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곳과 직장을 옮기면서 사람들과  담담하지만 어색한 인사를 했다.

 

 실없는 농담과 무리수 대신 항상 건강하고 잘 지내란 인사를 건넸다. 부침이 많았고 사연이 있었던 관계들. 좋은 기억만 담고 가라는 말처럼 맘이 가벼워지면 좋겠다. 이십대의 나는 직장을 옮길 때 터무니없이 설렜다. 집에서 멀어지고  조막만한 조카들과 멀어져도 망설이지 않았다. 확신은 없었지만 기대는 했었다. 지금은 서먹하다. 후련할줄 알았는데 아무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다. 2년 넘게 출퇴근을 한 길과 계절마다 바뀌는 풍경과 아직 반납하지 않은 도서관의 책들. 내 자리는 깨끗이 치웠는데 자꾸 뭔가 더 남은 것 같고 아직 덜 끝난 것 같다. 내일은 알람없이 푹 자도 되는데 소속있는 휴일과 다른 기분이 들 것 같다.

 

 얼마 전 읽은 <대한민국 나쁜 기업 보고서>에서 별말 아닌데도 가슴에 콕 박혔던 말이 있었다. 바로 '직장은 내가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내 전부'란 말이었다. 책에서는 그 전부인 회사가 저지르는 악행을 보고한다. 퇴근 후 여가 시간을 악착같이 찾아쓰려고 했고 병가와 잦은 '집안일'을 핑계로 땡땡이치기도 했지만 회사는 내 전부였다. 힘들 때는 이깟 돈 때문에 내가 이렇게 모멸감을 느껴야되겠냐며 가슴을 탕탕 쳤지만 돈 때문에 회사를 다녔던건 아니었다. 명함 때문도 아니고 일에 대한 자긍심도 사람들과 잘 지내는 방법을 새로 배워나가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회사 덕분에 눈치가 초큼 늘었고, 형식을 중시하는 집단의 명암을 잘 들여다볼 수 있었다.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는 장소에서 나 역시 대부분의 시간을 회사의 리듬에 맞췄다.

 

 발판이며 손거울, 다이어리를 가방에 넣고 나오며 사진기를 꺼냈다. 햇살이 아래서 유리창이 빛나는 건물이 쨍. 사진을 남겼다. 안녕.

 

 이틀 정도 쉬고 부랴부랴 이삿짐을 챙겼다. 포장을 하네, 마네 하다가 왜 나는 이런 잡동사니를 껴안고 있나 싶은 자괴감에 휩싸이다, 정리되는 양을 봐가며 배짱을 부렸다가 내일 하고 말지하며 술먹고 뻗어버리고 말았다. 결국 캐리어에서는 당장 입을 옷이 아닌 실내용 옷과 펜만 무더기로 쏟아졌다. 아마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는 모양이다. 하지만 저녁이 지나고 밤이 되자 도시에선 눈을 씻고 봐도 보이지 않던 별들이 여름도 아닌데 쏟아질듯 많이 보였다. 정말 이사했구나 싶었다.

 

 아침 6시에 일어나 목욕재계하고 기도를 한건 아니고 된장국에 취나물로 아침식사를 했다. 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아침 독서를 하고 버스 도착 시간보다 20분 먼저 집을 나섰다. 버스 정류장에서 할머니 한분을 뵈었다. 인정이 넘치고 수더분한 시골 할머니의 모습을 상상했는데 인사 정도만 하고 그 뒤로 묵묵부답이었다. 면사무소에 전화를 해서 전입신고를 물었더니 내가 못알아듣는다고 판단했는지 대뜸 아버지가 누구냐고 묻는다. 좁고 조용한 동네, 우리 아빠 이름을 함부로 발설할 수 없는 동네, 나는 잘할 수 있을까.

 

 동네 멍멍이랑은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은데. 얘는 손을 턱 내 가슴팍에 걸친다. 무게감과 감촉이 낯설면서 익숙하고 거침없으면서 수줍다. 순진해서 이름도 순진이인 멍멍이

 

 

 

 일상을 전시하듯 펼쳐놓는건 좀 아니지만 오늘은 첫날이고 '사람은 쉽게 안 변하는 법'이니 오늘 아침 출근길 사진도 살짝 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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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13-05-01 17: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진으로 보니 개는 덩치가 큰 순둥이 같습니다.리트리버 종인가요?

Arch 2013-05-02 15:49   좋아요 0 | URL
네. 집에서 미니핀 키웠을 때는 몰랐는데 개가 원래 순한 동물이란걸 새삼 느꼈어요. 미니핀은 자아가 강하고 성질 있거든요.

2013-05-02 01: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5-02 10: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네꼬 2013-05-02 17: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치님, 이 페이퍼 좋아요. 일상의 온기가 느껴져요. 저는 아치님의 일상, 전시회로 보고 싶은데.

Arch 2013-05-06 13:52   좋아요 0 | URL
네꼬님, 저야말로 네꼬님 페이퍼 보면서 기분이 좋은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