피리 뻬뜨로비치와 대화를 나누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라스꼴리니꼬프의 과거에 의해 보다 구체화된다.

 이 마지막 전개 방식이야말로 [죄와 벌]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인물들의 생각이 점점 복잡해지면서 급기야 '돈이 궁한 대학생의 고리대금업자 노파 살해'가 법과 도덕, 신에 대한 논쟁으로까지 번져가기 때문이다. 그럼으로써 라스꼴리니꼬프의 갈등은 범죄와 처벌의 영역이 아니라 죄악과 징벌의 영역으로까지 나간다. (그래서 crime이라는 어휘를 사용한 영문 제목은 어쩐지 아쉽다. 물론 러시아어의 prestuplenie와 nakazanie가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스케일 면에서는 문학사상 가장 대담한 추리소설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한 가지 의아한 점은, 이 거창한 갈등의 마무리다. 예상과는 달리 라스꼴리니꼬프의 갈등은 6장에서 끝난다고 하기 힘들며, 사실상 에필로그에서 마무리된다. 그런데 그 전까지의 전개가 라스꼴리니꼬프의 거울상인 인물들이 등장하여 그와 대화하면서, 즉 라스꼴리니꼬프가 자기 자신을 탐구하고 자신과 대화하면서 이뤄지고 있었다면 이 마무리는 신적인 장치, 꿈을 통해서 이뤄진다. 꿈이 무의식의 발현인 만큼 필시 앞의 전개 과정에서 이미 이런 결말을 암시하는 지점들이 있었으리라고 한다면, 사실 이 작품을 통째로 오도독오도독 씹어 먹었다고 할 수는 없으니 '아, 그런가요. 다시 읽어봐야겠네요.'하고 넘어가야겠지만…

 …그래도 이야기를 읽어나가는 독자의 마음에 깃드는 분위기의 흐름상 이 결말은 좀 갑작스럽다. 논할 거 다 논하면서 결국 '아, 제길, 나는 안 되는 녀석이야.'로 끝났는데 '아, 내가 잘못 생각했나.'하면서 분위기 전환이라니. 이 부분에서 도스또예프스끼의 서술 방식이 워낙 잔잔하게 심금을 울리는 구석이 있어서 대놓고 비판하기가 쉽진 않지만 그래도 결국 이건 고전기 할리우드 장르 영화의 관습적인 결말을 연상케 할 만큼 갑작스러운 끝맺음으로 느껴진다. 연재 중이던 잡지에서 페이지를 더 못 주겠다고 했을까? 혹은 그 부분은 그야말로 신의 영역인가? 아니면 라스꼴리니꼬프의 이론은 그만큼 일고의 가치도 없는 허황된 것이라 더 이상 따박따박 논하지 않고 결말로 나가도 될 거라고 생각했을까? 물론 8백여 페이지 동안 고생하는 꼴이 너무 안쓰러워서 조 홀드먼의 [영원한 전쟁(Forever War)] 결말처럼 '이렇게 끝내줘서 다행이야'하는 생각이 들긴 한다. 그래도 의문이 남는 건 어쩔 수 없지. '이렇게 끝나면 안 되는데 대체 왜 이 꼴이야!'가 아니라 '응? 왜 이랬지?' 정도의 의문이.

 뭐, 상관없다. 고전기 할리우드 장르 영화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이지만 [죄와 벌]은 하워드 혹스의 [연인 프라이데이(His Girl Friday, 1940)]나 [깊은 잠(The Big Sleep, 1946)]처럼 과정이 더 중요한 작품이 아니겠는가. [죄와 벌]은 장광설이 가득하다고 불만을 터뜨릴 게 아니라 장광설을 즐겨주는 데에 의미가 있는 거고, 죄를 밝히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어쩌다 그런 선택을 해야 하는 지경까지 가게 됐는가를 보는 데에 묘미가 있는 소설이다. 그 치열함에 뇌를 가득 담그는 것만으로도 멋진 경험이고.



 덧 하나. 간만에 [죄와 벌]을 다시 읽은 데에는 로베르 브레송의 [소매치기(Pickpocket, 1959)]가 보고 싶은 탓도 있고, 열린책들에서 [죄와 벌]과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Brat'ia Karamazoby)]을 제외한 도스또예프스끼 전집의 나머지 작품들을 절판시킨다기에 위협을 느끼고 하나씩 읽어치우며 사야겠다는 생각이 든 탓도 있고, 박찬욱이 자꾸 이야기를 해서인 탓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세르게이 루키야넨코의 [나이트 워치(Nochnoy dozor)]를 재독하다가 답 안 나오는 문제로 끝까지 고민하는 소설이 읽고 싶어진 탓이 가장 크다. 그러고 보면 나는 첫 번째에나 두 번째에나 [나이트 워치]의 결말부도 이해를 못했다. 답이 없는 것 같은 이야기가 답이 있는 것처럼 끝났기 때문인 걸까?


 덧 둘. 러시아 문학이니까 원어 표기를 할 때 러시아 문자로 해야 하는 게 아닐까 하다가 훗날 아랍 문학에 심취하게 되면 골치 아파지겠다 싶어서 일단은 그냥 알파벳으로 표기하기로 했다. 이 블로그를 방문하실 지도 모를 러시아 분들께 미안함을 표하는 바입니다.


 덧 셋. 올해 읽은 책들 중 가장 오랫동안 읽은 책인데, 책 읽은 시간만큼 책 표지 바라본 시간도 길었다. 그러다보니 생긴 망상 하나. 열린책들에서 나온 신판 [죄와 벌]의 표지에는 라스꼴리니꼬프(로 추정되는 이)가 서 있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이 인물은 겉옷 아래에 녹색 바탕에 붉은 문양이 들어간 웃옷을 입고 있다. 그런데 이 붉은 문양의 윗부분, 어쩐지 DC로 보이지 않는지. 그러다보니 자연히 그 아래쪽에 지워진 것 같은 문양은 수퍼맨의 S 문양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더랬다. 라스꼴리니꼬프의 기묘한 사상에도 맞아 떨어지고, 또 결말부가 라스꼴리니꼬프의 새로운 탄생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걸 생각해 보면… 이것은 결국 [스몰빌(Smallvil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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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설이다 밀리언셀러 클럽 18
리처드 매드슨 지음, 조영학 옮김 / 황금가지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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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통 영화 이야기를 할 때 하는 말이지만, 내용과 형식은 둘이 아니라 하나다. '어떻게'는 '무엇을'만큼 중요하고, 둘은 떼어놓을 수 없다.


 장르 문학에 대해서 생각할 때, 나는 곧잘 그 분량의 문제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된다.  정말이지 작품의 분량은 많은 것을 결정한다. 예를 들어, 피터 잭슨의 [반지의 제왕] 3부작은 그 길이가 아니면 제대로 이야기가 되지 않는다. 그 내용을 두 시간 안에 다 넣으려 한다면 잘해봐야 'MTV 스타일(컷! 컷! 컷! 컷! 컷!)' 뮤직비디오나 되고 말 텐데, 그런 길이와 속도감에서는 [반지의 제왕]이 지금 가지고 있는 장중한 감흥이 사라지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또 다른 예로, 혹자는 로저 젤라즈니의 『내 이름은 콘래드』를 두고 [앰버 연대기]에 비해 통 하는 일 없이 작게 끝나버리는 이야기라고 투덜거리곤 하지만, 거꾸로 생각해보면 [내 이름은 콘래드]의 '소박한 여행'은 바로 그 중 · 장편에 해당하는 길이가 아니면 존재할 수 없다. 불사신 콘래드의 외계인 안내담을 다섯 권짜리 장편 소설로 써내면 분명히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돼야 할 것이다(아니면 다섯 권 내내 '쟤는 왜 지구에 왔을까? 나는 쟤를 보호해줘야 하나?'라며 고민만하는 주인공을 보여주든가. 끔찍하다).


 그런데 곧잘 한두 권으로 끝나곤 하는 외국의 작품들에 비해 우리나라의 작품들―창작 부문이 가장 활성화 돼 있는 팬터지와 무협의 경우를 떠올려보면 될 텐데―은 네댓 권을 쉽게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 듣기로는 그것이 대여점 수요에 판매량의 대부분을 의존하는 기형적인 시장 존립 형태 때문에 발생한 현상이라는데, 이유야 어쨌거나 지금 이 글을 통해 이야기할 문제는 아니고, 다만 결국 그 분량의 문제가 내용의 측면에 이르기까지 큰 아쉬움을 던져주는 경우가 많기에 아쉽다는 말을 하고플 뿐이다. 우리네 팬터지 시장에 암묵적으로(혹은 명시적으로. 나는 작가가 아니라서 모르겠다) 존재하는 그 분량의 문제는 작가와 독자 모두에게 많은 이야깃거리를 포기하도록 하고 있다.


 최근에 출간된 리처드 매드슨의 작품집 [나는 전설이다]에 눈길이 가는 것은, 열한 편의 작품으로 이뤄진 이 한 권의 책이 지금 우리가 창작 팬터지 시장에서 잃어버린 미덕이 어떤 것인지를 명백히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하려고 하는 이야기를 정확히 알고 있으며, 그 이야기의 중심을 밀고 나간 뒤 끝맺어야 할 지점이 어디인지 또한 정확히 알고 있다. 즉, 리처드 매드슨은 이야기를 그만두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작가이다. 그렇기에 그의 이야기는 오히려 제약 없이 풍성해질 수 있고.


 표제작이자 작가의 대표작인 「나는 전설이다」는 정체불명의 이유로 인간들이 죽어나가고 흡혈귀들만 남은 지구에서 마지막 생존자 로버트 네빌이 벌이는 생존 투쟁을 담아낸 작품이다. 총 네 부분으로 구성된 이 작품에서 작가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이 매혹적인 소재가 가진 여러 가지 측면을 탐구한다. 이야기의 중심을 이루는 것은 당연히 두 존재, 로버트 네빌과 흡혈귀들이며, 전개 역시 두 존재를 축으로 이뤄진다. 작가는 로버트 네빌을 통해 흡혈귀가 실존할 수 있다면 그것은 어떤 방식으로 가능한 것일까, 라는 흥미로운 허구적 가정을 전개해 나가면서, 동시에 적대적인 환경 속에서 한정된 거주지를 가지고 혼자 살아나가는 사람의 마음속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를 이야기한다. 이 '과학적 탐구'와 '심리적 공포'는 일견 어울릴 것 같지 않지만, 이 두 축 사이에 배치된 로버트 네빌의 과거 경험, 즉 독자들이 알고 있는 실제의 삶은 두 가지 축을 밀접하게 연결시키며 읽는 이의 몰입을 더해간다. 작품 초반에는 난데없이 황량한 세상에 내던져진 것 같던 로버트 네빌을 보여주다가 그가 투쟁을 하면서 정신적인 벼랑에 내몰릴 즈음에 아직 다른 사람들이 살아있던 과거의 이야기를 제시하고, 그 과거의 기억이 다시 현재의 투쟁에 힘을 부여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인상적인 것은 리처드 매드슨이 이런 이야기를 함에 있어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는 사실, 다시 말해 그가 자기 작품의 중심이 어디에 놓여있는지를 잘 알고 그 중심을 잃지 않은 채 내용을 재단해 나간다는 사실이다. 그는 이 작품에서 로버트 네빌이 겪게 되는 공포가 혼자 남았다는 공포, 그리고 그렇게 혼자서 무의미한 일상을 반복해야 한다는 공포임을 각인시켜 나가며, 흡혈귀에 대한 과학적 탐구 역시 그 공포와 맞물려 이뤄진다. 중요한 것은 그 모든 지점에 대한 탐구가 끝났을 때이다. 이제 자신이 어떤 존재와 대면하고 있는지 잘 알게 된, 그리고 그 속에서 사는 방법에 너무나 익숙해져 버린 인물이 남았는데, 여기서 이야기를 어떤 방향으로 전개하고 어떻게 끝맺어야 할 것인가? 작가는 여기서 온갖 안이한 결말들―흡혈귀와 싸워 마침내 그들을 멸종시키는 액션물이 되는 것, 혹은 그 일상적 공포에 짓눌려 자살하는 것 등, 이야기의 축 하나를 배제하는 방식으로 이뤄질 수 있는 수많은 결말들―을 피하여 이야기의 두 축을 한데 모으는 방식을 선택한다. 혼자 남은 자의 공포를 뼈저리게 알고 있으며, 심지어 그런 공포에 익숙해져 버린 사람의 앞에 자신과 똑같은 인간처럼 보이는 존재가 등장했을 때, 흡혈귀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그는 자신의 의심을 어떤 방식으로 다뤄나갈 것인가? 이후의 내용을 모두 말하는 것은 가혹할 테니 간단한 얼개만 이야기하자면, 작가는 이 새로워 보이지만 사실은 예정된 질문에 대한 탐구를 계속해 나가고, 결과 역시 새로운 요소의 힘을 빌리는 대신 이미 로버트 네빌이 알고 독자가 아는 사실 속에서 찾아낸다. 그리고 바로 거기서 망설임 없이 이야기를 끝내 버린다. 실로 자신이 떠올린 아이디어를 골수까지 빼먹고 버리는 흡혈귀 같은 작가라고 아니 할 수 없다.


 「나는 전설이다」는 결코 예기치 못한 극단적인 전개로 독자를 잡아끄는 작품이 아니다. 오히려 이 작품은 예정된 결말로 치닫는 듯한 인상을 준다. 비록 뒷내용을 쉽게 예상할 수는 없지만, 다음 페이지를 넘겼을 때 발견하게 되는 내용이 지극히 합리적인 것으로 보인다는 이야기다. 결국 「나는 전설이다」의 힘은 하나의 아이디어에 다른 자잘한 곁가지를 붙여 내용을 풍성하게 해나가는 데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아이디어가 내포하고 있는 가능성을 간결하고 치밀하게 잡아내는 데에서 나온다. 그리고 리처드 매드슨은 정말 그걸 잘 한다. 214페이지의 분량 속에 군더더기라 할만한 부분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데에 뭐가 얼마나 필요한지 잘 알고 있는 작가의 작품이다.


 같은 책에 수록된 열 편의 단편에 대해서는 말을 아끼고자 한다. 확언할 수 있는 것은 이 단편들에서 모두 「나는 전설이다」에서 리처드 매드슨이 보여줬던 단호한 아이디어 전개 솜씨가 빛을 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는 한 눈 파는 일 없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아이디어가 제공할 수 있는 공포가 어떤 것인지를 잡아낸 뒤 그 요소만으로 이야기를 전개하고 끝맺는다. 덕분에 이 단편들의 밀도나 만족감 또한 최근에 소개된 이런저런 장르 문학 단편들 중에서도 단연 발군이라 할 만 하다.


 가격 대 성능비, 혹은 분량 대 밀도의 문제에 있어서 최상급이라고 할만한 [나는 전설이다]를 읽은 뒤 남는 의문은 오직 하나, 리처드 매드슨이 과연 긴 글을 다루는 데에도 이만한 재주를 가지고 있는 것인가 하는 문제인데, 그의 다른 작품들이 소개되기를 바라보는 수밖에 없을 듯 하다. 하지만 그가 장편은 별로 쓰지 않는 작가라고 한들 아쉬울 것은 없을 듯 하다. 자신의 이야기에 휘둘리고 늘어지는 게 문제이지 자신의 아이디어가 가진 힘 안에서 짜임새 있게 작품을 조각하는 건 작가로서의 미덕에 해당하는 일일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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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리웃 문화혁명 - 어떻게 섹스-마약-로큰롤 세대가 헐리웃을 구했나
피터 비스킨드 지음, 박성학 옮김 / 시각과언어 / 200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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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기적이라고까지 말할 필요는 없겠지만, 60년대 말~70년대 중반까지 할리우드에 찾아왔던 "뉴 아메리칸 시네마"의 시기는 적어도 다시 찾아오기 힘들 굉장히 희귀한 시대였던 것만은 틀림없다. 스튜디오 시스템은 텔레비전의 보급과 기획-투자-제작-배급-상영 수직구조의 해체로 인해 갈팡질팡했고, 고전 할리우드 영화의 세례를 통해 꽃핀 프랑스의 누벨바그/작가주의 이론이 역수입 돼서 감독을 예술가로 인지하게 된 "영화광"들이 등장했으며, 50년대 냉전 속에 가라앉았던 사회 분위기도 베트남전과 68혁명을 통해 달아올랐다.

 그 상황에서 체제를 유지하며 안이한 영화들만 만들던 스튜디오는 도저히 대중들이 뭘 원하는지를 이해할 수 없었고, 1946년에 주당 7,820만 명이었던 관객 수가 1971년에는 주당 1,580만 명으로 떨어졌다. 결국 스튜디오는 스스로를 예술가라고 생각하는 일련의 작가 감독들에게 상당한 무게를 실어줄 수밖에 없었다. 스튜디오 중역들은 이해하지 못했지만, 아무튼 그 젊은이들이 만드는 영화는 관객들이 좋아하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그러니까, "뉴 아메리칸 시네마"는 예술과 자본이 거대한 규모(이게 중요하다. 작은 몇몇 사례에서 예술과 자본이 성공적으로 합작한 경우를 찾아보긴 어렵지 않겠지만 10여년에 걸쳐 문화현상으로 일어난 건 극히 드물 테니)로 합작을 해냈던 시기다. 그리고 그 결과는 그야말로 어마어마해서, 이 시기에 쏟아진 미국 영화사에서 가장 논쟁적인 걸작들은 세기가 바뀐 지금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그 힘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물론 딱 보기에도 불가능해 보이는 이런 현상이 오래갈 수는 없어서, 70년대 말 이 흐름은 마지막 숨을 내뱉고 있었고, "레이건"이 상징이 될 무렵에는 이미 옛 이야기가 돼 버렸다.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가 씨를 뿌리고 스티븐 스필버그와 조지 루카스가 키워낸 대형 배급 체계는 스튜디오를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자본체계로 만들었고, 그 스튜디오가 아직도 할리우드와 전 세계를 장악하고 있으며, 그 흐름이 바뀔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 배우였던 로널드 레이건의 처음이자 마지막 악역이 돈 시겔의 〈킬러(The Killers, 1964)〉에 나오는 CEO형 악당이었다는 사실은 참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바로 이 꿈결 같던(물론 꿈이라기보다는 LCD 환각에 가까웠다고 하는 편이 사실에 더 가깝기야하겠지만) 순간을 다룬 책 중에 우리나라에 소개된 책으로는 로빈 우드가 쓴 『베트남에서 레이건까지(Hollywood from Vietnam to Reagan)』와 피터 비스킨드의 『헐리웃 문화혁명 : 어떻게 섹스-마약-로큰롤 세대가 헐리웃을 구했나』(이하 『헐리웃 문화혁명』)가 있다. 전자는 뉴 아메리칸 시네마 시기의 영화들에 대한 성 정치학적 접근을 시도하는 책이며 후자는 이 시기의 영화산업에 발을 담그고 있던 제작자, 각본가, 편집자, 감독 등이 살아간 모습을 그려내는 풍속화에 가까운 책이다. 영화 자체에 대한 통찰을 보고 싶다면 전자가 좋은 선택이다. 성 정치학이라는 어휘가 전달해줄 버거운 무게와는 달리 로빈 우드의 서술은 필요 이상으로 어렵지 않으며(지식이 부족한 독자─바로 나 같은─도 꼼꼼히 읽으면 충분히 그의 논의가 어떤 것인지 이해할 수 있을 정도의 난이도), 그런 서술을 바탕으로 무시당했던 영화들, 특히 공포 영화들의 지위를 복권시키고자 하는 시도를 보는 것은 무척 흥분되는 경험이다. 그러나 두 가지 안타까운 점이 있다면 하나는 1986년에 나온 이 책은 2003년에 개정증보판이 나왔으나 우리나라에는 번역이 되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또 하나는 1986년판의 번역본조차 이미 (좋은 책들의 운명이 그렇듯) 절판되었다는 것이다.

 한편 피터 비스킨드의 책은 영화 자체에는 큰 관심이 없으며 그 영화들을 만드는데, 혹은 핍박하는데 한몫한 사람들의 모습을 담아내는 데에 주력한다. 수많은 인물들의 인터뷰로 이뤄진 이 책은 실로 적나라하기 짝이 없어서, 어떤 인물이 이 책에 등장했다면 그 자체로 이미 그가 꼴사나운 추태를 보인 인간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여도 좋을 정도다. (참고로 이 책에는 현대 미국 영화의 중요한 거장들이 엄청나게 등장한다) 게다가 저자는 책머리에서 "따라서 해괴하고 소름끼칠 만한 내용이 반복해서 소개될 것이지만 이 책이 표면을 살짝 긁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할 필요가 있다. 실체를 파악하기 힘든 '진실'은 이보다도 더욱 기이하다."라는 말을 하고 있으니, 가히 복마전의 대문과도 같은 책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다.

 그렇다고 『헐리웃 문화혁명』이 단지 재미 삼아 찌라시용 뒷담화를 엮어놓은 책은 아니다. 만약 이 책이 과격하게 느껴진다면 그건 그만큼 이 책이 뉴 아메리칸 시네마의 할리우드를 잘 담아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 생생함 속에서 저자는 (로빈 우드 정도로 공격적이고 노골적이지는 않지만) 이 광기의 시기에 대한 애정과, 더 이상 그런 애정을 보낼 수 없게 된 할리우드의 모습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하고 있다. 특히 이 책은 아서 펜 감독의 1967년 작 〈보니와 클라이드(Bonnie and Clyde)〉에서 마이클 치미노 감독의 1980년 작 〈천국의 문(Heaven's Gate)〉에 이르는 시기를 비교적 연대순으로 다뤄나가고 있기 때문에 갈수록 그런 안타까움과 연민은 짙어져 간다. 그리고 총 14장으로 구성된 이 책의 각 장에는 나름대로 주인공이라고 할 만한 인물들이 설정돼 있기 때문에─이를테면 9장 「1975년, 너드의 화려한 복수」는 스티븐 스필버그가 주인공이다─마치 소설 읽듯 주인공들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읽어나가며 이 시대의 불안함에 흠뻑 젖기도 쉬운 편이다.

 또 한 가지, 우리나라에만 특화된 사항. 『헐리웃 문화혁명』의 한국어판을 이야기할 때 절대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있다. 바로 번역. 박성학이라는 이름의 역자는 역서와 저서를 통해 미루어 볼 때 영어와 영화에 큰 관심을 가진 사람으로 보이는데, 이 책에서 모든 고유명사를 최대한 원음에 가깝게 표기하는 번역 원칙을 내세우고 있다. 그래서 스콜세지scorsese는 '스콜쎄지'고 아서 펜Arthur Penn은 '아써 펜'인데… 이 정도는 그래도 괜찮다. 하지만 시드니 폴락Sydney Pollack이 '씻니 폴락'이 되고 클린트 이스트우드Clint Eastwood가 '클린트 이스트웃'이 되면 살짝 낯설다. 돈 시겔Don Siegel은 '단 씨걸'이 되고 숀 펜Sean Penn은 '샨 펜'이 되며 제임스 캐그니James Cagney가 '제임스 캑니'가 될 즈음에는 아무래도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그래도 이 정도는 괜찮다. 영화 제목은 더 당혹스럽다. 어떤 영화는 제목의 의미를 번역하고 어떤 영화는 하지 않는다. 그래서 밥 라펠슨의 〈파이브 이지 피시스(Five Easy Pieces, 1970)〉는 〈다섯 가지 쉬운 곡〉이 된 반면 테렌스 멜릭의 〈황무지(Badlands, 1973)〉는 〈뱃랜즈〉가, 스탠리 큐브릭의 〈시계태엽 오렌지(A Clockwork Orange, 1971)〉은 〈클락웍오린지(오'렌'지도 아니다!)〉가 되고 말았다. 그나마 제목의 의미를 옮긴 것도 항상 좋은 것은 아니어서, 피터 보그다노비치(물론 이 책에서는 복다노비치다)의 〈페이퍼 문(Paper Moon, 1973)〉이 〈종이달〉이 되거나 세르지오 레오네의 〈석양의 무법자(Il Buono, Il Bruto, Il Cattivo, 1966)〉가 〈선인과 악당, 그리고 추물〉이 된 건 좀 심했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더 심한 건, 영어 단어의 의미를 충분히 담아낼 수 있는 번역어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일반 명사를 그대로 옮긴 경우도 있다는 거다. shlock이 '쉴락'으로, suite이 '수잇'으로, boulevard가 '불러바드'로 표기된 게 그와 같은 예다. 불러바드하니까 생각나는 건데, 일반 명사 번역은 아니지만, 개인적으로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문장은 다음과 같았다.

 70년대는 또한 (중략) 헐리웃을 가썸으로 변모시킨 시대이기도 했다.

 대체 가썸이 뭘까? 다행히 영어 표기가 병기되어있다. Gotham이다. 배트맨 시리즈의 무대가 되는 그 고담시 말이다. 문장 구조를 따지기 전에 역어 선택이 이런 식이다보니 아무래도 이 책을 읽는 게 그렇게 쉬운 일만은 아니다. (그리고 문장도 그렇게 좋은 편은 아니다)

 그리고 이 책을 읽는 일을 더 어렵게 하는 건, 보다 근본적인 문제인데, 이 책이 다루고 있는 범위, 혹은 이 책이 구성된 방식이다. 70년대 할리우드에서 날리던 사람들은 죄다 등장한 책이라서 등장인물의 수가 어마어마한데, 그나마도 서양인들 이름이 흔히 그렇듯 때에 따라 이름으로 표기되기도 하고 성으로 표기되기도 한다. 그리고 비록 각 장에 주인공들을 배치해두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 연대순 서술을 지향하다보니 마틴 스콜세지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로만 폴란스키 이야기를 넣는 등 다소 난삽한 구성을 보여주는데, 이 때문에 등장인물들의 이름을 주워 담기 힘든 경우가 빈번히 발생한다. 다행히 권말에 수록된 목차는 이 어려움을 어느 정도는 덜어주지만 6백 페이지가 넘는 책의 권말 목차를 자주 뒤적이는 것도 좋은 독서 방식이 되기는 힘들다. 아마 어느 정도는 주인공들 외의 인물들을 무시하고 읽어야 할 텐데, 그래도 워낙 이 사람 저 사람이 교차되어 등장하다보니 신경이 쓰이는 게 사실이다.

 이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헐리웃 문화혁명』은 읽어볼 만한 책이다. 뉴 아메리칸 시네마를 경외의 눈길로 쳐다보던 (나 같은) 사람에게는 보다 균형 잡힌 시선을 제공해 줄 것이고, 현대 할리우드의 팍팍한 스튜디오 시스템에 진절머리 내던 사람에게는 할리우드가 거의 유일하게 자유로웠던 시기의 즐거움을 제공해줄 것이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역자 박성학의 원어 살리기 번역 원칙이 한 가지 빛을 발하는데, 바로 욕설 번역이다. 이 책은 욕설 번역만큼은 타의추종을 불허한다. 물론 어느 정도 타협을 하는 곳도 있긴 하지만 그래도 전체적으로 "씨팔"은 일상어처럼 들릴 정도다. 자, 이 책에서 인용된 우리의 서부 영웅 존 웨인의 대사 한 토막 들어보시라.

 "그 발그레한 하퍼 새끼 어디 있나? 그 염병할 날파리 개백정 같은 새끼가 UCLA에 가서 내 가녀린 딸들 앞에서 '똥'과 '좆빨기'라구 씨부렁거렸어. 내 이 씹새끼를 도륙을 낼 모양이다. 이 빨갱이 새끼 어디 숨었냐?"

 읽어보면 알겠지만 단순히 욕설을 잘 번역한 것뿐만 아니라 이 시기의 미치광이들이 했음직한 어투를 상당히 잘 살렸다. 워렌 비티(물론 이 책에서는 '베이티'다)가 〈보니와 클라이드(물론 이 책에서는 '바니와 클라잇'이다)〉의 각본을 읽은 뒤 각본가들에게 출연하겠노라고 말하는 대목에서 "다 읽었소."가 아니라 "내 다 읽었시다."라고 번역하는 식으로. 책의 상당부분이 실제 대화를 인용하는 것으로 구성된 만큼 이런 번역은 뉴 아메리칸 시네마의 분위기를 전달하는 데 큰 몫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 공기를 한껏 들이마신 상태에서 이 시기에 혜성처럼 등장한 인물들이 어떻게 위태위태한 방식으로 큰 성공을 거머쥐었는지, 그리고 어쩌다가 그 성공에 도취되어 몰락의 길을 걸었고 할리우드가 지금과 같은 꼴이 되었는지를 보는 것은 달곰쌉쌀한 경험이 될 것이다. 아무래도 상황이 상황인 만큼, 이 책의 후반부는 아스라한 한숨과 눈물 없이는 보기 힘들다. 주인공들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다는 게 그 눈물을 더 진하게 만들고. 조지 루카스가 주인공인 제11장, 「1977년, 스타벅스」의 마지막 두 페이지에 실린 내용 중 인물의 증언만을 들어보자.

 〈스타워즈〉가 나타나고 스필버그가 나타났다. 우리에겐 종말이었다.

- 마틴 스콜세지 : 〈택시 드라이버〉의 감독

 내가 USC에 다닐 때 사람들은 〈확대〉에 몰려들었고 테마 파크의 탈 것 같은 값싼 오락에 취하려고 극장에 가지 않았다. 그러나 (루카스와 스필버그가) 훨씬 많은 돈을 벌 수 있음을 증명해냈고 스튜디오들은 이에 저항할 수 없었다. 고대 로마시대처럼 이런 식으로 부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은 아무도 하지 못했다. 이건 확실히 그들 덕분이다.

- 존 밀리어스 : 〈지옥의 묵시록〉의 각본가

 〈스타워즈〉는 테이블에 놓인 판돈을 싹쓸이했다. 〈스타워즈〉는 맥도널드가 나타나자 훌륭한 음식을 위한 입맛이 증발한 것 같은 현상이다. 우리는 이제 퇴화의 시대에 살고 있다. 모든 것이 뒷걸음질하여 커다란 빨판구멍 속으로 사라졌다.

- 윌리엄 프레드킨 : 〈엑소시스트〉의 감독

 〈스타워즈〉는 영화산업을 죽이지도 유아화하지도 않았다. 팝콘 영화는 언제나 산업을 지배해왔다. 만약 이런 영화가 훌륭하지 않다면 사람들은 왜 팝콘 영화에 몰려들겠는가. 대중들을 왜 그렇게 멍청하다고 생각하는가? 이것은 내 과오가 아니다. 나는 스티븐처럼 사람들이 보고 싶어하는 것을 이해하고 이를 추구할 뿐이다.

- 조지 루카스 : 〈스타 워즈〉의 감독

 사람들은 영화산업의 생태계, 돈을 벌지 못하는 작은 영화를 지원하기 위해서 엄청난 돈을 벌어들이는 영화가 필요한, 영화산업에 존재하는 공생관계의 고리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쉽게 잊어버린다. 〈스타워즈〉가 벌어들인 15억 달러의 돈 중 절반 정도인 약 7억 달러가 극장주들에게 돌아갔다. 그리고 이 돈으로 극장주들은 무엇을 했는가? 그들은 멀티플렉스를 건설했다. 이들에게 여러 개의 가용화면이 생겼다는 사실은 이를 채워야 함을 의미한다. 따라서 과거에는 찾을 수도 없는 곳에 자리잡은 작은 극장에서 상영되던 예술영화가 갑자기 주류 극장에서 상영되고 돈을 벌기 시작한다. 그리고 일단 이러한 영화들이 돈을 벌기 시작하면 미라맥스와 파인라인이 성장하고 스튜디오들이 이러한 영화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여 미국에서 20년 전에는 존재하지도 않던 예술영화 산업이 번창하게 된다. 나는 헐리웃 영화산업을 파괴했다. 이것은 영화를 보다 유아적이 아니라 오로지 보다 지성적으로 만들어 가능해진 것이다.

- 조지 루카스

 블락버스터는 다른 영화들을 후원하지 않는다. 그게 전부다. 영화를 통해 할 말이 있는 사람은 50달러에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 그들은 모든 것을 질식시켰다.

- 마틴 스콜세지

 지난 여름 볼 만한 영화를 찾으려고 베벌리힐즈에 있는 멀티플렉스 두 곳에 갔다. 화면들은 모두 〈잃어버린 세계〉, 〈칸에어〉, 〈친구의 결혼식〉, 〈페이스 오프〉가 점령하고 있었다. 지성적인 사람이 '저걸 봐야겠군'이라고 생각할 만한 영화는 단 한 편도 없었다. 극장은 이제 대형 위락공원으로 변해버렸다. 영화는 죽었다.

- 로버트 알트만 : 〈내쉬빌〉의 감독

 오늘날 나는 미국 영화산업에 구역질이 난다. 좋은 영화는 너무나 드물고 적어도 나의 일부는 〈스타워즈〉가 부분적으로 영화산업에 이러한 방향을 제공한 책임이 있다고 믿기 때문에 나는 이 상황이 정말 유쾌하지 않다.

- 마샤 루카스 : 〈스타 워즈〉의 편집자. 조지 루카스의 아내

 로버트 알트만의 발언에 대해 할 말 있는 사람들이 많겠지만, 아마 알트만은 정말 볼만한 영화가 단 한 편도 없다고 말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오늘날의 할리우드에 뉴 아메리칸 시네마의 강렬함을 계승한 영화가 한 편도 없다고는 말할 수 없다. 하지만 그런 영화들이 거뜬히 박스오피스 1위에 오르며 시류를 휘어잡는 시대가 사라진지 오래인 것도 사실이다. 어쨌든 2005년까지도 승자는 〈스타 워즈 에피소드 3-시스의 복수(Star Wars Episode III-Revenge of the Sith, 2005)〉였다. 저자 피터 비스킨드는 이 시대를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이들(현대의 새로운 작가들, 올리버 스톤, 코엔 형제, 쿠엔틴 타란티노 등을 가리키고 있다-옮긴이 주)에게 자양분을 공급할 반문화 없이, 그리고 저항적 가치의 뒷받침 없이 독립이란 이름만의 독립이며 스튜디오들은 언제나 이들을 삼키고 부패시킬 위험이 있다. 루카스가 상상하듯 독립 영화들이 미국 전역에 있는 멀티플렉스에서 상영된다면 멋진 일이라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루카스는 최근 지역 멀티플렉스에 있는 여섯 개의 화면이 모두 〈잃어버린 세계〉, 또는 그와 유사한 영화를 상영하는 것이 현실인 샤핑몰에는 가보지 않은 것 같다. 불행하게도 이 이야기는 해피엔딩이 아닐 수도 있고 마지막 문장이 알트만의 말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에 의하면 "그림을 그리듯 영화를 완성하여 길모퉁이에 서서 1달러에 팔다보면 지치게 된다. 간혹 〈파고〉 같은 작품도 등장하지만 어쨌거나 잔돈푼으로 영화를 만들고 아무 보상도 받지 못한다. 이는 영화산업을 위해서는 재앙이며 영화예술을 위해서도 재앙이다. 나는 어떤 종류의 낙관적 견해도 가지고 있지 않다."

 다르덴 형제의 최신작 〈더 차일드(L'Enfant, 2005〉를 보기 위해서는 아무데나 널려 있는 멀티플렉스가 아니라 서울의, 광화문의, 씨네 큐브라는 극장에 가야만하는 나라에 살고 있는 사람으로서, 나는 피터 비스킨드의 말이나 로버트 알트만의 말에 반박하지 못한다. 『헐리웃 문화혁명』의 애잔함이 21세기 한국의 독자에게도 유효한 가장 큰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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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하던 새들도 지금은 사라지고 행복한책읽기 작가선집 2
케이트 윌헬름 지음, 정소연 옮김 / 행복한책읽기 / 2005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중편의 대가들이 펼쳐내는 솜씨를 맛볼 때는 두 번 놀라게 된다. 처음에는 작품을 읽어 나가면서 그 거칠 것 없는 속도에 놀라게 되고, 다음에는 작품을 다 읽고 나서 그 무자비한 속도 속에서도 필요한 모든 내용은 다 들어있었다는 사실에 놀라게 된다. 즉, 대가들의 중편에서는 단편의 쾌속 무비함과 장편의 유장함 모두를 기대할 수 있다. 안타까운 것은, 중편 걸작들의 출간 정도는 그 만족감과 반비례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 그 길이 때문에 단행본으로도, 엮어내기도 좀처럼 쉽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렇기에, 케이트 윌헬름의 작품 『노래하던 새들도 지금은 사라지고』의 출간은 더할 나위 없이 반갑고, 축하해야 마땅할 일이다.

 물론 『노래하던 새들도 지금은 사라지고』는 300여 페이지 분량의 장편으로 소개가 되었고, 휴고상이나 로커스상 역시 장편 부문에서 수상한 작품이지만, 역자가 밝힌 그 집필 과정을 보면 처음에는 현재의 1부에 해당하는 「아름답게 노래하던 새들도 지금은 사라지고」만이 발표되었다가 그 뒤에 2부 「셰난도아」와 3부 「정점에서」가 덧붙여져 장편이 된 작품이다. 각 부는 중편 소설 한 편의 길이에 해당하며, (지금은 절판되어 전설이 돼 버린) 시어도어 스터전의 『인간을 넘어서』와 마찬가지로 각 부는 나름의 독자적 완결성을 갖춘 상태에서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다. 물론 이 느슨하다는 표현은 애초에 한 덩어리로 나온 다른 장편 소설들에 비해서 그렇다는 것이며 각 부가 명백히 일관적인 정서를 타고 흘러가기에, 결국 『노래하던 새들도 지금은 사라지고』를 읽는다는 것은 세 편의 훌륭한 중편과 한 편의 훌륭한 장편을 동시에 읽는 일이 될 것이다.

 이 "인류학적 포스트-홀로코스트 SF"의 중점, 혹은 작가의 뛰어난 솜씨는 1부 「아름답게 노래하던 새들도 지금은 사라지고」의 1장, 좀 부족하면 2장까지만 읽어봐도 분명히 드러난다. 주인공 데이비드의 어린 시절을 서술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인류 멸망의 전조를 포착한 데이비드의 가문이 생명 복제 연구를 시작하는 내용까지를 담고 있는 이 두 장(章) 속에서, 케이트 윌헬름은 작품의 중점을 잘 보여준다. (여전히 선입견 가진 독자들에게서 종종 발견되는) SF의 "S"에 대한 두려움을 불식시키기라도 하듯, 작가는 작품의 기반이 되는 생명 복제 "기술"에 집착하지 않는다. 오히려 펜이 더 많이 가 있는 부분은 데이비드가 어린 시절 겪어야 했던 일화들이다. 심지어 작품의 과학적 배경 설명에 대부분을 할애하고 있는 2장조차도, 인상에 남는 것은 그 마지막 끝맺음이다. "저기 언덕 위 좀 보세요. 말채나무가 곧 꽃을 피울 것 같네요. 벌써 나온 꽃봉오리도 있어요."라는 데이비드의 말은, 그가 과거 집을 떠날 때 할아버지에게 들었던 "나는 네가 우리를 미쳤다고 생각하며 떠날 것을 안다. 하지만 데이비드, 넌 돌아올 거야. 말채나무 꽃이 피기 전에 돌아오겠지. 네 눈에도 조짐이 보일 테니까."라는 말을 강하게 환기시킨다. 여기서 직접적으로 와 닿는 것이 데이비드가 돌아와야 했던 이유, 즉 인류의 절멸을 예고하는 위협이 아니라, 시간을 넘어서서 자연을 통해 이어지는 할아버지와 손자의 어떤 연결 고리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케이트 윌헬름은 SF의 "S"가 야기하는 변화 자체가 아니라 그 변화 속에서도 이어지는 인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따라서 "재난 이후의" 이야기라는 데에서 해볼 수 있는 예상과는 달리, 이 작품에서 중요한 것은 재난 이후의 공간이 아니라 재난 이후의 시간이라고 하겠다.

 글머리에 언급했던 것처럼, 이 작품이 중편 소설로서 취하고 있는 빠른 전개 속도는 바로 그 시간의 흐름을 충실히 담아내면서도 동시에 인간적인, 혹은 자연적인 지점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기능을 한다. 한 장과 다음 장 사이의 시간 간격, 심지어 한 페이지와 다음 페이지 사이의 시간 간격조차 크게 벌려두는 형식은 일견 이 작품을 냉혹하고 건조한 하드보일드 소설처럼 보이게까지 하지만, 냉정한 관찰과 조심스러운 절제는 다른 것이다. 케이트 윌헬름의 방법론이 후자라는 것은 이 무자비할 정도로 빠른 전개 속도 속에서도 작은 에피소드, 혹은 그 에피소드 속에서 마주치게 되는 자연 풍경을 묘사하는 지점에서는 아낌없이 유려한 필치를 선보인다는 점에서 확신할 수 있다. 특히, 내용을 밝힐 수는 없지만, 1부의 결말에서 우러나오는 뭉클함 역시 그 동안 절제해뒀던 감정들을 냉정한 대사 몇 마디와 자연에 대한 묘사를 대비하여 탁 풀어놓음으로써 이뤄지고 있으니, 이쯤 되면 클론이고 뭐고 간에 SF도 결국은 과학 자체가 아니라 과학을 이용해서 인간을 발견해내는 고유의 미덕을 지닌 예술품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나는 과거 테드 창의 『당신 인생의 이야기』에 관한 이야기를 하며 밝힌 바처럼, SF의 진정한 즐거움 또한 바로 그 냉혹하고 삭막할 것 같은 과학이 인간 존재를 들여다보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이며, 바로 그 상이한 두 대상을 훌쩍 뛰어 연결해내는 것이야말로 소위 SF의 "경이감"이 아닌가 생각해 보는데, (물론 방법론은 다르지만) 케이트 윌헬름의 『노래하던 새들도 지금은 사라지고』 또한 그런 즐거움, 경이감을 충실히 전달해주는 작품이라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어쩌면 이 작품을 읽게 될 독자들 중에는 "내 인생의 책" 혹은 "내 인생의 작가"가 하나 더 늘었다는 기쁨까지도 함께 얻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나 또한 그런 심정임을 밝히는 데에 한 점 망설임도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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