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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 대한 오해
스티븐 제이 굴드 지음, 김동광 옮김 / 사회평론 / 2003년 7월
평점 :
다윈 이후 가장 유명한 생물학자라는 스티븐 제이 굴드의 대표작.
유전자 결정론과 인종서열화에 대한 통렬한 공격과, 자신들의 왜곡된 믿음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통계를 조작하고, 증거를 외면하며 시종일관 견강부회를 일삼은 과학자들의 작태에 대한 신랄한 폭로를 담고 있다.
믿어지는가.
불과 100년전에 그 시대의 가장 훌륭한 지성이라고 하는 사람들마저 흑인을 인간으로 인정해야하는지를 놓고 진지하게 토론을 했다는 것이. 그 유명한 벤저민 프랭클린, 토마스 제퍼슨, 데이비드 흄, 올리버 웬델 홈즈, 심지어는 링컨조차 인종차별주의자였다는 것을. 그 당시에는 너무나 당연해서 인종차별이라는 말조차 필요가 없었다는 것을.
어떤 그룹은 흑인이 열등하고 그 생물학적 지위는 노예화나 식민지화를 정당화한다고 생각했다. 좀 더 온건한 사람들은 흑인이 열등하기는 하지만 사람이 자유로울 수 있는 권리는 그 사람의 지능 수준에 의거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어느 쪽이든 흑인이 열등하다는 것은 의심하지 않았다.
과학자들은 시대의 그릇된 믿음과 간통하기 위해 서슴지 않고 사실을 왜곡했다. 그들은 (지금으로선 참으로 유치하다고밖에 말할 수 없는) 두개계측학에 집착했고, 그런 유치한 실험조차 왜곡을 일삼았다. 뇌의 용량이 인간의 서열을 결정한다고 믿었다니, 머리가 크다는 걸로 자학개그를 하는 개그맨들은 확실히 시대를 잘못 태어난게 틀림없다.
다른 인종의 뇌 용량이 백인보다 크다거나, 위대한 과학자의 뇌용량이 평균인에 미달한다거나, 범죄자의 뇌 용량이 평균적으로 매우 컸다는 사실 따위는 그들의 믿음을 흔들지 못했다. 그들에게 조작과 궤변을 일삼을 정도의 지능은 있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과학자들은 인간을 서열화하기 위해 여러가지 희안한 짓들을 저질렀다. 폴 브로카는 뇌용량측정으로 자신의 전성시대를 열었고, 롬브로조는 그 유명한 생래적 범죄인을 외치며 범죄인류학을 개창했다. 미국의 심리학자들은 IQ의 창시자 비네가 그렇게 우려해마지 않았던 바 그대로 IQ를 인간서열화와 인종차별을 위해 사용하였고, 희박한 과학적 근거는 그대로 사회통념이 되었다(우리 나라 사람들이 얼마나 자식들의 IQ에 집착하는지 한 번 떠올려보라)
IQ는 많은 사람들이 믿는 것과 달리 선천적 지능을 측정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두뇌는 단순한 수치로 측정할 수 없는 것임에도 세계의 지성을 자부했던 20세기 중반의 미국정부는 IQ테스트로 정신박약아를 구별하여 그러한 판정을 받은 자들을 단종시켰다. 그리고 법대생들이 그렇게 존경해마지 않는 올리버 웬델 홈즈는 이러한 법에 대해 다음과 같은 판결문을 남겼다.
"우리는 공공복지가 최고의 시민들에게 그 생명을 요구하는 경우를 한 차례 이상 보아왔다. 지금까지 국력을 약화시켜온 사람들에게 이 보잘 것 없는 희생조차 요구되지 않는다면 기이한 일일 것이다....
치우(스탠퍼드 비네 테스트 상의 전문용어, 정상과 백치의 중간단계)는 삼대로 족하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되면 우리는 그 시대의 무지를 비웃고, 그 시대의 만행에 분개한다. 하지만 그 시대의 무지와 만행이 이 시대에 남긴 흔적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 한민족이 유대인 다음으로 아이큐가 높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민족적 자부심을 고취시키고(동시에 흑인이나 동남아 인종을 멸시하고) IQ테스트로 자신들의 선천적 우월성을 증명하고 싶어한다. 생래적 범죄인을 사회에게 격리하기 위해 주창된 부정기형과 보호관찰제도는 누범가중과 상습범, 보홈관찰과 치료감호, 악명높은 청송감호소를 남겼지만, 누구도 그 기원이나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가난한 자들은 원래 그렇게 태어났거나, 노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며, 따라서 학습부진아들을 위한 정부의 노력은 부질없는 짓이고, 고교평준화는 인간본성에 반하는 것이라는 주장이 아무런 부끄러움 없이 펼쳐진다. 조금 유식한 사람들은 다윈을 인용하며 사회적 진화론을 외치고 '약육강식'을 정당화한다. 하지만 다윈은 그 유명한 '비글호 항해기'에 있는 노예제도에 대한 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빈곤의 비참함이 자연법칙이 아니라 우리들의 사회제도에 의해 비롯되었다면, 우리의 죄는 중대하다"
우리가 인종의 서열화, 인간의 서열화에 찌들어 있고, 다른 인간의 비참한 현실을 천부적인 운명으로 치부하며 우리들의 사회제도의 문제점을 외면하고 있다면,
실로, 우리의 죄는 중대하다.
p.s1 굴드가 유전자결정론의 비과학성과 인간 두뇌 서열화의 허구성을 폭로한다면 제러드 다이아몬드는 '총, 균, 쇠'에서 문명의 발생을 환경의 영향으로 설명하며 인종의 능력차이에 의한 문명발전론의 허구성을 폭로하고 있다. 사회적 진화론의 무자비한 비논리성에 관심이 있다면 함께 읽어보시길..
p.s2 홈즈가 지지한 그 유명한 '단종법'은 1972년까지 지속되었다. 1972년. 믿어지는가? 그 단종법이 우리 나라에서 시행되었다는 사실은 알고 있는가?
"그들은 내게 맹장과 탈장 수술을 한다고 했어요" 그녀는 평생 아이를 가지려고 시도했고, 가임 기간 동안 세 군데 병원에서 의사의 진찰을 받았다. 그러나 아무도 난관이 절제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지 못했다. 1980년, 워싱턴 포스트에 실린 기사를 보고서야 그녀와 남편은 그들을 한평생 짓누른 슬픔의 원인을 알아냈다.
굴드는 이 일화를 전하며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냉혹한 계산에 따른다면, 통치자의 독단이나 광인의 계획을 지지하기 위해 벌어진 전쟁에서 죽은 수백만의 전사자를 떠올리면 그녀의 실망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한 사람이 이루지 못한 꿈의 비통함은 누구도 측량할 수 없다. 아무런 힘도 없는 한 여성의 희망이 민족의 순수성을 위해 진행된 이데올로기의 이름 하에 공권력에 무참하게 짓밟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