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직 검사가 말하는 수사 제대로 받는 법>을 연재해서 작은 파장을 일으켰던 금태섭씨의 <디케의 눈>을 읽은 적이 있다. 김두식씨와는 다른 방식으로 법에 대해 얘기를 하고 질문을 하는 것보다 더 인상적이었던 건 영화나 책의 내용을 인용한 부분이었다. 저자가 법에 대해 얘기한 것도 좋았지만 꼭꼭 씹어 인용한 얘기들이 무척 재미있었던 기억이 난다. 라쇼몽을 인용해 사건의 실체에 다가가는 과정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설명하는 대목은 영화를 보는 것만큼 흥미진진할 정도였다.
트루이요의 독재정치가 오스카 와오에게 미친 영향<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과 유신 시대, <쌍둥이별: 마이 시스터즈 키퍼>의 언니를 위해 존재하는 생명과 유전공학의 딜레마, <새벽의 약속>과 부모의 과보호, <나를 보내지마>와 성매매특별법에서 도구로서 인간을 생각하면 안 된다는 통찰. 몇몇 인용과 주제간 연결은 거칠기도 하지만 문제가 되는 사안을 쉽게 이해하고 다른 쪽으로 접근할 수 있는 방식은 유의미하다.
유럽에서 부르카 착용 금지 법안 문제가 이슈였을 때 종교적 자유와 여성 억압, 배타적인 규율이란 주제로 머리가 복잡한 적이 있다. 그때 다음과 같은 구절을 읽었다면 어땠을까.
여자의 머리카락은 빛을 내어 남자들을 흥분시킨다. 그게 여자가 베일로 머리를 가려야 하는 이유이다. 만약 베일을 쓰지 않는 게 더 문명화된 것이라면, 동물들이 우리보다 더 문명화되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1979년 팔레비 국왕을 축출하고 종교혁명을 완수한 호메이니 정권이 여성들에게 의무적으로 베일을 써야한다고 공표하면서 한 말이다.
종교의 자유, 문화적 다양성과 함께 양성평등, 보편적 인권의 문제 등 고려해야 할 요소는 수없이 많다. 찬성하는 주장이나 반대하는 논리나 나름의 근거가 있기 때문에 쉽게 물리치기 어렵다. 그러나 단순히 종교적 선택이라는 이유만으로 부르카를 허용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페스세폴리스의 작가가 대학 입학을 위한 이념 시험에서 시험관과 주고받은 이야기를 들어보야 한다.
시험관이 “사트라피 양, 당신의 서류를 봤어요. 오스트리아에서 살았더군요. (...) 그곳에서 베일을 썼나요?”라고 묻자 마르잔은 이렇게 대답한다. “아니요. 하지만 저는 늘 이런 생각을 해왔어요. 만약 여자의 머리카락이 그렇게 많은 문젯거리가 된다면 신은 여자를 대머리로 창조했을 거라고 말이죠.” 이슬람의 신이건, 기독교의 신이건, 신은 적어도 남자를 흥분시키기 위해 여자의 머리카락을 만들어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착용 금지냐 아니냐란 어떤 입장이 중요한게 아니었다. 어떤 결론을 내려야하는지의 문제가 아니라 당사자의 이야기에 관심을 갖고 타인의 고통에 둔감해지지 않아야 하며 ‘왜’라는 질문을 잊지말고 해야 하는 사안이었던 것이다.
저자는 딜레마와 다양성, 소통을 화두로 여러 이야기들을 이어나간다. 거세하면 성범죄가 사라질까, 체벌은 정말 아이를 위하는걸까, 위협이나 고문이 없는데도 허위자백을 하는 이유는 뭘까, 음란함은 어떻게 정해지나,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을까, 성매매특별법을 위한 변론까지. 궁금한 사안이었지만 기존에 있던 생각대로 결론을 맺자니 아닌 것 같고 새로운 정보가 들어와 생각을 바꾸자니 뭔가 부족한 느낌이 들었다.
예컨대 학생에게도 인권이 있다는 것을 굳이 조례 제정을 통해서 인식 시켜야 할 정도로 학교 내 사제간 체벌은 문제 되고 있다. 선생님을 때린 학생 얘기의 경우 학생인권조례 제정의 문제를 지적하는 논거로 주로 사용되었다. 그때 나온 이야기가 선생님 인권 얘기였고 최근엔 선생님과 제자 중 어느 쪽에서 더 폭력 가해자가 많이 나왔나는 통계까지 등장했다. 그런데 선생님이 그 전에 학생들끼리 서로 때리도록 시켰다면?(책에 나온 내용) 그럼 처음 전제는 문제가 된다. 모든 사안에 대해 깊이 알고자하는 노력을 그만두고 편향된 시각을 확신하는 순간 함정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확신의 함정>은 어떤 사안에 대해 자신이 제일 잘 안다고 자신하는 순간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궁금한 사안을 단순한 방식으로 결론짓기보다는 계속 질문하고 나아가 자기 논리와 여러 방향성을 제시해야할 필요성을 얘기한다. 그 과정이 흥미진진하지 않은건 금태섭씨의 유려하고 정직한 글 솜씨와는 별개로 세상 돌아가는 형편이 그리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여러 의견을 포용하는 게 아니라 누군가의 입맛에 맞는 정보와 의견만 통하는 세상은 답답할 뿐이다.
저자 금태섭은 어릴 때, 언젠가 누군가로부터 미안하다는 말을 듣고 싶었단다. 세상의 부조리한 일들에 대해 설명이 불가능하다면 당연히 누군가 자신에게 사과를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었던거다. 성인이 된 후, 작가는 자라나는 세대에게 미안해할 필요가 없는지 질문 하게 되었고 그 질문으로부터 조금이라도 자유로워지기 위해서 이 책을 썼다고 밝힌다. 논리와 통찰로 무장한 채 거리낌 없이 답을 찾아나가는 데 여기에 적힌 글들이 작은 격려가 되기를 바란다는 그의 바람은 적어도 내 경우엔 긍정적이다. 그렇다고 내가 논리와 통찰로 무장한 아치라는 얘기는 아니다. 작은 격려만 살짝 취할 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