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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고 싶지 않을 권리가 있다 반올림 29
미카엘 올리비에 지음, 윤예니 옮김 / 바람의아이들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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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통해 '마요트'라는 섬이 있다는 걸 알게 됐고, 프랑스의 '해외 레지옹'이라는 단어도 처음 알았다.

아프리카와 마다가스카르 사이에 있는 이 작은 섬에 위고는 교사인 부모님을 따라가게 되었다. 아프리카 원주민과 프랑스 백인들이 섞여 사는 이곳에서 적응해 살다가 마오레족 여자아이 자이나바를 알게 된다. 둘은 사랑을 나누고 자이나바는 임신을 한다. 위고의 부모님께 알리자 그들은 위고를 먼저 프랑스로 보낸다. 뒤이어 위고의 동생과 함께 그들도 프랑스로 이주한다. 프랑스식 소비문화에 금방 적응하여 그들 식구는 잘 지내지만 위고는 물건과 광고가 넘치는 환경에 질려버린다. 그러다 샤를리라는 여자아이를 만나면서 광고청소운동에 동참하게 된다.

십대 중반의 위고가 자신의 아이를 임신한 자이나바를 책임진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겠지만 부모에게 일임하고 도망치듯 떠나버린 건 무책임하다는 생각이 든다. 어른으로서 그들 부모의 행동은 말할 것도 없고. 자신의 아이가 다른 땅에서 자라고 있는데 도망쳤다면 평생 짊어져야 할 죄책감이라는 생각이 든다. 결국 아기는 떠났지만(유산인지 사산인지는 모르겠다) 위고에게선 일말의 죄책감이 잘 느껴지지 않는다. 그냥 좀 미안하고 마음에 걸리는 정도? 마요트 학교의 사서선생님을 통해 자이나바가 이메일도 보냈지만, 할 말이 없고 이제 와서 무슨 소용이겠냐며 답장을 쓰지 않는다. 그건 위고의 입장일 뿐이다. 그래서인지 광고거부운동을 하는 그가 별로 기특해보이지 않았다.

광고의 폐해는 익히 잘 알고 있지만 무뎌져 있는 거기도 하다. 요즘엔 동영상을 보고 스마트폰 게임을 하는 데도 수없이 광고가 등장한다. 이른바 광고의 홍수시대이다. 광고를 안 보려면 TV도 끊고 인터넷도 끊고 스마트폰도 끊어야 한다.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잊고 지내던 미니멀리즘에 대한 생각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우리집도 좁은 공간에 비해 물건들이 많다. 거의 다 버리고 단순하게 살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지만, 몸은 그렇게 움직이지 않는다. 마음이 그러고 싶지 않은 거겠지만. 왜 잡동사니들을 끌어안고, 거기에다 더 사들이고 살게 되는 걸까?

끊임없이 물건을 사고, 끊임없이 쓰레기를 생산해내는 게 가끔씩 끔찍하게 여겨진다. 그러다 곧 무뎌진다. 이 책만으론 큰 자극이 되지 않는다. 미니멀리즘 관련 다른 책을 읽어봐야겠다. 섣부른 결심보다는 왜 이렇게 살고 있는지를 숙고해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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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의 기원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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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정의 《7년의 밤》, 《28》, 《종의 기원》을 차례로 읽었다. '악의 3부작'이라고 해야 하나? 세 작품 다 필력이 대단하다. 이어지는 이야기가 궁금해서 책을 붙든 손을 내려놓기가 어렵다.

악의 근원을 파헤치고 싶다고 그랬나. 작가는 앞의 두 작품에서 그게 해소가 안돼서 1인칭을 택했다고 했다. 하지만 난 사이코패스인 유진보다 그의 어머니에게 더 감정이입이 되었다. 처음엔 유진을 대하는 그녀의 태도가 이상하고 이해가 안 됐는데, 모든 걸 알고 나니 연민이 밀려들었다.

아이가 자신의 형을 죽이는 장면을 목격하고, 그 아이가 나중에 사이코패스라는 진단을 듣게 됐다면 그 엄마의 심정은 어떨까? 그 대책으로 포식자의 공격성을 잠재우는 약을 먹게 하고 수시로 감시하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었을까?

한편으론 그런 생각도 해본다. 엄마가 사이코패스 진단을 듣지 않은 상태에서, 유민이 죽는 과정을 혹시 자신이 잘못 본게 아닌가 반신반의하면서 살았다면 어땠을까 하고. 약의 부작용이라는 것도 없고, 유진이 좋아라 했던 수영을 실컷 하게 했다면? 약의 부작용이 심했기에 약을 끊은 뒤에 찾아오는 상태가 더 중독적이었을 것 같다. 좋아하는 수영마저 뺏기고, 이모와 엄마에게 계속 통제받아야 하고 일탈할 수 없는 환경이 유진을 더욱 옥죄고 날카롭게 만들어버린 건 아닐까?

사이코패스가 모두 살인자가 되는 건 아니라고 알고 있다. 사회에 무해한 인간을 만들겠다는 의도가 오히려 그 악의 크기를 더 키운 건 아니었을지. 한번밖에 못 사는 인생이기에 다른 선택을 했을 때 어떤 결과가 나올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지만.

이 책대로라면 사이코패스는 환경과 상관없이 처음부터 태어나는 것이다. 유민과 남편이 죽기 전까지 엄마는 두 아이를 무난하게 잘 키운 것 같은데. 다만 유진은 유민보다 말이 적고 반응이 적었을 뿐.

유전적인 병을 갖고 태어나는 것처럼 이것도 그렇게 봐야 하는 건가? 사회의 악이 될 수 있는 선천적인 병. 그렇다고 가정환경이 아무 영향력을 못 끼친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하지만 또 완벽하게 아이를 키울 순 없다. 아이가 범죄자가 되고 사이코패스가 됐을 때 부모의 책임은 어디까지일까?

정유정은 이 책을 쓰면서 악의 근원에 조금 더 가까이 근접했을까? 자신의 속에 있는 악을 소설로 풀어 뱉음으로써 작가는 후련해졌을지도 모르겠다. 반면 독자로서의 나는 여전히 악이 무엇인지 감을 잡기 어렵다. 하지만 선인 악인이 따로 있지 않으며 선과 악이 내 안에공존한다는 작가의 말에는 동의한다. 어떤 계기로 점화가 되면 선인으로 보였던 나에게서도 악이 솟아나올 수 있다는 것.

연쇄살인, 묻지마 살인, 계획적인 보복성 살인, 아동학대, 성폭행, 욱해서 벌이는 살인... 모든 범죄를 인과관계로 설명할 수 없지만 그래도 이런 사건들 속에 어떤 과정들이 있는지 궁금하다. 어떤 악이 어떻게 숨어있다가 어떤 계기로 나왔을까. 범죄심리학 같은 걸 공부해야 하나?

악의 근원에 다가가려는 시도가 어떤 의미가 있는가, 하는 질문이 나에게 온다. 그게 악의 출현을 막을 수 있을까? 하지만 내 안의 악을 직시하는 것은 최소한 내가 범죄자가 되는 걸 막아줄 수 있진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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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의 밤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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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정은 이 책으로 처음 만나게 되었다. 익히 들어 알고 있었던 제목이지만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책을 읽고 이야기하는 모임에서 한 분이 이 책을 읽어보자 했다. 이렇게 읽지 않았으면 계속 못 읽었을지 모르겠다. 이 신선한 작가를 알게 된 것이 흥미롭다.

 

궁금증을 계속 유발하고, 흡인력이 있다. 책이 잘 넘어간다. 사건이 벌어졌고, 이미 범인도 밝혀져 있지만 궁금한 건 왜? 이다. 최현수가 정말 그 범죄를 다 저질렀을까? 왜 저질렀을까? 오영제가 다 덮어씌운 건 아닐까? 오영제라는 인간은 왜 저렇게 된 걸까? 서원인 앞으로 잘 살아나갈 수 있을까? 등등등.

 

범죄의 내막이 밝혀지고, 7년 후에 새로운 국면에 다다르고, 이야기는 끝났다. 하지만 속이 시원하진 않았다. 대답을 듣지 못한 질문들이 여전히 허공을 떠다니기 때문이다. 독자가 고민해봐야 할 몫이라고 하기엔 아쉬운 부분들이 있다.

 

부유한 집안에서 오냐오냐 키웠다고 다 저런 인간이 되지 않는데, 오영제는 왜 자기 가족에게까지 잔인한 인간이 되었을까? 그때 서원이가 어렸다고는 하지만, 7년 동안 현수는 승환을 통해 사건의 자세한 내막을 서원에게 알려주지 않았을까? 7년간이나 서원은 아빠를 증오하고 원망하며 겨우겨우 살았는데. 오영제는 7년 동안 무엇을 하고 살았을까? 현수가 사형을 당하지 않았으면 그는 언제까지고 기다렸을까? 현수는 왜 전화벨소리에 이은 세령의 아빠소리에 입을 틀어막고 결국 죽이기까지 해야 했을까? 이건 오영제의 질문이기도 했는데, 현수는 결국 그에게 답을 들려주지 않았다.

 

운명이 난데없이 변화구를 던진 밤에는, 안개가 짙고 비가 내리는 금요일 밤에는, 인적이 없고 어두운 호숫가에서는, 죽은 줄 알았던 아이가 눈을 뜨고 아빠라고 속삭여 울 때에는, 자기를 찾는 전화벨이 심장을 두들기는 순간에는, 흔히들 무의식이라고 부르는 혼돈속에서는 무슨 일이든지 일어날 수 있지. 좀 보여줄까.”(122)

 

이게 작가의 답인 것 같지만 쉽게 끄덕거려지지 않는다. 결국 상황과 무의식이 만들어낸 거라는, 현수 자신도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는 거 아닌가? 범죄란 이렇게 고의적이지 않지만 상황에 의해, 나도 모르게 저지를 수 있다는 걸 작가는 말하고 싶은 것 같다.

 

작가의 말에서 정유정은 사실과 진실 사이에는 이 그러나가 있다고 했다. “이 소설은 그러나에 관한 이야기라고 했다. 뭘 말하고자 하는지는 알 것 같으나, 여전히 갸우뚱하다. 최현수의 범죄에 대한 진실은 어느 정도 맞춰졌다고 치자. 그렇다면 오영제에 관한 진실은 무엇일까? 자신이 정한 룰과 규칙대로 움직여야 하는 자기만의 세상을 건드려버린 한 인간과 그 아들에 대한 집요한 복수심 속의 진실을, 나는 잘 모르겠다.

그래도 나름 해보게 된 생각은, 트라우마 같은 어떤 강력한 계기가 아니라도 악인이 탄생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A라는 이유가 있기 때문에 B라는 범죄가 발생했다, 라는 인과관계가 깨지는 것이다. 물론 무의식의 영역으로 더 깊이깊이 들어가면 언젠간 퍼즐이 딱 맞춰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실제로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한에서 합당한 이유를 찾지 못하는 범죄들이 존재했고 계속 벌어지고 있다. 악인은 만들어질 수도 있지만, 처음부터 그렇게 태어날 수도 있다……. , 그걸 인정하면 좀 무섭다.

 

반대로도 생각해본다면, 아버지 어머니가 그런 일을 겪고, 7년 동안 그렇게나 시달렸던 서원이가 괜찮은 사람이 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나는 사실 그런 게 아귀가 딱딱 맞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살았던 것 같다. 누군가가 좋은 사람 혹은 악인이 되려면 그에 상응하는 영향이 꼭 있어야 한다고. 하지만 정유정은 아닐 수도 있다고 말하는 것 같다. 나 보고 그걸 인정하라는 것 같다.

 

<28>은 갓 읽었고, <종의 기원>도 읽어보고 싶다. <7년의 밤>에서 던져졌던 질문들이 다음 책들에선 어떻게 답을 주는지 어떤지 곰곰이 정리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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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거스미스 세라 워터스 빅토리아 시대 3부작
세라 워터스 지음, 최용준 옮김 / 열린책들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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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두께에 미리 허걱,해서인지 좀처럼 책에 빠져들지를 못했다. 책을 덮었다가 다시 펼치는 일도 시험 전날 딴짓하는 아이 마냥 다른 것들을 들쑤셔대며 미루기 일쑤였다. 포기할까 포기할까 하다가도 버티며 끝까지 읽은 건 팟캐스트 '이동진의 빨간책방' 때문이었다. 이 책을 다룬 방송의 초반에서 이동진, 김중혁 두 사람 다 많은 칭찬을 해대서 무슨 내용인지 궁금했다. 팟캐스트 2부에서는 스포일러를 다 까발리기 때문에, 빨리 다 읽고 나서 끝까지 방송을 듣고 싶었다. 다 읽고서 영화 <아가씨>도 보고 싶었다. 여기서 책을 놓으면 다시는 읽을 일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도 있어서, 약간은 오기로 책을 꾸역꾸역 읽어내려갔다.

 

첫번째 반전에 왔더니, 어디서 많이 본 장면이었다. 아마도 BBC 드라마를 언뜻 지나가면서 본 적이 있나 보다. 출생의 비밀이 드러나는 장면도 역시나. 드라마를 끝까지 본 것 같진 않다. 그 다음으로도 반전에 반전이 이어지는데, 왠지... 약간 지친다고 해야 할까.

 

젠틀먼보다도 석스비 부인이 굉장히 잔인하게 느껴졌다. 아무 것도 모르는 두 간난 아기의 운명을 신처럼 갖고 논 장본인이니까. 거기엔 자기 자식도 포함이 되었기에 더 그랬다. 수와 모드가 서로 끌린 것은 이 운명의 장난에 함께 얽혀야 했기에 당연한 건지도 모르겠다. 두 여성이 멋도 모르고 받아들여야 했던 삶이, 아프다.

 

어찌됐든 결과는 해피엔딩이지만 그 과정들이 참 버겁고 고통스러워보여서 이 책을 해피하게 기억하진 못하겠다.  내용을 다 알고 이 책을 다시 읽으면 아마 섬세한 문장과 복선 등에 감탄할 거라는 생각은 들지만, 앞으로 다시 읽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책 좀 읽는다는 분들이 열광한 책이지만, 별로 열광하지 못한 한 독자는 조용히 책을 덮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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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실 비치에서
이언 매큐언 지음, 우달임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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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초반의 남녀가 예쁜 연애를 하다가 결혼을 했다. 그리고 첫날밤, 그들은 싸우고 헤어졌다... 이처럼 간단한 줄거리임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전혀 단순하지 않다. 이언 맥큐언이기 때문이겠지? <속죄>를 참 아프게 읽었는데, 이 책도 참 아프다. 사랑과 성, 지금의 한 여자와 한 남자를 만들어낸 과거들...에 대한 상념들이 이어진다.

 

성적인 경험이 없는 남녀가 만나 첫날밤을 치르면, 기대와는 다른 결과가 나올 확률이 매우 크다. 성적인 경험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럴 수 있다. 일방적이면 안 되는, 서로를 알아가야 하고 맞춰가야 하는, 어렵고도 섬세한 상황이므로. 육체적 경험도 없지만, 그에 대한 정보조차도 너무 없는 상황에서 그들은 그 밤을 맞이했다. 백프로 실패할 수밖에 없는. 그걸 당연한 거라 여기고 시행착오를 교훈 삼아 다시 노력했어야 했지만, 그들은 바로 파국을 맞이하고야 만다.

 

사랑하는 두 남녀 사이에는 현재의 그들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라고 작가는 말하는 것 같다. 그동안의 가족들과의 관계와 삶의 경험들이 함께 그들과 그 침대에 있는 것이라고, 그것이 지금 그들의 말과 행동을 낳은 것이라고.

 

정신착란을 갖고 있는 어머니를 침묵속에서 보호해야 했던 에드워드는 무거운 책임감에 짓눌려 있었다. 거기에다 자신의 폭력성과 관련해 스스로를 부정적으로 평가해야 했던 그는 첫날밤에 자신감이 없었다. 자칫 잘못해서 모든 것을 망쳐버릴 것만 같은 두려움에 직면해 있었다.

 

에드워드보다는 경제적으로 풍요했던 플로렌스는 한 번도 안아주지 않았던 어머니와, 이상하고도 미묘한 아버지와의 관계 사이에서 불안함을 갖고 있다. 아버지와 플로렌스 사이에는 뭔가 복잡한 일들이 있었던 것 같은데, 구체적인 언급은 없다. 깊은 스킨십을 두려워할 만하게 한 어떤 경험이 그들 부녀 사이에 있지 않았을까 하는 짐작만을 하게 할 뿐이다. 플로렌스의 의식에서마저도 지워져버린 어떤 일들...

 

사랑받고 싶음, 공격성, 욕망 같은 것들을 드러내지 못하고 숨기고 억눌러야만 했던 두 사람이 만났다. 사랑을 했고, 사랑이 그들을 해방시키는 듯했다. 그래서 결혼도 했지만... 20여년간 다른 경험을 가진 불안한 두 영혼이 만나 처음부터 잘 맞아떨어지기란 당연히 어렵다. 이게 현실이고, 가장 현실적인 문제를 작가는 드러낸다. 첫날밤은 몸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마음의 문제이기도 하다. 어느 만큼 상대를 배려하고 기다리고 마음을 여느냐에 달려 있다.

 

플로렌스는 성적인 것에 아예 무감각한 불감증 환자는 아니었다. 그녀에게도 욕구가 충분히 있었지만 그것을 이끌어내게 도와줄 정보와 경험이 그들 사이에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서툴러서 벌어진 결과 앞에서 진지한 대화와 사과와 격려가 조금 더 있었더라면, 충분히 잘 헤쳐나갈 수 있는 커플이었다.

 

물론 그들이 첫날밤을 잘 치렀더라도, 그 후로 어떻게 됐을지는 모르는 일이다. 그때를 현명하게 넘겼더라면 행복한 미래를 만나지 않았을까 하는 에드워드의 늦은 후회는,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일지도 모른다. 살다가 몇 년 후에 심하게 싸우고 서로를 원수 보듯 하다 헤어졌을 수도 있다. 그렇더라도, 감히, 그 미련과 후회와 안타까움마저 집어치우라고 할 수는 없다.

 

연애를 하는 이들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달콤한 연애소설이 그들에게는 더 끌리겠지만, 간접적으로나마 아픔도 경험할 수 있기를 바란다.

 

사랑스런 에드워드와 플로렌스가 나중에 다시 만나, 사랑을 이루는 소설을 완성하고 싶다.

 

 

그녀를 생각할 때마다 그는 바이올린을 켜는 그 여자를 자신이 그렇게 떠나보냈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물론 이제 그는 그녀의 자기희생적인 제안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녀에게 필요했던 건 그의 확실한 사랑과, 앞으로 살아갈 날이 더 많으니 서두를 필요가 전혀 없다는 그의 다독거림뿐이었다. 사랑과 인내가, 그가 이 두 가지를 동시에 가지고 있기만 했어도, 두 사람 모두를 마지막까지 도왔을 것이다.

한 사람의 인생 전체가 그렇게 바뀔 수도 있는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말이다. 체실 비치에서 그는 큰 소리로 플로렌스를 부를 수도 있었고, 그녀의 뒤를 따라갈 수도 있었다. 그는 몰랐다. 아니, 알려고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가 이제 그를 잃을 거라는 확신에 고통스러워하면서 그에게 도망쳤을 때, 그때보다 더 그를 사랑한 적도, 아니 더 절망적으로 사랑한 적도 결코 없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의 목소리가 그녀에게는 구원의 음성이었을 것이고, 그 소리에 그녀는 뒤를 돌아보았을 거라는 사실을. 대신, 그는 냉정하고 고결한 침묵으로 일관하며 여름의 어스름 속에 선 채, 그녀가 허둥지둥 해변을 떠나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힘겹게 자갈밭을 헤쳐나가는 그녀의 발걸음 소리가 작은 파도들이 부서지는 소리에 묻히고, 그녀의 모습이 창백한 여명 속에서 빛나는 쭉 뻗은 광활한 자갈밭 길의 흐릿한 한 점으로 사라져갈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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