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의 기원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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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정의 《7년의 밤》, 《28》, 《종의 기원》을 차례로 읽었다. '악의 3부작'이라고 해야 하나? 세 작품 다 필력이 대단하다. 이어지는 이야기가 궁금해서 책을 붙든 손을 내려놓기가 어렵다.

악의 근원을 파헤치고 싶다고 그랬나. 작가는 앞의 두 작품에서 그게 해소가 안돼서 1인칭을 택했다고 했다. 하지만 난 사이코패스인 유진보다 그의 어머니에게 더 감정이입이 되었다. 처음엔 유진을 대하는 그녀의 태도가 이상하고 이해가 안 됐는데, 모든 걸 알고 나니 연민이 밀려들었다.

아이가 자신의 형을 죽이는 장면을 목격하고, 그 아이가 나중에 사이코패스라는 진단을 듣게 됐다면 그 엄마의 심정은 어떨까? 그 대책으로 포식자의 공격성을 잠재우는 약을 먹게 하고 수시로 감시하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었을까?

한편으론 그런 생각도 해본다. 엄마가 사이코패스 진단을 듣지 않은 상태에서, 유민이 죽는 과정을 혹시 자신이 잘못 본게 아닌가 반신반의하면서 살았다면 어땠을까 하고. 약의 부작용이라는 것도 없고, 유진이 좋아라 했던 수영을 실컷 하게 했다면? 약의 부작용이 심했기에 약을 끊은 뒤에 찾아오는 상태가 더 중독적이었을 것 같다. 좋아하는 수영마저 뺏기고, 이모와 엄마에게 계속 통제받아야 하고 일탈할 수 없는 환경이 유진을 더욱 옥죄고 날카롭게 만들어버린 건 아닐까?

사이코패스가 모두 살인자가 되는 건 아니라고 알고 있다. 사회에 무해한 인간을 만들겠다는 의도가 오히려 그 악의 크기를 더 키운 건 아니었을지. 한번밖에 못 사는 인생이기에 다른 선택을 했을 때 어떤 결과가 나올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지만.

이 책대로라면 사이코패스는 환경과 상관없이 처음부터 태어나는 것이다. 유민과 남편이 죽기 전까지 엄마는 두 아이를 무난하게 잘 키운 것 같은데. 다만 유진은 유민보다 말이 적고 반응이 적었을 뿐.

유전적인 병을 갖고 태어나는 것처럼 이것도 그렇게 봐야 하는 건가? 사회의 악이 될 수 있는 선천적인 병. 그렇다고 가정환경이 아무 영향력을 못 끼친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하지만 또 완벽하게 아이를 키울 순 없다. 아이가 범죄자가 되고 사이코패스가 됐을 때 부모의 책임은 어디까지일까?

정유정은 이 책을 쓰면서 악의 근원에 조금 더 가까이 근접했을까? 자신의 속에 있는 악을 소설로 풀어 뱉음으로써 작가는 후련해졌을지도 모르겠다. 반면 독자로서의 나는 여전히 악이 무엇인지 감을 잡기 어렵다. 하지만 선인 악인이 따로 있지 않으며 선과 악이 내 안에공존한다는 작가의 말에는 동의한다. 어떤 계기로 점화가 되면 선인으로 보였던 나에게서도 악이 솟아나올 수 있다는 것.

연쇄살인, 묻지마 살인, 계획적인 보복성 살인, 아동학대, 성폭행, 욱해서 벌이는 살인... 모든 범죄를 인과관계로 설명할 수 없지만 그래도 이런 사건들 속에 어떤 과정들이 있는지 궁금하다. 어떤 악이 어떻게 숨어있다가 어떤 계기로 나왔을까. 범죄심리학 같은 걸 공부해야 하나?

악의 근원에 다가가려는 시도가 어떤 의미가 있는가, 하는 질문이 나에게 온다. 그게 악의 출현을 막을 수 있을까? 하지만 내 안의 악을 직시하는 것은 최소한 내가 범죄자가 되는 걸 막아줄 수 있진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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