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멸의 문학, 배반의 민주주의 우리시대의 논리 3
김명인 지음 / 후마니타스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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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맑스의 주석자로 살기로 다짐했던 50대의 문학평론가는 90년대를 당혹스러워하고 있다. 확실히, 그는 아직도 80년대를 살아가고 있다.
 
90년대 문학에 대한 저자의 개탄에 공감하기 어렵다. 모든 게 과잉과 열정으로 점철되어 있던 80년대만이 진정한 문학을 꿈꾸던 시대였고, 90년대는 사회의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난잡한 감상주의로 가득찬 소설들만 쏟아져 나왔을 뿐이라는 식의 가혹한 비난은 여러모로 부당하다.

한 방향으로만 응축되어 있던 에너지는 그 방향성을 잃어버리게 되면 어지러이 흩어진다. 그건 당연한 것이다. 오히려 모든 문제의식을 사회로만 집중시켜야 한다고 강요했던 시대가 불행한 것 아니었을까. 시대의 사명을 다한 문학인이라면 다음 세대의 각개전투를 애정을 가지고 돌봐줘야 하는 것이 아닐까. 

"역사와 혁명의 이름 아래 일상성이 소거되거나 연역적으로 재구성되었던 것이 80년대라면 일상성의 발견, 혹은 복원이라는 이름 아래 역사와의 연결 고리를 놓쳐 버린 것이 90년대라고 할 수 있다. 일상 속에 드리워진 역사, 어느 결에 역사의 한 굽이가 되고 마는 일상. 이것을 하나의 텍스트 안에서 통일해 내는 일, 그리하여 우리의 이 지리멸렬하고 무상한 것처럼 보이는 삶이 사실은 모르는 사이에 무언가 영원한 것을 향한, 가치 있는 것을 향한, 정녕 살아봄 직한 세상의 실현을 향한 간절한 움직임의 일부를 이루고 있음을 드러내 보여 주는 일은 과연 더 이상 불가능한 것일까."

저자의 안타까움은 이해가 가지만, 글쎄, 박민규는 아마 "조까라 마이싱!"이라고 하지 않을까.

 

p.s1 저자는 정치평론 부분에서도 현세대에 대한 엄청난 배신감을 표시한다. 그 순수함은 참 아름답지만, 동감하기는 어렵다. 갓쓰고 길거리에 앉아 세상이 왜 이 모양이냐고 꾸짖는 유림 선비의 모습이 떠올랐다면 지나친 모욕이려나..

p.s2 저자는 80년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스스로도 이야기한다. 자신이 진정으로 '살았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은 오직 80년대 뿐이었다고. 그런 사람이 2000년대를 곱게 바라보기는 여러모로 어렵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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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 대한 오해
스티븐 제이 굴드 지음, 김동광 옮김 / 사회평론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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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윈 이후 가장 유명한 생물학자라는 스티븐 제이 굴드의 대표작.

유전자 결정론과 인종서열화에 대한 통렬한 공격과, 자신들의 왜곡된 믿음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통계를 조작하고, 증거를 외면하며 시종일관 견강부회를 일삼은 과학자들의 작태에 대한 신랄한 폭로를 담고 있다.


믿어지는가.

불과 100년전에 그 시대의 가장 훌륭한 지성이라고 하는 사람들마저 흑인을 인간으로 인정해야하는지를 놓고 진지하게 토론을 했다는 것이. 그 유명한 벤저민 프랭클린, 토마스 제퍼슨, 데이비드 흄, 올리버 웬델 홈즈, 심지어는 링컨조차 인종차별주의자였다는 것을. 그 당시에는 너무나 당연해서 인종차별이라는 말조차 필요가 없었다는 것을.


어떤 그룹은 흑인이 열등하고 그 생물학적 지위는 노예화나 식민지화를 정당화한다고 생각했다. 좀 더 온건한 사람들은 흑인이 열등하기는 하지만 사람이 자유로울 수 있는 권리는 그 사람의 지능 수준에 의거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어느 쪽이든 흑인이 열등하다는 것은 의심하지 않았다. 
과학자들은 시대의 그릇된 믿음과 간통하기 위해 서슴지 않고 사실을 왜곡했다. 그들은 (지금으로선 참으로 유치하다고밖에 말할 수 없는) 두개계측학에 집착했고, 그런 유치한 실험조차 왜곡을 일삼았다. 뇌의 용량이 인간의 서열을 결정한다고 믿었다니, 머리가 크다는 걸로 자학개그를 하는 개그맨들은 확실히 시대를 잘못 태어난게 틀림없다. 


다른 인종의 뇌 용량이 백인보다 크다거나, 위대한 과학자의 뇌용량이 평균인에 미달한다거나, 범죄자의 뇌 용량이 평균적으로 매우 컸다는 사실 따위는 그들의 믿음을 흔들지 못했다. 그들에게 조작과 궤변을 일삼을 정도의 지능은 있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과학자들은 인간을 서열화하기 위해 여러가지 희안한 짓들을 저질렀다. 폴 브로카는 뇌용량측정으로 자신의 전성시대를 열었고, 롬브로조는 그 유명한 생래적 범죄인을 외치며 범죄인류학을 개창했다. 미국의 심리학자들은 IQ의 창시자 비네가 그렇게 우려해마지 않았던 바 그대로 IQ를 인간서열화와 인종차별을 위해 사용하였고, 희박한 과학적 근거는 그대로 사회통념이 되었다(우리 나라 사람들이 얼마나 자식들의 IQ에 집착하는지 한 번 떠올려보라) 

 
IQ는 많은 사람들이 믿는 것과 달리 선천적 지능을 측정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두뇌는 단순한 수치로 측정할 수 없는 것임에도 세계의 지성을 자부했던 20세기 중반의 미국정부는 IQ테스트로 정신박약아를 구별하여 그러한 판정을 받은 자들을 단종시켰다. 그리고 법대생들이 그렇게 존경해마지 않는 올리버 웬델 홈즈는 이러한 법에 대해 다음과 같은 판결문을 남겼다.

"우리는 공공복지가 최고의 시민들에게 그 생명을 요구하는 경우를 한 차례 이상 보아왔다. 지금까지 국력을 약화시켜온 사람들에게 이 보잘 것 없는 희생조차 요구되지 않는다면 기이한 일일 것이다....

치우(스탠퍼드 비네 테스트 상의 전문용어, 정상과 백치의 중간단계)는 삼대로 족하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되면 우리는 그 시대의 무지를 비웃고, 그 시대의 만행에 분개한다. 하지만 그 시대의 무지와 만행이 이 시대에 남긴 흔적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 한민족이 유대인 다음으로 아이큐가 높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민족적 자부심을 고취시키고(동시에 흑인이나 동남아 인종을 멸시하고) IQ테스트로 자신들의 선천적 우월성을 증명하고 싶어한다. 생래적 범죄인을 사회에게 격리하기 위해 주창된 부정기형과 보호관찰제도는 누범가중과 상습범, 보홈관찰과 치료감호, 악명높은 청송감호소를 남겼지만, 누구도 그 기원이나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가난한 자들은 원래 그렇게 태어났거나, 노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며, 따라서 학습부진아들을 위한 정부의 노력은 부질없는 짓이고, 고교평준화는 인간본성에 반하는 것이라는 주장이 아무런 부끄러움 없이 펼쳐진다. 조금 유식한 사람들은 다윈을 인용하며 사회적 진화론을 외치고 '약육강식'을 정당화한다. 하지만 다윈은 그 유명한 '비글호 항해기'에 있는 노예제도에 대한 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빈곤의 비참함이 자연법칙이 아니라 우리들의 사회제도에 의해 비롯되었다면, 우리의 죄는 중대하다"

 우리가 인종의 서열화, 인간의 서열화에 찌들어 있고, 다른 인간의 비참한 현실을 천부적인 운명으로 치부하며 우리들의 사회제도의 문제점을 외면하고 있다면, 

실로, 우리의 죄는 중대하다.


 

p.s1 굴드가 유전자결정론의 비과학성과 인간 두뇌 서열화의 허구성을 폭로한다면 제러드 다이아몬드는 '총, 균, 쇠'에서 문명의 발생을 환경의 영향으로 설명하며 인종의 능력차이에 의한 문명발전론의 허구성을 폭로하고 있다. 사회적 진화론의 무자비한 비논리성에 관심이 있다면 함께 읽어보시길.. 

  

p.s2 홈즈가 지지한 그 유명한 '단종법'은 1972년까지 지속되었다. 1972년. 믿어지는가? 그 단종법이 우리 나라에서 시행되었다는 사실은 알고 있는가? 

"그들은 내게 맹장과 탈장 수술을 한다고 했어요" 그녀는 평생 아이를 가지려고 시도했고, 가임 기간 동안 세 군데 병원에서 의사의 진찰을 받았다. 그러나 아무도 난관이 절제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지 못했다. 1980년, 워싱턴 포스트에 실린 기사를 보고서야 그녀와 남편은 그들을 한평생 짓누른 슬픔의 원인을 알아냈다.

굴드는 이 일화를 전하며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냉혹한 계산에 따른다면, 통치자의 독단이나 광인의 계획을 지지하기 위해 벌어진 전쟁에서 죽은 수백만의 전사자를 떠올리면 그녀의 실망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한 사람이 이루지 못한 꿈의 비통함은 누구도 측량할 수 없다. 아무런 힘도 없는 한 여성의 희망이 민족의 순수성을 위해 진행된 이데올로기의 이름 하에 공권력에 무참하게 짓밟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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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차별을 생산한 과학…인간에 대한 오해
    from 일다의 블로그 소통 2009-02-08 13:39 
    “빈곤의 비참함이 자연법칙이 아니라 우리들의 사회제도에 의해 비롯되었다면, 우리의 죄는 중대하다”(다윈의 비글호 항해기 중에서). (스티븐 제이 굴드 지음, 김동광 옮김, 사회평론) 개정판 서문에서 저자는 다윈의 글을 인용하고 있다. 이 문구는 생물학적 결정론에 대한 저자의 비판을 가장 축약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세계적인 진화생물학자 스티븐 제이 굴드는 각 부분에서 시대별로 제기되었던 생물학적 결정론의 허구..
 
 
 
자본주의 역사 바로 알기
리오 휴버먼 지음 / 책벌레 / 200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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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을 보고 운동권의 무시무시한 학습서적으로 오해하는 사람도 있을 것 같지만, 이 책은 역사책이다. 원제는 'Man's Worldly Goods' 부제는 'The Story of the Wealth of Nations'.

 
이 책은 경제사도 아니고 경제 사상사도 아니지만 둘을 모두 조금씩 포함하고 있다. 특정 교의들이 등장했을 때 왜 등장했는지, 사회구조와 그 교의들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역사 속에서 설명하며, 봉건주의 시대의 구조와 그 속에서 태동한 자본주의의 싹, 부르주아 혁명의 모순성, 그리고 사회주의 혁명에 이르는 과정을 차근차근 보여준다. 외국에서는 고등학생들이나 대학 초년생들이 읽는다고 하는데, 문장이 평이하고 설명이 단선적이기 때문에 이해하기 쉽기 때문인 듯 하다. 그게 이 책의 최고 장점이지만 역사를 너무 단순화시킨다는 비판도 받고 있다고 한다. 
 

'화폐가 태어나면서부터 한 쫌 뺨에 피를 묻히고 세상에 태어났다면, 자본은 머리에서 발끝까지 모든 털구멍에서 피와 오물을 흘리며 출현한다'는 맑스의 무시무시한 분석은 사실이다. 자본은 수탈과 정복, 살인과 약탈로 점철된 역사 속에서 태어났으며, 독점자본주의는 공황과 제국주의전쟁, 그리고 결국에는 2차세계대전을 불러일으켰다. 

 
자본주의의 역사적 태동을 설명하기 위해 당연히 저자는 애덤 스미스와 멜서스, 리카도를 이야기하고, 마르크스와 홉슨, 하이예크를 등장시킨다. 저자의 이야기를 따라가다보면, 과연 이 체제가 과연 궁극의 체제인지에 대해 조금은 회의를 해보게될 것이다. 과연 이 다음은 무엇일까? 

 
"역사의 교훈은 경제적 측면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제대로 알기 어렵다. 반면, 경제이론은 역사적 배경에서 분리되면 따분해진다."

 저자는 서문에 이렇게 썼다. 정확한 이야기다. 과거를 알아야만 미래를 짐작해볼 수 있다. 희미하게나마.


우리나라도 고등학생들에게 이런 책을 좀 읽혔으면 좋겠다. 요즘은 '경제'도 수능기본과목이 아니라 안 배우는 학생이 대부분이라던데, 나로선 이해할 수 없다. 경제에 대한 상식 없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건, 말그대로 바보로 살아간다는 것이다. 게다가 그 바보는 언제나 자신이 속한 집단과는 배치되는 의식으로 세뇌당하게 마련이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과거에 대한 지식은 국사가 아니라 오히려 경제사가 아닐까 싶다. 


p.s1 이 책은 1936년에 출간됐다. 거의 70년 전에 출간된 책이 아직도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지만, 책을 읽어보면 충분히 그럴만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p.s2 저자가 이 책을 출간했을 때는 아직 2차대전 발발 전이었다. 저자는 히틀러의 군비확장을 걱정스럽게 지켜보며 전쟁을 예측했고, 그 예측은 적중했다. 그는 2차대전마저 자본주의의 피할 수 없는 '발전'과정이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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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 스트라우스 - 부활하는 네오콘의 대부
박성래 지음 / 김영사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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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네오콘이라는 단어를 신문지상에서 접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네오콘의 사상적 원류가 무엇이며, 그들의 논리가 무엇인지, 그들의 행동의 이유는 무엇인지에 대해 알지 못한다.

 

레오 스트라우스는 네오콘의 정신적 지주다. 독일계 유대인이었던 그는 홀로코스트를 피해 프랑스로 갔다가 미국에 정착한다. 2차세계대전 중 그의 가족 대부분은 사망한다. 홀로코스트를 피해 프랑스로 피신할 수 있도록 자리를 알아봐 준 것은 그의 절친한 친구였던 나치부역 헌법학자 칼 슈미트였다.

 

20대의 스트라우스는 니체에게 강한 영향을 받았다. 니체는 '신은 죽었다'는 단 한 마디로  중세의 종언 선고했지만 그 이후의 지향점을 제시하지는 못했기에 결국 '허무의 철학자'일 뿐이었다. 스트라우스는 이 부분에서 니체와 결별한다. 니체가 부수어 버린 세계의 귀결은 무책임하고 방종한 바이마르 공화국과 극단적이고 파괴적인  나치였다는 것이다.

 

스트라우스가 존경해 마지않았던 스승 하이데거와 절친한 친구 칼 슈미트조차 나치를 합리화 했다. 그들의 '결단주의'철학은 결국 우매한 대중들을 위대한 지도자가 이끌어야 한다는 이론으로 귀결되고 만 것이었다. 스트라우스는 니체의 선언에 동의했지만 하이데거와 슈미트의 해법에 동의하지는 않았다. '진리'는 없지만 혼란을 막고 정치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절대적인 진리'를 추구해야 하며, 그 '절대적인 진리'라는 것은 결국 고귀한 거짓말이어도 상관없다는 것이다(어쩌면 필연적 귀결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적당할지도 모르겠다)

 

거짓말이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상대방이 거짓말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려서는 안 되는 것이다. 때문에 스트라우스는 이렇게 결론 짓는다. 진리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고 그걸 감당할 능력이 있는 엘리트들은 그럴 능력이 없는 일반 대중들에게는 진리, 혹은 도덕이 존재한다고 이야기 해야하며, 그것은 '고귀한 거짓말'이라는 것이다. 

 

그는 한 발짝 더 나아가서 그 '고귀한 거짓말'은 비밀스럽게 이루어져야한다고 가르친다. 영리한 엘리트들이 심혈을 기울여야 겨우 알아볼 수 있는 방식으로 메세지를 남겨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 부분에서 플라톤을 인용하는데, 플라톤에 대한 그의 해석은 기존의 해석과는 완벽하게 상이하다. 그의 해석은 다음과 같다.

 

"우매한 대중들은 플라톤이 숨겨놓은 진리를 찾을 수 없고 단지 '그 자체로 옳은 정의가 있으니 이에 따라 살아라'라는 이상주의만을 발견할 수밖에 없다. 플라톤의 '대화'편에서 소크라테스는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라는 트라시마코스의 주장을 논박하고 상대를 제압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궤변을 늘어놓고 있는 것은 소크라테스일 뿐이며 플라톤이 말하고자 하는 진정한 의미는 트라시마코스의 주장이었다. 이런 밀교적 방법을 통해 플라톤은 몇몇 사람들만 자신의 진짜 생각을 알 수 있도록 숨겨 놓은 채 대중들에게 정의를 따르라고 이야기하였고, 그럼으로써 사회를 위태롭게 만들지도, 스승 소크라테스처럼 박해를 받지도 않았다." 

 

 

스트라우스가 바라본 대중은 우매한 존재였다. 그들은 '진리가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능력이 없는 나약한 존재들이기 때문에, 앨리트들은 적어도 진리가 있는 것처럼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그는 마키아벨리와 생각을 같이하지만 정작 스트라우스 자신은 마키아벨리를 낮게 평가한다. 그것은 밀교적으로 전수해야할 진리이지 대중들에게 가르칠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스트라우스에게 마키아벨리는 순진한 인간일 뿐이었다.

 

 

결국, 스트라우스의 정치철학의 핵심은 '유용함'이다. 사회에 유용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적와 아군을 구별하는 것은 매우 유용하고 필요한 것이다. 적이 없으면 적을 만들어내야 한다. 제국주의 역시 그 자체로 나쁜 것이 아니다. 제국을 안에서 무너뜨릴만큼 무모하지 않다면 충분히 유용하다. 전쟁은 애국심을 고취하고 사회에 만연한 상대주의와 허무주의를 퇴치할 최고의 기회다. 

 

 

개인적으로 스트라우스의 분석에는 상당부분 동의하지만 그 결론에는 고개를 흔들 수밖에 없다. 진리가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 많을 수도 있겠지만, 그들이 대다수라는 확신은 아직 들지 않는다. 그리고 설령 그런 사람들이 대다수라 하더라도 소수의 엘리트가 이를 이용하여 세상을 좌지우지 하는 것이 정당해지는 것은 아니다. 스트라우스의 '폴리스'적 생각(국가주의라고 생각되지만)은 개인주의자들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위험한 발상이다. 스트라우스는 현대사회(아마도 미국 사회겠지만)가 퇴보하고 있고, 곧 멸망할 수밖에 없다고 하지만, 그 증거는 많지 않다. 자유는 혼란을 가져올 수밖에 없는 것이지만 혼란으로 인한 불편함보다 고귀하기 때문에 지켜나가야 하는 것이다. 설령 현대 사회가 자유주의와 상대주의, 허무주의로 인해 허물어져 간다고 해도, 그것을 대신 막아줄 권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없다. 그것은 각자의 선택의 결과일 뿐이기 때문이다. '당신을 위해서'라는 말은 '나를 위해서'에 다름 아닌 경우가 대부분이다. 스트라우스의 정치철학은 결국 그것을 정당화해주는 것에 불과하다. 

 

그의 철학은 과학이 아닌 종교에 가깝다. 그는 열린 사회를 경멸한다. 진리는 소수의 엘리트들이 독점해야하는 위험한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를 엘리트주의자라고 부르는 사람이 많은데, 내가 보기에 그것은 엘리트주의자들에 대한 모욕이다. 그는 건강한 엘리트주의자라기보다는 선민주의자다. 스트라우스의 정치철학은 공개적 엘리트 형성과정을 결과적으로 거부한다.

 

네오콘들은 스트라우스에게 강한 영향을 받았고, 그래서인지 명분을 내세우면서도 실제로 그 명분을 대단하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들에게는 명분은 결국 이익의 다른 이름일 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러한 생각을 합리화시켜주는 철학체계를 갖추고 있다.  아쉽게도, 그들은 단순한 전쟁광들은 아니었던 것이다.

 

스트라우스의 논법으로 지금 벌어지고 있는 테러와의 전쟁을 분석하면 그 구조가 선명하게 다가온다. 존재여부조차 불분명하지만 대중들의 불안감을 자극하기에는 테러만큼 훌륭한 것이 없다. 이라크에 대량살상무기가 실재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어차피 그것은 유용한 명분일 뿐이기 때문이다. 

 

부시(정작 부시는 네오콘이라고 보기는 어렵다)와 네오콘이 현실정치 속에서 서로를 이용하는 과정 역시 스트라우스를 통해 훨씬 쉽게 이해하게 된다. 정권의 정당성이 부족했던 부시는 정당성을 위해 네오콘의 강력한 정치 철학을 차용했고, 네오콘은 권력을 얻었다. 그 밀월 관계는 아직도 유효한 듯하다. 덕분에 전 지구는 부시로부터 '적이냐 아군이냐?'는 일도양단의 협박에 시달리고 있고, 북한이라는 애증의 존재를 옆에 두고 있는 우리나라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괴로워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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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의 추억 - 그의 141구는 아직도 내 마음을 날고 있다
김은식 지음 / 뿌리와이파리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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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살고 있는 곳에서 서울로 나가려면 지하철만 한 시간을 넘게 타야한다. 그 긴 시간 동안 나는 언제나 책을 읽거나 잡지를 본다. 그 때 보는 책은 아주 재미있거나, 적어도 무겁지 않아야한다. 지하철보다 더한 소음의 향연장은 없기 십상이기 때문에 책이 조금만 지루해도 온갖 스트레스가 청각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씨디피도, 엠피쓰리 플레이어도 없는 요즘은 특히나!
 

야구의 추억은 지하철에서 읽기에 딱 맞는 책이었다.
우리 나라 프로야구의 추억담이 무겁지 않게 펼쳐진다. 

93년 삼성과 해태와의 포스트시즌에서 박충식이 던졌던 181구는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문희수와 선동렬, 송유석이 이어 던지는 해태를 맞아 혼자서 15이닝을 완투하던 그의 모습을 보며 느꼈던 안타까움,  97년 LG와의 포스트시즌에 이상훈을 상대로 최익성이 역전 쓰리런 홈런을 터뜨리는 순간, 조용한 교실에서 라디오로 중계를 듣다가 감격해서 두 손을 번쩍 들던 그 뻘쭘함, 야구는 내게 이런 소중한 추억을 남겨 주었다.   20년 동안 한국시리즈를 손에 넣지 못했던 라이온즈의 팬으로서, 감격했던 순간보다는 좌절의 순간들이 더 많았지만, 이젠 그것도 다 추억이 된다(이젠 벌써 여러 번 우승을 했다!) 

  나와 같은 경험을 공유한 사람의 후일담은 정겹다. 사실 누군가의 말대로 '그깟 공놀이'에 불과할지도 모르지만 그깟 공놀이도 없는 삶은 너무 팍팍하다. 

그러니 당신들도 뭔가를 즐기라. 그깟 공놀이건, 그깟 물장구건, 그깟 밴드질이건 뭐건, 살아 있다는 것은 즐길 수 있다는 특권과, 추억을 누릴 자유가 있다는 것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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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2-19 1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프로야구 개막 카운트다운에 해가 뜨고 지는 2월입니다!
야구 관련 도서를 즐겨 읽으시는 분들을 찾아다니다 들어왔습니다.:)
찌질하고 부조리한 삶은 이제 모두 삼진 아웃! 국내최초의 문인야구단 구인회에서 우익수로 뛰고 있는 박상 작가가 야구장편소설 <말이 되냐>로 야구무한애정선언을 시도합니다.
야구 소설도 읽고, 야구 경기도 보고, 소설가가 시구까지 하는 야빠 대동단결 이벤트에 참여해 보세요.
인터넷 교보와 알라딘, 인터파크, yes24에서 진행하고 있습니다.

+즐기는 야구가 즐거운 야구죠. 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