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다른 대한민국에서 살고 싶다
박에스더 지음 / 쌤앤파커스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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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민학교 때 장학사 온다고 마루바닥을 미친 듯이 닦아야 했던  기억들 한두개씩 가지고 있을 것이다. 학교만 벗어나면 그런 일은 없을줄 알았다. 소심하고 겁 많은데 불만까지 많아서 매사에 부정적이었지만 학교를 탈출하는 대신 나는 얼른 나이가 먹어서 졸업하길 바랐다. 헌데 나이가 먹어서도 내용보다는 의전, 가치보다는 아부, 소신보다는 눈치로 돌아가는 주변 꼴에 어쩌지 못하고 있는 나를 보고 있노라면 폭폭하다.


 어제는 본격적으로 커피 심부름과 아침에 윗 사람들 책상 닦는 문제로 팀장 주도하에 '여직원'만 모여서 회의를 했다. 예전에 비정규직이 잡일을 할 때는 가만히 있다가 어린 정규직이 도맡아 일을 하는게 문제가 된거였는데 그렇더란 말은 쏙 빼놓고 쌍팔년도 예의를 들이밀며 조직에선 그러는게 아니라고 한다. 다들 예예, 꿀먹은 암말처럼 암말이 없다. 그런 상황에서 뭐가 잘못되고 부당한지 애기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결국 굳이 내 의견을 묻길래 조목조목 따지지 못하고 잘 모르겠다는 말 한마디 했을 뿐인데 벌떼처럼 달려든다.

 계약직이든 정규직이든 누구 혼자 잡일을 도맡아 하는건 기분이 나쁘다. 그렇지만 지금 와서 이러는 것도, 애초에 대우를 받으려고 드는 마음도 이해가 안 된다. 누군가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면 애초에 커피 심부름 자체가 없어야 하는데 한명만 일을 한다며 다른 사람들을 몰아세운다. 본사에서는 업무경감 지시가 내려오고 요새는 각자 알아서 커피를 타먹는데 말이다. 권위란게 무시 당하지 않으려는 사람의 발버둥으로 생기진 않을텐데 이 조직은 그런 일쯤에 꿈쩍도 안 한다. 여기에 있으면 내가 무척 모나고 잘못된 사람 같다. 심장이 조이고 긴장이 퐁퐁 솟는다. 

 그래서 이 책을 무척 읽고 싶었다. 분명 뭔가 잘못됐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거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저자 소개는 어떤가.

 2004년 봄부터 만 4년간 KBS ‘라디오 정보센터 박에스더입니다’를 진행했다. 당시 그는 정관계, 재계, 학계의 거물급 인사들을 데려다놓고, 말 못 할 속사정까지 낱낱이 털어놓게 만들어 청취자들을 열광시켰다. ‘한국에 이런 인터뷰어가 있었나’ 싶을 정도로 논리적이고 치밀한 그의 인터뷰는 미국 대통령이나 북한 주석과 인터뷰를 해도 ‘맞짱’ 뜰 것 같은 특유의 포스로 유력 뉴스메이커들을 놀라게 했다. 

 1년 동안의 미국 연수를 마치고 다시 취재 현장으로 복귀해 현재 ‘취재파일4321’에서 활동하고 있다. 법조 출입, 종군 취재 등 어려운 상황에서 더욱 탁월한 근성을 발휘하는 그는 집요함과 치열함으로 무장한 우리나라 대표 여성 저널리스트다. 

냉철한 기자정신과 정확한 현장감각, 무엇에도 휘둘리지 않는 철벽같은 논리의 소유자인 박에스더는 이 책에서 ‘다른’ 대한민국을 속 시원히 커밍아웃했다. 권위주의 · 집단주의 · 합리성의 부재 · 비교 · 차별 등 일상을 지옥으로 만드는 대한민국의 집단적 고질병에 대해, 너무도 당연해서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 구시대의 잔재들에 대해 박에스더는 묻는다. 우리는 왜 의심하지 않는가? 우리는 왜 분노하지 않는가? 새로운 대한민국을 목전에 둔 지금, 가장 먼저 무너뜨려야 할 것은 무엇인가? 이 책은 그의 좌절 고백이자, 스스로 찾아낸 희망에 대한 고백들이다.  (알라딘 저자 소개 중)


  한국의 여성 저널리스트, '맞짱 뜰 것 같은 특유의 포스'라니. 첫 대목부터 흥미로웠다. 조직의 지진아가 될 수 밖에 없었던 까닭, 서울대 대학원 시절에 타대학 학생으로서 받은 차별, 진보의 수사가 논리에 압도당해 대중을 설득할 수 없는 이유, 한국 성문화의 위선과 성욕을 배출해야하고 조절할 수 없는 것이라고 강변하는 특정 부류의 야만성에 대해 얘기한 부분은 설득력 있었다. 시끄러운 민주주의가 아니라 저 높은 곳에서 내려오는 한방으로 돌아가는 시스템, 약한 시스템의 사회 한국에서 사람들이 인맥에 목숨거는 이유, 도덕만 있고 철학은 없다, 진보는 이데올로기를 넘어 공감할 수 있는 프레임을 짜야한다는 주장 역시 신선하고 공감 됐다.


 하지만 미국 연수 1년 동안 너무 많은 것을 본걸까. 한국의 단면을 놓고 미국 것이 더 낫다란 식의 주장과 몇몇 일화는 공감되지 않았다. 좀 더 센 얘기를 바란걸까. 아니면 좀 더 깊은 얘기를 바란걸까. 좋고 의미있지만 뭔가 살짝 아쉬운 책이다. 강준만 선생님처럼 한국인의 특성을 분류하고 자료를 통해 근거를 제시하는게 아니라 '자신의 주장'만을 쓴 글인데 주제에는 동의하지만 내용에는 반신반의하달까. 



 암튼,

 이번주 당번인 나는 찍소리 못하고 잡일을 하고 있다. 직장을 그만두던가 이 문제를 공론화하던가(그런 출구가 있다면) 아니면 삭히는 수 밖에 없다. (고작 커피 심부름 때문에 전전긍긍이라니, 커피 심부름 때문에 회의를 여는 조직에선 일상화된 심리상태) 권위주의를 해체할 수 있는 권위있는 자리에 오를 수 있는 기회마저 주어지지 않은 사람에게 개인의 경험을 녹여낸 이 책은 아쉬울 수 밖에 없다. 연수간 딸을 대신해 아이를 봐주러 부모님이 미국까지 온다는 얘기에서 저자와 나 사이의 거리를 느꼈다. 이 책이 살짝 아쉬웠던 건 내용이 주장 일변도여서가 아니라 고민의 질 자체가 다르기 때문은 아닐까란 생각도 든다.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람의 배부른 소리로 치부하는게 아니다. 이해는 되지만 공감은 안 된달까. 저자의 분명한 어조를 접할 때면 더더욱 그런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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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쿠바, 미국-> 강한 시스템에 대한 믿음이 있다. 약한 시스템의 나라 한국, 공정하게 작동하는 제도를 가진적이 있다고 믿지 않는다. 합리적 민주주의 문화 절실

* 달콤하지만 아슬아슬한 권위주의 실체- 자신의 권위와 체면이 손상됐다고 느끼는데서 오는 좌절감과 공포 때문. 권위는 권위주의에서 오지 않는다.

* 중년, 집중력이나 단기 기억력 등은 떨어지지만 판단력, 종합능력, 직관력, 통찰력, 어휘력은 훨씬 뛰어남.

* 내 여행의 여러 날들 중에 저런 '멍한' 순간이 한번이라도 있었나 되돌아봤다. 없었다.

* 조금이라도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은 진입장벽을 철저히 높여놓는다. '배타주의' 승장의 여유로움이 아니라 '실력으로 평가한다면 혹시 내가 다시 패자가 되지 않을까?'하는 두려움이다.

* 장하준 교수, 학력 인플레 현상으로 '분류 작업'에 드는 비용만 쓸데없이 낭비된다.

* 소비자가 원하는 건 치킨을 싸게 먹는 것. 가격 체제 공개하고 합리적인 치킨 가격 공시... 시끄러운 민주주의에 익숙하지 않다. 시민들은 오히려 당국, 특히 청와대나 대통령의 '한 방' 개입에 더 익숙하다.

* 진보 패널들은 논리에 목을 맨다. 논리의 완결성 있어야 설득하고 대중을 가르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듯. 정치 주체들은 자신이 주장하고 있는 것들이 바로 대중의 필요에 의해 나왔다는 것을 대중이 느끼게 해주어야 한다.

 진보는 '진짜 진보'란 것을 입증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선명성' 경쟁을 한다. 지나친 원리주의는 현실에의 적용을 헷갈리게 만든다. 제도적으로 분배의 정의를 실현해야 하지만 이것은 가르친다고 되는게 아니라 합리와 논리를 뒤어넘는 '감정'을 갖고 있는 인간이 '느끼게' 해야 한다.

* 정치는 사회를 읽고, 시민들이 필요로 하는 이야기를 듣고, 그것을 위로 조직화해 해결책을 찾도록 강제하는 것. 이념이나 논리에 대중들은 감동 안 한다. 대중들은 그저 살고 싶을 뿐이고 자신들의 어려움을 진심으로 들어주려는 사람이 필요하다.

* 이데올로기로 무장한 사람만이 진보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권위주의 통치체제 하에선 가능한 얘기였다. 선민의식 버려야 대중과 소통할 수 있다.

* 우리는 아직 강한 시스템을 충분히 경험하지 못했다. 그저 분노를 분출만 하는게 아니라 제도 안에서 그 분노를 조직화하고 그 조직을 통해 서로 정정당당하게 대결해 승패를 가르고 그 결과에 따라 타협하고 더 좋은 시스템을 향해 앞으로 나아가는 합리적 민주주의의 경험을 아직 충분히 갖고 있지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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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꼬 2012-05-21 17: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이 글 아주아주 좋은데, 아까 추천하고 댓글도 달려다가, 이 많은 추천에도 아무도 댓글은 안 달기에 눈치 보여서 참았는데, 근데 저도 추천했다고 말 안 하고는 배길 수가 없어서 이렇게 달아요.

Arch 2012-05-22 09:56   좋아요 0 | URL
와, 댓글이다! ^^ 저도 깜짝 놀랐어요. 이 글의 어떤 부분을 좋아하는지 잘 모르겠어요.
저도 추천 누를 때 내가 눌렀다고요, 막 이러면서 알려주고 싶을 때가 있는데 네꼬님도 그렇구나~

생일상, 엄청 부러웠답니다~ 저도 막 강요해서 받고싶을 정도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