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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클래식 - 조우석의 인문학으로 읽는 클래식 음악 이야기
조우석 지음 / 동아시아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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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후배가 베를린 필하모닉 내한공연 티켓을 구해주는 바람에 팔자에 없는 클래식 콘서트를 관람한 적이 있었다. 난 평소 클래식 음악을 아주 즐겨듣는 편도 아닌데다 클래식의 엄숙주의를 불편해했기 때문에 클래식 공연에 가는 일이 드물지만, 공짜표가 생긴데다 레퍼토리가 내가 좋아하는 브람스 교향곡이었기 때문에 즐거운 마음으로 공연장을 찾았다(게다가 사이먼 래틀의 베를린 필 아닌가!)

 

내게는 공연이 어땠는지 평할만한 예민한 귀가 없기 때문에 그 날 공연을 평하기는 어렵다. 기억나는 것이라고는 '나 이 정도 고급문화를 향유하는 사람이오'라고 써붙인 것 같은 잘 차려 입은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는 것과(이회창 총재도 있었다), 그리고 대중 가요 콘서트장에서는 볼 수 없는 엄숙한 무게감이 느껴졌다는 것 정도다. 

사실 40분이 넘는 교향곡의 전 부분을 즐기는 사람들이 몇이나 될지 솔직히 난 매우 의문스럽다. 나도 브람스 교향곡 1,2번을 좋아하긴 하지만 1번은 4악장, 2번은 1악장을 좋아할 뿐 나머지는 지루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때문에 콘서트 당일 1부에서 브람스 교향곡 1번이 울려퍼지는 40분 동안 내가 한 순간도 빼놓지 않고 음악에 집중하고 있었다면 그건 거짓말일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2부가 시작하기 직전 내 뒤에 있는 사람이 내 어깨를 쳤다.

"저기요, 자꾸 고개를 갸웃거리시면 제가 연주에 집중할 수가 없거든요. 조심해주세요"

이건 뭔 !@##%$%인가. 아니 콘서트 장에서 고개도 갸웃거리지 말고 정자세로 40분을 앉아 있으라는건가? 클래식 공연에서는 고개도 갸웃거리면 안된다는 룰이라도 있나? 내가 거기서 도리도리 디스코를 추고 있었던 것도 아닌데, 이게 뭔 X같은 요구인가. 당시 너무 어이가 없었지만, 와이프와 후배, 후배의 어머니까지 옆에 계시고, 그 사람의 얼굴이 너무 진지해서 뭐라고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더 어이없는 건, 2부에서 난 말그대로 부동자세로 공연을 관람할 수밖에 없었다는 거다. 혹시나 그 사람이 내 뒤통수를 후려갈기지 않을까 걱정하면서!

'클래식 울렁증'이라는 게 있다. 클래식은 뭔가 고급스럽고 고상하고 우아하며, 뭔가 엄격하고, 숙연한 것이라는 느낌, 내가 클래식을 모르는 것이 왠지 무식함의 반증인 것 같은 느낌, 클래식 작곡가들은 궁극의 예술혼을 지닌 천재들이므로 우리와는 다를 것이라는 그런 느낌 말이다. 이러한 클래식 울렁증은 우리 사회에 너무나 광범위하게 퍼져있어서, 아무도 클래식의 권위에 도전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 과연 클래식 음악은 고상하고 권위있으며, 누구나 공부해야하는 음악의 최고봉일까. 누구에게나 컴플렉스를 안겨줄만한 그런 대단한 음악일까.

저자는 단호하고, 또 시니컬하게,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클래식은 단지 17,18세기의 유럽음악일뿐, 그 자체로 대단한 권위를 지닐 이유도, 다른 월드뮤직과 다른 취급을 할 이유도 없다는 것이다. 저자는 클래식 음악은 과거의 통속음악일 뿐이며 고급음악과 저급음악을 나눌 기준도 근거도 없고, 클래식 음악은 연주가 아닌 악보에만 집착하는 죽은 음악이라고 진단한다. 지나치게 엄숙한 국내 클래식 애호가들의 태도는 컴플렉스에서 기인한 것이라는 저자의 분석은 통쾌하기까지 하다. 저자가 포스트모더니즘 철학과 여러 가지 역사적 사료까지 동원하여 파헤친 클래식 음악 신화의 허구성과, 클래식 음악의 통속성, 클래식 권위의 모순성은 (클래식 매니아들에게는 안타까운 이야기겠지만) 대부분이 사실이다. 

클래식을 특별하게 생각할 이유는 없다. 대금 산조를 모른다고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 우리가 베토벤 교향곡 5번을 모른다고 부끄러워해야 할 이유는 없다. '오래된 음악이라니까, 바다 건너온 서양의 것이니까 이유도 모르고 죽은 모차르트, 베토벤의 관을 떠메고 다니는 것은 실로 우스꽝스런 노릇일뿐더러, 그러한 고정관념의 이면에는 화이트 콤플렉스가 숨어 있다'는 저자의 주장은 충분히 동감할만하다. 

다만, 이 책은 그 내용에 동의하면서도 선뜻 이 책에 대해 호의적인 평가를 내리기는 어렵다.

일단, 저자가 인문학을 통해 클래식을 비판하면서 끌어오는 포스트모더니즘 담론의 수준이 매우 조악하다. 들뢰즈를 철학자 중의 철학자라면서 인용하는 부분에서는 실소를 금할 수 없었고, 사회적 진화론을 클래식 음악의 배경으로 끌어붙이며 다윈을 비판하는 건 어이가 없었다. 글을 쓰면서 자신의 얄팍한 인문학적 지식을  자랑하려고 하면 오히려 역효과가 날 뿐이라는 아주 정확한 사례가 되고 말았다.(책의 부제가 '인문학으로 읽는 클래식'이라는 걸 생각하면 저자의 낯이 약간 뜨거울 듯)

클래식에 대한 권위를 공격하는 것은 좋은데, 저자의 공격논리가 이중적이라는 느낌도 지울 수 없었다. 클래식 애호가에서 재즈 매니아로 변신해서 그런지 몰라도, 어쩐지 클래식보다 재즈가 훌륭하다는 뉘앙스를 강하게 풍긴다. 클래식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취향을 유치한 감정과잉으로 치부하는 것이나, 국악과 달리 클래식이 과장된 아름다움을 담고 있을 뿐, 인간의 내면을 건드리지 못한다는 저자의 비판은 위험 수위를 넘나든다. 저자가 너무 흥분한 나머지 클래식 지상주의를 타파하고 클래식에 제 몫을 찾아주는 것을 클래식을 땅에 파묻어 버리는 것으로 오해한 것일까.

마지막으로 정제되지 않은 문체. 일부러 쉽게 쓰려고 했던 것인지는 모르겠는데, 글이 너무나 투박했고, 불편할 정도로 구어체를 남용한 부분이 있었다. 지나치게 격정적이고 과격한 단어 선택에 심심치 않은 오타와 비문까지 합하면 독서에 몰입하는 것을 방해하는 부분이 많았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울 것 같다. 쓸데 없이 적을 양산한 부작용을 피할 수 없었음은 물론이고. 

좋은 내용을 담고 있고, 기획도 훌륭했는데, 여러 모로 아쉬움이 남는 책이다. 그래도 한 번 쯤 읽어볼만 한 책이라는 건 확실하다. 특히 클래식 울렁증에 시달리는 사람이라면 꽤 통쾌할 것이다. 다만 어디서 이 책을 인용할 때는 적절한 수위 조절이 필요하다는 것을 명심해야겠지만. 

 


p.s 클래식 음악의 인기는 지휘자들의 연봉만 봐도 알 수 있다. 돈으로 가치를 재단하는 것이 바람직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한 가지 힌트 정도는 될 수 있을 것 같다. 현재 세계 3대 오케스트라라는 뉴욕 필의 단원 평균 연봉은 10만불. 메이저리그 최저연봉은? 2009년 현재 39만달러. 평균이 아니라 최저연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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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행, 자본론으로 한국경제를 말하다
지승호 인터뷰어, 김수행 대담 / 시대의창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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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행 교수는 서울대학교 경제학과에서 마르크스 경제학을 가르치셨다. 마르크스라는 말만 들어도 경기를 일으키는 사람들이 아직도 너무나 많이 남아있는 우리 사회에서, 이미 20년 전에 마르크스 경제학을 전공한 교수를 채용했다는 것은 말 그대로 기적이었다. 

 

마르크스는 혁명의 방법론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마르크스에 대한 가장 큰 오해는 아마도 그가 혁명가였다는 것이리라. 마르크스는 평생을 극심한 경제적 궁핍에 시달리며 인생의 대부분을 도서관에서 살았던 이론가였고, 18세기 자본주의 발전과정을 연구하면서 자본주의에서 공황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논증하고, 이를 사회에 대한 절절한 울분으로 토해냈을 뿐이었다.

 

마르크스 경제학도 마찬가지다. 마르크스 경제학은 혁명을 이야기하는 학문이 아니다. 단지 주류경제학과는 완전히 다른 시각으로 자본주의 체계에 내재하는 구조적 문제점을 연구하는 학문일 뿐이다.  주류경제학이 공황을 통제가능한 경기변동으로 본다면, 마르크스 경제학은 공황을 자본주의의 붕괴를 이끄는 모순점으로 본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고, 아직까지 자본주의가 붕괴하지 않았으니 마르크스보다는 케인즈의 말에 무게가 실리고 있을뿐디다(최근의 경제위기에 대해 마르크스 경제학자들이나 임마뉴엘 월러스틴 같은 탈자본주의론자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음은 당연하다) 

 

마르크스 경제학을 이론적으로 연구한 것만으로도 김수행 교수는 우리 사회에서 진보의 상징이 되었지만, 또 한 편에서는 강단좌파라는 딱지와 함께 냉소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이 책을 읽어보면 김수행 교수가 강단좌파라는 냉소의 대상이 되었던 이유를 조금은 짐작해볼 수 있다. 가령, 김수행 교수가 제안하는 "내수 중심의 국민경제"는 중도 우파들이 주장하는 바와 그대로 일치한다. 좌측에 있는 사람들은 '내수중심', '국민경제' 이런 이야기를 받아들이지도 않을뿐더러, 내수 중심의 경제 운영을 통한 경제 위기 극복은 마르크스주의자가 할 수 있는 이야기를 넘어선 것이라고 날선 비판을 할 것이다. 사회주의를 거쳐 공산주의로 넘어가게 될 것이라는 예상이나, 그 과정이 점진적일 수밖에 없다는 주장은 혁명가들에게는 개량주의자로 몰리기 딱 좋은 이야기다(아니러니컬하게도 빨갱이 소리 듣기 딱 좋은 소리이기도 하다). 

 

그러나 나는 좌측에 있는 사람들의 김수행에 대한 냉소가 좀 부당하게 느껴진다. 김수행 교수는 학자일뿐이기 때문이다. 스스로도 그런 비판을 의식하고 있는지, 자신은 연구하고 가르치는 것이 업이지 운동하고 데모하는 것까지 잘 할 능력이 없었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그건 마르크스도 마찬가지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만일 이 책을 읽으면서 뭔가 화끈한 주장을 기대한다면 좀 실망할 수밖에 없다.  김수행 교수의 해법은 양식있는 우파의 이야기와 크게 다르지 않고, 자유주의자가 받아들이기 어려운 당위를 이야기하지도 않는다. 경제상황이 악화되면 이 정부가 파시즘적으로 전환될 가능성이 상당하다는 우려는 나같은 자유주의자도 하고 있는 것이고, 수도 철도 전기 의료보험 등 민영화 반대는 민주당이나 심지어 선진당까지도 입장을 같이하는 것이다. 남북간 긴장완화, 국방비 감축을 통한 복지예산 확보는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지지하는 지극히 상식적인(한나라당한테는 아니겠지만) 이야기들이다.

 

그러니, 겁먹지 말자.

마르크스 경제학은 괴물의 학문이 아니다. 마르크스 경제학 공부한다고 괴물되는 것도 아니다. 당신이 진정 우파라면 오히려 마르크스 경제학을 더 공부해야되지 않겠는가. 적을 알아야 할테니 말이다. 어쩌면 마르크스 경제학은 주류 경제학이 바라보지 못하는 세상의 다른 면을 보여주고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주류 경제학자들을 절대 인정하지 않겠지만.

 

 

 

 

p.s1 안타깝게도 김숙행 교수가 정년퇴임하면서 서울대학교는 그 후임으로 마르크스 경제학 전공자를 뽑지 않고 있다. 김수행 교수 밑에서 마르크스 경제학을 전공하는 박사과정 학생도 있었고, 수많은 대학원생들이 마르크스 경제학을 전공한 교수를 채용해 달라고 대자보까지 붙이면서 요청했지만 서울대 경제학과는 요지부동이다. 하긴, 케임브리지의 장하준마저도 세 번이나 물먹인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님들인데 어련하시겠나. 김수행 교수도 인터뷰 중에 한 마디 하신다. 자기가 뽑힌 것도 학생들이 하도 데모를 해서였지 경제학 교수들이 뽑을 생각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고, 20년 전 일이 지금도 되풀이 되고 있는 거라고 말이다. "주류경제학 하는 놈들도 어지간한 놈들이야(웃음)"

 

p.s2 마르크스 경제학 청강을 한 적이 있는데, 듣다 말았다. 청강하면서 대충 대충 떼우기에는 꽤 어려웠다. 덕분에 자본론이라는 초특급 불온서적을 읽지 않고 건전한 시민이 되었다.

 

p.s3 김수행 교수가 90년대말 유행하던 제3의 길을 향해 툭툭 던지는 논평들은 노무현에게 그대로 들어맞는다. YS와 DJ에게 하는 말도 노무현에게 그대로 해주고 싶다. "...왜 우리가 그렇게까지 했는지 몰라요. 지금 보면 전부 엉터리였는데......."

 

p.s4 지승호는 인터뷰어로 확실히 자리를 잡았나? 책이 계속 나오는 걸 보니 다행히 굶지는 않나보다. 사람들이 책을 많이 사고, 또 많이 읽으면 세상이 조금은 달라질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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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동산 계급사회 우리시대의 논리 11
손낙구 지음 / 후마니타스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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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주노동당 심상정 의원의 보좌관이었던 저자가 그간의 경험과 보좌관 시절 수집한 통계를 바탕으로 한국 사회의 부동산 문제를 분석했다. 한국의 과도한 부동산 가격 상승은 결국 국민들의 기본적 생활근거를 빼앗아 갈뿐 아니라 부동산 소유자에게 엄청난 불로소득을 안겨 줌으로써 국민들의 근로의욕을 저하시키고, 한국의 비상식적으로 높은 부동산 가격과 지나친 부동산 소유 편중도는 결국 부동산이 국민의 계급을 결정짓는다는 것을 말한다는 것이 저자의 분석이다.

 

부동산 가격상승은 국민들의 삶의 질을 저하시키고, 국가경쟁력을 약화시키게 마련이다. 국민들은 살 곳을 마련하지 못하고, 이리 저리 떠돌아다닐 수밖에 없고, 이는 결혼연령 상승, 출산율 저하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기업들은 생산성 향상을 위해 기술개발에 투여했어야 할 이익잉여금을 부동산 투기에 동원했고, 이는 당장 기업들의 이익에는 도움이 되었을지 모르지만 결국 성장잠재력을 깎아먹었다. 부동산 가격 상승은 국민들의 기본적 생활비 증가를 의미하고, 이는 곧 임금인상 요구로 이어졌기 때문에 기업들의 가격경쟁력도 하락할 수밖에 없었다.

 

사회, 문화적인 문제도 심각하다. 주거지는 곧 신분이 된다. 송파, 강남에 사는 사람과 강북에 사는 사람의 경제력에 차이가 크다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 경제력의 차이가 문화의 차이로 파급되고, 자녀들의 학력에까지 세습되는 결코 바람직하다고 하기 어려운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아파트 가격 상승은 오직 건설업자와 투기꾼에게만 이익이 될뿐이다. 그럼에도 국가는 아파트 가격 상승을 막지 못한다. 80년대 기적적으로 도입된 토지공개념은 헌법재판소가 넝마를 만들어버렸고, 그나마 존재하던 부동산 투기 억제책들은 98년 외환위기의 해법이라는 명목으로 김대중 정부가 모두 풀어버렸다. 노무현 정부는 말로는 부동산가격을 잡겠다 잡겠다 했지만 그 스스로도 건설을 통한 외형적 경제성장 패러다임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결국 집값을 잡지도 못했다. 이명박 정부는? 언급할 가치조차 없다.

 

저자는 토지개혁과 택지 국유화라는 파격적인 해결책을 제시한다. 헨리 조지의 귀한인지 아니면 리콴유의 환생인지 모르겠지만, 종부세도 위헌이라는 나라에서 택지 국유화는 정말 안드로메다의 이야기로 들린다. 일단 저자의 주장 중 공영개발만이라도 이루어지길 바랄 뿐인데, 뉴타운 개발되면 쫓겨날 확률이 거의 80%인데도 뉴타운 이야기만 나오면 쌍수를 들고 환영하는 안타까운 서민들이 상당수인 우리 나라에서 정부가 공영개발 같은 정책을 추진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스스로의 권리를 위해 투쟁하지 않는 자를 위해 알아서 시혜적인 정책을 펴는 정부는 없다. 분양원가공개? 선분양제도 폐지? 공공임대주택? 국민들에게 도움이 되는 이런 제도들이 시행되지 않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부동산이 계급이 되는 사회는 결국 우리 스스로가 만든 것이다. 국가에 공공임대주택건설이나 택지공영화를 요구하는 것은 고사하고, 부동산개발이 곧 경제성장이라고 믿으며 오직 제 집값 떨어지는 것에만 분노하는 바로 우리들이 말이다.

 

 

p.s1 사보라고 권할 정도의 책은 아니다. 통계자료만 쓸데없이 지나치게 자세할 뿐, 자신의 주장에 대한 논증이나 분석은 그다지 충실하지 않다. 통계자료도 국회에서 일하면서 자료제출 받은 걸 붙여놓은 것이 대부분이라 외국의 사례에 대한 분석은 부실하기 짝이 없고, 노동운동만 몇 십년을 해온 분이라 그런지 거시경제에 대한 식견에 깊이가 있어보이지도 않다.   

 

p.s2 2012년부터는 총인구가 줄어든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외국의 사례를 볼 때 인구가 줄어들면 부동산 가치가 하락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미 우리 나라는 부동산 가격이 국가경제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기도 했고.

 

p.s3 기본적인 공공임대주택 배정도 없이 시행되는 뉴타운 정책은 그야말로 축출정책에 다름아니다. 서민들은 한없이 밀려날 뿐이다. 건설마피아들이 쌓아올린 허무의 탑이 지금은 한없이 높아 보이겠지만,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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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엔진 - 천사, 귀신, 부적, 종교, 징크스, 점성술...... 이성을 뛰어넘는 인간 믿음에 관한 진화론적 탐구
루이스 월퍼트 지음, 황소연 옮김 / 에코의서재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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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수많은 믿음들은 어디서 기원하는 것일까.

이 책은 그 질문에 답하고 있다.

 

결론은 간명하다.

종교를 포함한 수많은 믿음들은 우리 두뇌에 유전적으로 프로그래밍되어 있기 때문에 아주 간단한 정보만으로도 인간은 쉽게 종교적인 믿음을 갖게 된다는 것, 그러한 종교적 믿음은 인간의 도구제작에서 기원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종교 역시 인간의 진화를 돕는 도구의 일환이었다는 주장은 종교를 가진 사람들에게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주장일 것이다. 하지만, 종교적 믿음의 초석이 되는 용이성과 전형성이 인간 진화의 역사에서 큰 도움을 주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로 보인다.

 

인간은 도구를 사용한다. 도구 사용 원리의 핵심은 바로 인과율의 이해다. 원인과 결과, 이 엄청난 논리를 깨달은 인간은 그 인과율을 세상 모든 것에 적용시킬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인간이 답할 수 없었던 수많은 것들이 종교로 발전했다. 그리고 그러한 믿음은 인간의 진화를 도왔고, 생존에 기여했다.

 

많은 시간이 흘렀다.

하지만 과학의 비약적 진보 앞에서도 종교의 위력은 막대하다. 아직 과학이 답하지 못하는 부분은 당연히, 과학이 답하는 부분까지도 상당히, 종교는 믿음을 선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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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케의 눈
금태섭 지음 / 궁리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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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이맘 때 한겨레에 '현직검사가 이야기하는 수사 잘 받는 법'이라는 칼럼을 연재하다가 결국 단 1회만에 칼럼 기고를 중단하고, 곧 이어 검찰총장 경고를 먹더니 결국 검찰을 떠난 금태섭변호사가 책을 냈다.

 

그 당시 저자가 기고했던 칼럼의 내용은 색달랐다. 전문가들로 구성되어 있는 수사기관에 아마추어인 피의자가 준비 없이 들어가서 생각없이 진술을 하다보면 재판과정에서 돌이킬 수 없는 증거가 되어 있을 수밖에 없으므로, 가급적이면 변호인을 선임하여 의논하고,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에는 진술거부권을 행사하라는 그의 말은 평소 내가 절감하고 있던 내용이었지만, 현직검사가 이야기하기에 과연 적절한 것인가 하는 의문과 과연 이 사람이 검찰에서 살아남을 수 잇을까 하는 더 큰 의문에 나 역시 꽤 놀랐던 기억이 난다. (결국 그의 그 칼럼은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화려한 검찰 사직서가 아니었나 싶다)

 

책은 법과 관련된 여러 편의 에세이들로 이루어져 있다. 일반인들을 상대로 한 글이라 그리 어렵지 않지만, 법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몇 가지 단초들을 던져준다. 아마 책을 읽고나면 과연 진실이라는 것이 존재하는지, 정의란 어떤 것일지, 법을 통해 바라본 세상의 모습은 아름다운지 한 번쯤은 생각해보게 될 것이다. 이런 책이 많이 나오면 우리 나라 국민들도 법에 대한 이해가 조금은 높아지지 않을지, 그러면 악성민원인도 좀 줄어들지 않을지, 그런 뜬금없는 기대를 해보게 된다.

 

다만, 우리의 현실에 대한 이야기가 그다지 많지 않고, 검사출신이라 그런지 민사소송에 대한 이야기가 별로 없다는 점은 상당히 아쉬웠다. 책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미국 관련 이야기도 평소 미국법에 조금만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특별히 새로울 것이 없는 내용이라는 것도 약간은 실망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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