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물건을 보여줘, 그럼 너에 대해 말해줄게.
인생이 빛나는 정리의 마법 인생이 빛나는 정리의 마법 1
곤도 마리에 지음, 홍성민 옮김 / 더난출판사 / 2012년 4월
평점 :
품절


 요즘도 그런지 모르겠지만 예전엔 이력서에 특기란이 있었다. 한참을 내 특기에 대해 고민하다 적은게 '정리하기'였다. 고백하자면 특기가 아니라 소망이었다. 나는 정말 정리를 잘하고 싶었다. 미적 취향이나 센스가 후져도 정리만 잘한다면 내 방도 봐줄만한 공간이 될 수 있을거란 희망에 부풀어서는 아니었다. 단지 원하는 물건을 바로 찾고, 언젠가 쓸거라고 모아둔 물건들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정리만 잘 한다면 책을 보고 메모만 해뒀던 '미처리 서류'에서 보석같은 구절들을 발견해 멋들어진 리뷰쯤은 쓱쓱 써낼 자신이 있었다. 정리만 잘 한다면 말이다.


 서재에서 이 책이 언급 될 때 좀 시큰둥했다. 정리를 잘한다고 인생이 빛나기까지 하겠어. 모든 실용서와 자기계발서가 그렇듯 잠깐 반짝하고 말거 아닌가 싶었다. 웬지 반항하고 싶었다. 책 하나로 내가 변할리가 없잖아, 그럴줄 알았다면 진즉 변했어야지 블라블라. 그래도 귀가 얇고 첫 의욕만 넘치는 나답게 책을 보고 정리를 시작했다.


 우선 옷. 설레지 않아도 버릴 수가 없었다. 겨울에 네겹씩 껴입던 기억이 나서 쉽게 버려지지 않았다. 계절별 수납을 하는 대신 다락에 있는 옷들을 옷장에 꾹꾹 눌어담았다. 행거에 뒤죽박죽 섞인 옷들도 티-셔츠-바지-원피스식으로 종류별로 걸어놨다. 아직 정리 안 된 한칸만 빼놓고 정리 완료.

 

 책은 한권도 버리지 않았다. 엄마 아빠 집에 책을 다 놓고 왔기 때문이다. 대신 서류, 특히 어마어마한 이면지 버리기는 당분간 보류했다. 이면지로 다이어리 만들기를 확실히 그만둘지 말지 결정을 못내리는 중. (혹시 이면지 다이어리에 관심있는 분, 손! 아.. 말빚만 지는건가. 그럼 다음에 만든다면 페이퍼에 한번 써보렵니다.) 책 내용이나 다큐 본걸 메모리한건 컴퓨터로 옯겨서 글로 작성할 예정이다. 임시저장 기간으로 기한을 정해서 그 안에 못쓰면 내 것이 아닌걸로.


 가장 큰 고비는 잡동사니였다.



 저 작은 서랍장은 진즉 미어터지고 있었다. 갖고 있었던 후로 한번도 안 쓴 머리핀, 예쁘다고 모아놓은 조개껍질, 세안제, 빨간약까지. 버리면 아까워서 갖고 있지만 정작 잘 쓰지도 않는 물건들로 서랍장은 한번씩 열어볼 때마다 한숨을 불러일으키는 공간이 되고 말았다. 옆에 쓰레기봉투가 있으니 갑자기 힘이 났다. 내가 갖고 있는 물건들은 정리하지 못한 과거는 지금 내 상태를 설명해주는 것이리라. 버리기는 아깝지만 그렇다고 자주 사용하면서 애정을 주는 관계도 아니었다. 


 물건들은 어서 자기 자리를 찾고 싶다고 하지만 쌓인 종이뭉치와 서랍을 외면하고 바쁜척 할 때도 많았다. 한번이라도 말끔하게 정리된 책상에서 책을 읽고 일기랑 금전출납부(?)를 쓰고 싶었다. 정리를 한 후, 미처리 서류함은 아직 비어지지 않았지만 책상은 몰라보게 깨끗해졌다. 비로소 내가 뭘 해야할지 알게 될줄 알았는데 허전하고 씁쓸하다. 내가 공을 들여가며 해야할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걸 알아챘기 때문이다. 결국 그동안은 정리를 핑계로 '정리만 된다면 내가 말이지'란 주문으로 근근히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인생이 빛나는 정리의 마법'은 영리한 책이다. 소비가 나를 증명하는 사회에서 사고자하는 욕망을 죄악시하는 대신 '왜 정리는 해도 해도 끝이 없을까. 혹시 방정리가 안 되는게 아니라 마음이 정리되지 않아선 아닐까.'란 물음으로 말문을 트기 때문이다. 물건을 자꾸 사는건 사회적, 환경적, 윤리적으로 문제될 소지가 다분하다. 물건으로 가득차 있지만 물건을 찾을 수도 잘 쓰지도 않는 상황을 직면해야 한다. 소비근절 다짐이 아니라 물건과의 관계를 제대로 정립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1. 어중간하게 정리하면 평생 정리할 수 없다.


2. 크게 두 가지만 생각하면 된다. '물건을 버릴지 남길지 결정하는 것'과 '물건의 제 위치를 정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3. 너무 정리가 하고 싶은 경우, 그것은 방을 정리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심리적으로 정리하고 싶은 다른 무언가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4. 정리하지 못하는 타입- 물건을 버리지 못하는 타입, 물건을 제자리에 두지 못하는 타입, 두 가지를 혼합하는 타입


5. 안 읽은 책. "언젠가 읽을지 몰라서요.", 그 '언젠가'는 영원히 오지 않는다. '할 거 같다'고 생각할 뿐 아직 손도 대지 않은 책들은 전부 버려야 한다. 책의 부피 줄이기(베껴쓰거나 복사) 정리법을 하다 보니, 문득 그동안 만든 파일을 한 번도 다시 들여다본 적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했던 일은 단순한 위안에 불과했던 것이다. 책은 시기가 생명이다. 만난 그 '순간'이 읽어야 할 때다.


6. 미처리(서류) 박스는 '비어 있는 상태'를 전제로 해야 한다. 미처리 박스에 서류를 남겨두는 것은, 인생에서 아직 처리하지 못한 일들이 많다는 것임을 인식하고 언제나 박스 안을 비어 있는 상태로 유지하자.


7. 세미나는 배운 내용을 실천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세미나는 그곳에 참석해서 강좌를 듣는 순간 의미가 있고, 세미나를 받은 후에 그 내용을 실행할 수 있느냐가 핵심이다. 세미나에서 받은 자료는 '전부' 버릴 것이라는 각오로 수강하도록 하자.


8. 서랍의 이상한 상자- 실제로 상자 뚜껑을 열면 거기에는 동전, 머리핀, 지우개, 예비단추, 손목시계 줄, 다 쓴 건지 어떤지 모르는 건전지, 병원에서 처방받아 먹고 남은 약, 오래된 부적, 키홀더 등 각종 소품이 가득 들어 있다. (혹시 내 서랍도 열어본게 아닐까)


9. 정리를 해서 물건을 줄이면 생활 속에서 자신이 무엇을 중요시하는지 가치관을 확실히 알 수 있다. '버리지 못하는 것은 과거에 대한 집착 때문일까, 아니면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일까' 물건의 소유 방식이 삶의 가치관을 나타낸다. '무엇을 갖고 있느냐'는 '어떻게 사느냐'와 같다.내 눈앞에 있는 물건은 과거에 자신이 선택한 결과물이다. 위험한 것은 그것들을 보고도 못 본 척하거나, 자신의 선택을 부정하듯이 난폭하게 버리는 행위다. 그래서 나는 물건을 무의미하게 쌓아두거나, '일단 아무 생각 말고 버린다'는 생각에도 반대다. 물건 하나하나와 마주하면서 느낀 감정을 경험해야만 비로소 물건과의 관계가 정리될 수 있다. 물건을 버리는 것은, 자신의 가치관을 판단하는 경험의 연속이다. 물건을 버리는 것으로 결단력이 키워진다.



 정리 못한 책 메모는 리뷰 임시저장함에 담아뒀다. 한달 동안 글을 정리해서 리뷰를 안 쓰면 이 글들은 사라진다. 오늘 아침에 임시저장함을 열고선 한두자 수정한 후 문서를 다시 저장했다. 임시저장 기한은 뒤로 미뤄졌다.  나는 평생 정리 못할 타입인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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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2-07-03 17: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 읽은 책. "언젠가 읽을지 몰라서요.", 그 '언젠가'는 영원히 오지 않는다.
저도 이렇게 생각하게된 후, 안읽은책을 모조리 중고샵에 팔아버리고 있어요. 하핫

그나저나 아치도 이 책을 읽었네요. 이 책을 안읽은건 이제 나뿐인가 하노라.

머큐리 2012-07-04 08: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맞는 말인데...꼭 정리를 해야 하는거냐는 반항심이...ㅋㅋ
락방님 이 책은 저도 안 읽었어요...읽어야 하나 고민 중입니다..에고

다락방 2012-07-04 13:24   좋아요 0 | URL
우린 읽지말아요, 머큐리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Arch 2012-07-04 0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같이 안 읽으려다 인생을 좀 빛내고 싶어서, 쿨럭

그런데 그 언젠가의 책들은 책장에 놔두면 정말 언젠가 읽을 것 같다는게 문제에요. 도저히 팔 수가 없어요. 한번 읽어봐서 아니다 맞다가 되면 모르겠는데. 아직 안 읽은 책처럼 매력있는 물건이 또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