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 정류장에 어르신들이 많이 뵌다. 반갑게 인사드렸더니 내 주위를 둘러싸며 소속과 싹수 검사를 한다. 성실하게 답변했더니 대체로 수긍하는 분위기, 하 ㅂ 격인가요? 같이 사는 분이 분명 나를 교회 데리고 나올거라는 할머니의 단언에 잔뜩 쫄았지만 씽긋 웃었다. 제1 원칙, 어르신들 말씀에 토달지 않기. 누군가와 대화를 하는건 그 사람을 이기기 위해서, 내가 옳다는걸 증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이곳에서는 합리적인 접근보다 이곳의 문화적 역사적 배경을 이해해야한다. 그 바탕에서 지역분들을 이해할 수 있다, 고 누군가 얘기해주셨다.

 

 따사로운 아침 햇살을 맞으며 한가로운 잡담이 이어졌다. 할아버지는 그놈 하나 있으면 어디든 갈 수 있다고 스무고개처럼 말씀을 하신다. 그놈이 왼쪽으로 가라고 하면 왼쪽으로 가고 빙 돌으라면 돌면 된단다. 주체는 그놈이니 그놈의 말을 듣는 사람은 아무래도 운전기사인가 보다.

 

- 북한이 잘못 생각했다니까. 가네들이 부러워서 그러는겨. 그놈도 있고 테레비도 접었다 폈다 하니께 부럽지 않것어. 쪼매만 있으면 테레비를 들고 다님서 볼 수 있것당게

(할아버지 지금도 그러고 있어요.)

 

 하, 본래 성질대로 했다면 이것저것 참견하고 훈수 뒀을텐데, 살짝 아쉬웠다.

 

 분명히 버스 시간표를 숙지했다. 헌데 어제는 조금 일찍 터미널에 도착해선 막차가 7시쯤이니까 어쩌고 하면서 터미널 사진 찍고 해찰을 부리다 2분 차로 버스를 놓쳤다. 헉. 구간별로 시간표가 있는게 아니라 종점별로 있는터라 착각을 했던거다. 젊은 사람들은 대부분 차를 갖고 다닌다. 어른들이 버스가 많이 다닌다고 해서 맘을 놓아선 안 된다. 대부분 한시간에 한대 정도 있다는 소리니까. 이동해야할 일이 많은 사람들은 버스 시간표에 맞춰 움직일 수 없다. 그래서 나도 차를 살 생각을 했다.

 

 중고차를 사면 큰 부담은 없겠지만 차유지비며 보험비를 감당할 수 있을지 계산이 안 나왔다. 이곳으로 이사온건 적게 벌어서 적게 쓰며 살자는 생각 때문이었는데 씀씀이가 늘어나면 곤란할 것 같단 생각도 있었다. 더불어 이곳의 모든 일상을 여행화 하려는건 아니지만 사람들과 풍경에 닿는 접점이 넓을수록 좀 더 깊고 크게 알 수 있을거란 계산도 있었다. 과연 내 깜냥이 '더 깊고 크게'에 닿을 수 있을지와는 별개로 말이다. 금욕주의는 아니고 그냥 내가 할 수 있을만큼만 궁상떨 정도는 아니게 살고 싶은데 남들은 궁상으로 보면 어쩌나 싶다 내가 남들 눈을 그리 신경 안 썼으니 괜찮겠다 싶다가도 한번씩 버스를 놓치면 또 어쩌나란 걱정도 들고 하는 오락가락한 상태이다.

 

 근무 이틀째

 업무를 인수인계할 분은 다른 일로 출장 중이고 뭔가 일은 벌어지고 나는 뭔가 해야할 것 같은데 감을 못잡고 심부름만 하고 있다. 업무 분장도 없고 단체별 연락처도 없다. 맨땅에 헤딩, 같이 하는 헤딩이면 힘이라도 나겠는데 같은 공간에 있는 분들도 들어온지 얼마 안 돼서 데면데면한 상태. 역동적이고 매순간 보람된 일을 할거란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왠지. 아냐아냐(자아분열?) 우선 그동안 있었던 일에 대한 책도 읽고 사람들 얘기도 들어봐야지. 너무 조급해하지 말아야겠다.

 

 낮에 있었던 뿌듯한 일 하나

  대학생들이 단체로 견학을 왔다. 의심쩍은 시중 도시락 대신 이곳 지역 협동조합에서 마련한 점심을 먹었다. 협동조합이 생긴지 얼마 안 돼 그릇이 별로 없어 일회용품을 썼다. 예전 같으면 많은 쓰레기가 그냥 버려지는걸 보고만 있어야했는데 지금은 종이는 종이대로 분리수거를 했고 컵도 다른 곳에서 급하게 얻어와 종이컵을 안 썼다. 누구 하나 아치 너는 왜 유난을 떠냐고 하는 사람도 없고 (다들 너무 바쁘다) 대학생들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옆에서 도와주고 감사합니다, (잘못 버리면) 죄송합니다라고 하니 힘이 났다. 분리수거 열심히 해도 이 지역에선 폐지를 수거하지 않아 한꺼번에 쓰레기를 가져간다는게 함정.

 

  돈 때문에 택한 게 아니라 하고 싶어서 택한 첫 직장이다. 운이 좋았지만 앞으로도 좋을지 모르겠다. 아직은 좋다. 직장을 견디거나 어떤 일들에 대해 모른척하지 않아도 되고 주관이 개입할 수 있는 여지가 많으니까. 앞으로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첫 마음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 라고 아치가 아치에게 얘기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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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니 2013-05-04 1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축하해요 아치 님! 하고 싶어서 택한 첫 직장이라니, 좋습니다 좋아요.
저는 차를 사는 쪽으로 한 표. ㅎㅎ 주로 집에 두고 버스만 탄다 하더라도 있으면 왠지 급할 때 (막 아프다거나 ㅠ) 써먹지 않으까요.

Arch 2013-05-06 13:51   좋아요 0 | URL
하고 싶은 것과 할 수 있는 것 사이에는 무슨 강 같은게 흐르는 것 같지만 아직은 왠지 다 할 수 있을 것 같은 의욕이 생겨요.
그러니까요. 그런데 왠지 지금은 좀 이래도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