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 스트라우스 - 부활하는 네오콘의 대부
박성래 지음 / 김영사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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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네오콘이라는 단어를 신문지상에서 접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네오콘의 사상적 원류가 무엇이며, 그들의 논리가 무엇인지, 그들의 행동의 이유는 무엇인지에 대해 알지 못한다.

 

레오 스트라우스는 네오콘의 정신적 지주다. 독일계 유대인이었던 그는 홀로코스트를 피해 프랑스로 갔다가 미국에 정착한다. 2차세계대전 중 그의 가족 대부분은 사망한다. 홀로코스트를 피해 프랑스로 피신할 수 있도록 자리를 알아봐 준 것은 그의 절친한 친구였던 나치부역 헌법학자 칼 슈미트였다.

 

20대의 스트라우스는 니체에게 강한 영향을 받았다. 니체는 '신은 죽었다'는 단 한 마디로  중세의 종언 선고했지만 그 이후의 지향점을 제시하지는 못했기에 결국 '허무의 철학자'일 뿐이었다. 스트라우스는 이 부분에서 니체와 결별한다. 니체가 부수어 버린 세계의 귀결은 무책임하고 방종한 바이마르 공화국과 극단적이고 파괴적인  나치였다는 것이다.

 

스트라우스가 존경해 마지않았던 스승 하이데거와 절친한 친구 칼 슈미트조차 나치를 합리화 했다. 그들의 '결단주의'철학은 결국 우매한 대중들을 위대한 지도자가 이끌어야 한다는 이론으로 귀결되고 만 것이었다. 스트라우스는 니체의 선언에 동의했지만 하이데거와 슈미트의 해법에 동의하지는 않았다. '진리'는 없지만 혼란을 막고 정치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절대적인 진리'를 추구해야 하며, 그 '절대적인 진리'라는 것은 결국 고귀한 거짓말이어도 상관없다는 것이다(어쩌면 필연적 귀결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적당할지도 모르겠다)

 

거짓말이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상대방이 거짓말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려서는 안 되는 것이다. 때문에 스트라우스는 이렇게 결론 짓는다. 진리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고 그걸 감당할 능력이 있는 엘리트들은 그럴 능력이 없는 일반 대중들에게는 진리, 혹은 도덕이 존재한다고 이야기 해야하며, 그것은 '고귀한 거짓말'이라는 것이다. 

 

그는 한 발짝 더 나아가서 그 '고귀한 거짓말'은 비밀스럽게 이루어져야한다고 가르친다. 영리한 엘리트들이 심혈을 기울여야 겨우 알아볼 수 있는 방식으로 메세지를 남겨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 부분에서 플라톤을 인용하는데, 플라톤에 대한 그의 해석은 기존의 해석과는 완벽하게 상이하다. 그의 해석은 다음과 같다.

 

"우매한 대중들은 플라톤이 숨겨놓은 진리를 찾을 수 없고 단지 '그 자체로 옳은 정의가 있으니 이에 따라 살아라'라는 이상주의만을 발견할 수밖에 없다. 플라톤의 '대화'편에서 소크라테스는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라는 트라시마코스의 주장을 논박하고 상대를 제압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궤변을 늘어놓고 있는 것은 소크라테스일 뿐이며 플라톤이 말하고자 하는 진정한 의미는 트라시마코스의 주장이었다. 이런 밀교적 방법을 통해 플라톤은 몇몇 사람들만 자신의 진짜 생각을 알 수 있도록 숨겨 놓은 채 대중들에게 정의를 따르라고 이야기하였고, 그럼으로써 사회를 위태롭게 만들지도, 스승 소크라테스처럼 박해를 받지도 않았다." 

 

 

스트라우스가 바라본 대중은 우매한 존재였다. 그들은 '진리가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능력이 없는 나약한 존재들이기 때문에, 앨리트들은 적어도 진리가 있는 것처럼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그는 마키아벨리와 생각을 같이하지만 정작 스트라우스 자신은 마키아벨리를 낮게 평가한다. 그것은 밀교적으로 전수해야할 진리이지 대중들에게 가르칠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스트라우스에게 마키아벨리는 순진한 인간일 뿐이었다.

 

 

결국, 스트라우스의 정치철학의 핵심은 '유용함'이다. 사회에 유용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적와 아군을 구별하는 것은 매우 유용하고 필요한 것이다. 적이 없으면 적을 만들어내야 한다. 제국주의 역시 그 자체로 나쁜 것이 아니다. 제국을 안에서 무너뜨릴만큼 무모하지 않다면 충분히 유용하다. 전쟁은 애국심을 고취하고 사회에 만연한 상대주의와 허무주의를 퇴치할 최고의 기회다. 

 

 

개인적으로 스트라우스의 분석에는 상당부분 동의하지만 그 결론에는 고개를 흔들 수밖에 없다. 진리가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 많을 수도 있겠지만, 그들이 대다수라는 확신은 아직 들지 않는다. 그리고 설령 그런 사람들이 대다수라 하더라도 소수의 엘리트가 이를 이용하여 세상을 좌지우지 하는 것이 정당해지는 것은 아니다. 스트라우스의 '폴리스'적 생각(국가주의라고 생각되지만)은 개인주의자들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위험한 발상이다. 스트라우스는 현대사회(아마도 미국 사회겠지만)가 퇴보하고 있고, 곧 멸망할 수밖에 없다고 하지만, 그 증거는 많지 않다. 자유는 혼란을 가져올 수밖에 없는 것이지만 혼란으로 인한 불편함보다 고귀하기 때문에 지켜나가야 하는 것이다. 설령 현대 사회가 자유주의와 상대주의, 허무주의로 인해 허물어져 간다고 해도, 그것을 대신 막아줄 권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없다. 그것은 각자의 선택의 결과일 뿐이기 때문이다. '당신을 위해서'라는 말은 '나를 위해서'에 다름 아닌 경우가 대부분이다. 스트라우스의 정치철학은 결국 그것을 정당화해주는 것에 불과하다. 

 

그의 철학은 과학이 아닌 종교에 가깝다. 그는 열린 사회를 경멸한다. 진리는 소수의 엘리트들이 독점해야하는 위험한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를 엘리트주의자라고 부르는 사람이 많은데, 내가 보기에 그것은 엘리트주의자들에 대한 모욕이다. 그는 건강한 엘리트주의자라기보다는 선민주의자다. 스트라우스의 정치철학은 공개적 엘리트 형성과정을 결과적으로 거부한다.

 

네오콘들은 스트라우스에게 강한 영향을 받았고, 그래서인지 명분을 내세우면서도 실제로 그 명분을 대단하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들에게는 명분은 결국 이익의 다른 이름일 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러한 생각을 합리화시켜주는 철학체계를 갖추고 있다.  아쉽게도, 그들은 단순한 전쟁광들은 아니었던 것이다.

 

스트라우스의 논법으로 지금 벌어지고 있는 테러와의 전쟁을 분석하면 그 구조가 선명하게 다가온다. 존재여부조차 불분명하지만 대중들의 불안감을 자극하기에는 테러만큼 훌륭한 것이 없다. 이라크에 대량살상무기가 실재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어차피 그것은 유용한 명분일 뿐이기 때문이다. 

 

부시(정작 부시는 네오콘이라고 보기는 어렵다)와 네오콘이 현실정치 속에서 서로를 이용하는 과정 역시 스트라우스를 통해 훨씬 쉽게 이해하게 된다. 정권의 정당성이 부족했던 부시는 정당성을 위해 네오콘의 강력한 정치 철학을 차용했고, 네오콘은 권력을 얻었다. 그 밀월 관계는 아직도 유효한 듯하다. 덕분에 전 지구는 부시로부터 '적이냐 아군이냐?'는 일도양단의 협박에 시달리고 있고, 북한이라는 애증의 존재를 옆에 두고 있는 우리나라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괴로워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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