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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정신 - 세상을 바꾼 책에 대한 소문과 진실
강창래 지음 / 알마 / 2013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우스갯소리로 고전이란 “모두가 알지만 아무도 읽지 않는 책”이라고 한다. 다양한 단체와 기관의 권장도서 목록에 수록되고 저명 인사들이 추천하지만 어렵거나 지루해서 읽어보지도 않고 훌륭한 책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책이 고전이다. 읽었다 하더라도 거기에 대해 감히 다른 의견이나 비판을 하면 비난을 받을까봐 입을 다물게 만드는 책 역시 고전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벌거벗은 임금님’을 모시는 신하나 백성처럼 읽지도 않은 고전 앞에서 박수치고 찬사를 보낼 때 ‘벌거벗은 임금님’의 실체를 큰 소리로 외치는 아이 같은 존재가 바로 이 책, [책의 정신]이다.
이 세상 모든 책은 하나하나가 다 하나의 편견이다. 인간은 모두가 자기가 보고 싶은 것을 보고, 듣고 싶은 것을 들을 뿐 아니라 쓰고 싶은 것만 쓴다. (p8)
재작년에 출간되어 지금도 베스트셀러로 팔리는 책 중에 아들러의 심리학을 바탕으로 쓴 책이 있다. 지인 중에 자신의 감정을 제때 표현하지 못해서 다른 사람의 말에 반박을 하지 못했던 순간을 상처로 여기는 사람이 있는데, 베스트셀러로 팔리던 그 책을 읽고는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했다. 그러고는 그때 그때 감정을 솔직히 표현하며 살기로 했다고 말하며 사람들과의 작은 갈등과 오해에도 여과없이 감정을 즉홍적인 말로 쏟아버려 물의를 빚곤 했다. 위에 인용한 저자의 말처럼 지인은 '하나의 편견인 책에서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들은 것'이다. 독서란 객관성을 확보하기 위함인데 오히려 주관성, 즉 편견을 강화했던 것이다. 순간에 머무는 베스트셀러도 이럴진데 오랜 시간동안 화자되어온 고전에서 강화된 편견은 거의 철옹성에 가깝지 않을까...
편견은 수많은 편견을 접함으로써 해소된다. (생략) 나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의 생각을 이해하려고 애쓸 때 내가 가진 편견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리고 생각이 다른 사람과 소통하는 방법, 함께 살아가는 방법까지 배울 수 있다. (p9)
한 권의 책만 읽고 그 책을 맹신한다는 것은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 ‘책의 정신’은 고전이 위대하고 무조건 옳다는 편견에 다른 편견을 제시해서 고전에 대한 편견을 해소하고자 한다. 다시 말해 이 책은, 책에 맞서는 책을 제시한 책이자 책에 대한 책, 즉 ‘메타북’이다. 이 책은 고전에 대한 철옹성 같은 믿음의 체계를 무너뜨리고 독서의 체계를 새롭게 쌓아올릴 수 있는 안목을 갖출 수 있도록 우리의 정신에 일침을 가하는 다섯 가지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첫 번째 이야기에서는 이 세상이 좋은 책을 통해 진보해왔다면 좋은 책이란 어떤 책이었는지에 대해 묻는다. 여기서 로버트 단턴의 [책의 혁명]이 언급된다. 로버트 단턴은 프랑스대혁명을 가능케 했던 책이 우리가 흔히 예상할 수 있는 유명한 계몽사상가들의 저작물이 아니라 포르노소설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한다. [인권의 발명]의 저자인 린 헌트 또한 포르노소설이 인권의 발명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말한다. 이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여기서 우리의 편견은 와르르 무너진다. 포르노소설이 당시 모든 계층의 사람들을 하나의 공감대로 묶어주는 획기적인 매개체였다는 것, 자연스럽게 즐기고 읽던 포르노소설이 어느 날 갑자기 그런 것을 만들어 배포하면 범죄라고 규정하면서 ‘포르노그래피’라는 부정적인 개념의 발명으로 금지법까지 만들어졌던 이유가 국가가 국민을 통제하기 위해, 지배층이 피지배층을 지배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것은 포르노에 대한 편견을 해소할 수 있는 이해를 제시해준다.
두 번째 이야기에서는 사람들에게 읽히지 않고도 세상을 바꾸었던 책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여기에 코페르니쿠스의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와 갈릴레오의 [두 우주 체계에 대한 대화]가 있다. 이 책들은 지구 중심의 우주관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신의 선택을 받은 왕이 국가를 다스린다는 전제군주제를 크게 뒤흔들었다. 당시 우주의 조화를 의심하는 것은 정치체제의 정당성을 의심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난해하기 그지 없어서 한 줌도 안 되는 전문가들만 이해할 수 있는 뉴턴의 [프린키피아]를 해설판으로 먼저 출간했던 프랑스가 오랜 경쟁 상대였던 영국을 제치고 과학사를 어떻게 바꾸었는지와 뉴턴이 연금술에 빠지지 않았더라면 만유인력의 발견도 없었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세 번째 이야기는 고전 중의 고전이라 불리는 플라톤의 저작물에서 시작해서 공자의 [논어]로 이어진다. 소크라테스에 관해 남겨진 저작물 중 플라톤의 저작물만 고전이 되고 크세노폰의 저작물은 알려지지 않은 이유, 소크라테스가 아테네에서 민주주의를 완성했던 페리클레스나 노예제를 없애려 했으며 민주주의에 초석을 놓은 솔론과 달리 독재정치를 지지했다는 사실, 마찬가지로 공자의 [논어]도 성인의 독재를 이상적인 정치로 보았으며 지배층의 이익을 대변하는 보수적인 책이며 민주주의에 가까운 생각을 펼친 사람은 묵자였다고 말한다. 저자는 보수적인 내용을 담은 [논어]와 공자에 대한 이야기가 줄어야 진보적인 [묵자]에 대한 관심이 생겨날 가능성이 커진다고 하며 묵자를 우리 삶속에서 살려내려면 묵자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관심이 세상을 조금씩 바꿀 수 있다고.
네 번째 이야기는 ‘한 인간을 결정하는 것이 본성인가 양육인가’에 대한 오래된 논쟁의 역사와 내용을 다룬다. 이 책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데 과히 그 분량만큼이나 편견에 지진이 일어나고 수많은 편견이 쓰나미처럼 밀려와 편견을 해소하는 충격을 맛볼 수 있는 장이다. 마거릿 미드의 [사모아의 청소년]에 대한 비판적인 의견부터 시작해서, 8개원 된 남자 아기가 포경 수술을 받다가 성기를 잃는 사고 때문에 존 머니의 극단적인 양육론에 따라 여자로 길러지는 사건, 배다른 사촌형인 찰스 다윈의 저작물에서 받은 영향을 받아 ‘우생학’을 탄생시킨 프랜시스 골턴과 존 왓슨의 ‘아기 앨버트 실험’, 스키너의 조작적 조건화는 지금까지 개별적으로 읽었던 과학책의 지식이 유발하는 편견의 위험성을 소름 돋을 정도로 깨닫게 해주는 내용이었다.
다섯 번째 이야기는 책이 역사 속에서 어떻게 학살되었는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극단적인 정권들은 자신과 신념이 다른 사상을 없애는 방법으로 책의 학살을 자행해왔다. 여기서 [20세기 이데올로기, 책을 학살하다]라는 책이 나오는데 나치가 어마어마한 규모로 책을 불태웠다는 소식을 들은 프로이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생각을 없애려면 사람도 불태워야지.” 프로이트의 말처럼 책의 학살은 홀로코스트와 따로 떨어진 사건이 아니며 책의 학살은 인종말살 사건의 전조로 먼저 일어나기도 하고, 함께 벌어지기도 한다는 내용이다.
이렇게 이 책의 이야기는 끝난다. 하지만 “한 권의 책을 제대로 다 읽었다고 말할 수 있는 시점은 책의 마지막 장을 넘길 때가 아니라 독후감을 끝낼 때다.(p7)” 라는 저자의 말 때문에 이 책에 대한 독후감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책은 고전에 대한 편견을 수많은 편견으로 해소해주고 있지만 이 책 역시 하나의 편견이기도 하다. 세상은 그렇게 수많은 책들이 이루는 편견이 모여서 진실을 향해 가는 것이 아닐까 한다. 헤세의 [데미안] 속 유명한 구절이 떠오른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압락사스(Abraxas).” 책의 정신은 바로 하나의 세계를 깨뜨리기 위해 투쟁하는 압락사스의 정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