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에 역사는 커녕 만화로 보는 역사도 좀 별스럽단 생각이었다. 고우영씨에 대해선 몇번 들었지만 관심이 없었고, 왕자의 난은 사극마다 나오는거라 몰라도 아는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굳이 책을 통해 역사를 보는건 흥미롭지 않았다. a가 고우영의 수호지, 초한지를 즐겨 읽는건 알았지만 정말 역사 만화책은 별로였다. 그런데 수레바퀴 6권의 가지와 복숭아, 그리고 19세 미만 구독불가에 꽂혀 이 책을 읽게 됐다. 

 그림으로 보는 역사책은 알기 쉽고 재미있다. 이 책은 역사의 수레바퀴는 돌고 돈다는 주제 아래 조선의 건국 과정에서 일어나는 야사를 다루고 있다. 고우영씨의 역사관은 일반적이고 가끔씩 끼어드는 유머는 썰렁하다. 그렇지만 책에서 짧은 단락으로 읽었을 때는 느끼지 못했던 야사의 맛이 만화에선 생생하게 살아있다. 아직은 고우영씨 만화라 좋은게 아니라 삼국지를 읽고 판단을 해보고 싶다. 다행히 도서관엔 삼국지뿐 아니라 초한지, 수호지까지 다 구비되어 있다.



 표지가 얄팍했지만 빵가게습격사건님의 페이퍼를 보고 괜찮겠다 싶어 희망도서로 신청했다. 어제 서문과 첫챕터를 읽었다. 책중독자의 고백에 대한 부분이다. 관심가는 분야가 생기면 책을 사고, 관심 분야는 또 생겨나 책을 사고, 또 산다. 그러다보니 지난 관심 분야의 책은 읽지 못하고, 언젠가 읽겠지 하는 상태가 지속되는 중독 상태에 빠져든다. 나도 그런적이 있다.

 서재에서 신간이 나왔다고, 이 책은 어떤게 기대된다란 페이퍼가 보인다. 페이퍼 행렬이 지나가면 리뷰가 나온다. 벌써 그 책을 읽은 사람들이 있는거다! 게다가 내가 좋아하는 작가다. 솔깃할만한 내용이다. 당장 살 수 밖에. 나도 고백하자면 책중독자였고, 다른건 아까워서 수백번은 고민하면서 책만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사대기 일쑤였다. 그 책들을 읽기도 전에 다시 또 책을 사고, 사놓은 책은 몇페이지만 읽다 말았다.
 
 도서관에 다니면서 책 사재기 충동을 좀 줄일 수 있었다. 혹할만한 신간이 나오면 그 작가의 전작을 읽어본다. 구미가 당기면 희망도서로 신청하고 아니면 그만. 후진 책을 쓴 작가가 갑자기 훌륭한 책을 쓸리는 없다. 영화를 배우나 시나리오보다 감독을 보고 선택하는 것과 마찬가지. 희망 도서 신청을 한다고 바로 책을 살 수 있는건 아니지만 기다리는 동안 책 갈증은 어느 정도 해소된다. 그렇게 몇번 하다보니 여전히 어떤 책이 너무나 갖고 싶은 충동을 조절할 수 있게 됐다. 그래도 여전히 몇십권씩 빌려가며 읽고 있다. 그러니까 이건 뭐, 중독이 그친게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풀린건지도 모르겠다.



 일테면 이런식. <우리 동네>를 읽고나서 골목에 대한 책을 읽고싶다. 자전거를 타고 서울의 골목길을 다녀본 <그 골목이 말을 걸다>와 전국의 골목길을 다닌 최갑수의 <이 길 끝에 네가 서 있다면 좋을 텐데>를 읽는다. 사진은 참 좋다. 그런데 이야기가 없다. 골목의 역사, 가는 길, 심지어는 그곳 주민분들과 한 얘기까지 적혀있는데 그래서 뭘 느끼고 어떤 생각이 들었는지, 지나고나니 어땠고 그 공간을 사유할 수 있는 방식은 뭐가 있었는지 등등에 관한 것은 없다.

 해상도 뛰어난 사진과 짤막한 글 따위를 적거나 나는 우울했어요, 행복했어요, 감미로웠어요 등등의 감상을 적어놓은 책은 별로다. 그건 내가 일기뿐 아니라 페이퍼에서도 줄곧 하는 짓인데 종이로 만든 책에서까지 그런 얘기를 듣고 싶진 않다. 여행서도 인문학적 관점을 지닌 사람이 쓴다면 어떨까. 푸코나 들뢰즈를 꺼내지 않아도 지식나열이 아닌 공간에 대한 상상을 할 수 있는 여지를 두는 글 말이다. 

 골목에 대한 책을 다시 검색하다 황인숙씨가 쓴 책을 발견했다. 2005년도에 나온거라 3년 안의 신간만 희망도서로 신청할 수 있는 이곳 도서관에선 영영 볼 수 없다. 다행히 이곳 도서관에선 볼 수 없지만 군산 도서관엔 있다. 언젠가 집에 가면 꼭 빌려봐야겠다. 나를 실망시킬지, 각성시킬지, 좀 더 행복하게할지는 모르겠지만 왠지 기대된다. 그러니까 어쩌면 책을 샀던건 그 책이 내게 가져다줄 온갖 잡다한 상념을 상상하는 시간이 달콤해서였는지도 모르겠다.

 

 

 
  <베즈무아>와 성 어쩌고 하는 책들 사이에 있던 <광고, 리비도를 만나다>는 순전히 도서관에서 성인들의 성적 호기심을 제어하고 바른 생활을 할 수 있도록 굳이 검색하지 않으면 찾을 수 없도록 이 책들을 서지 분류목록과 상관없이 한쪽에 숨겨놓은 덕분에 발견할 수 있었던 책이다. 넘치거나 부족함 없이 광고 속에 숨겨진 성적 키워드와 발상을 깨는 광고만으로 <광고, 리비도를 만나다>를 꽤 재미있게 읽었다. 이 책에서 자위하는 여성을 상상할 법한 광고를 언급하며 베티 도슨 얘기를 하지 않았다면 제목은 알고 있으되 <네 방에 아마존을 키워라>는 영영 읽지 못했을거다.

<네 방에 아마존을 키워라>는 아마존 전사들처럼 전투적인 페미니즘을 연상시킨다. 나와 다른 것을 적으로 간주하고 공격하는 여성주의 운동은 외부의 비난뿐 아니라 나조차 수긍할 수 없는 점이 많았다. (그렇다고 내가 안 그랬거나 앞으로 안 그럴거라고 장담할 수는 없다.) 그래서 이 책을 볼 생각을 못했다. 그런데 이 책은 제목과 다르게 여성의 자위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여성의 다양한 성기 스케치(성적으로 깨인건 아니지만 적어도 멍청한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이 부분을 보고 내건 비정상이란 생각이 확 달아났다.), 삽입의 부수적인 단계가 아니라 하나의 독자적인 행위로서 여성의 자위, 자위하는 방법, 남성뿐 아니라 여성, 남성 여성의 이분법을 벗어난 성에 대한 생각거리를 마련해줬다. 아쉬운건 자위 예찬이 지나치다보니 적정하게 자위를 하고 싶은 나같은 사람을 소외시킨다는 것, 이건 엄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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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가게재습격 2011-04-03 0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태그가 하일라이트인데요.^^ 오랜만에 왔다 갑니다.^^

Arch 2011-04-04 09:17   좋아요 0 | URL
태그에 공을 들였는데, ^^

다락방 2011-04-03 1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치님 책 엄청 많이 읽네요! 와우- 저는 평소에 아치님과 책 읽는 취향이 겹치지 않는데 저기 위에, [그 골목이 품고있는 풍경]은 저도 봤어요. 헤헷

Arch 2011-04-04 09:19   좋아요 0 | URL
황인숙씨거라 다락방님도 치니님도 봤을거라 생각해요. 엄청 많이는 아니고, 책 중독자의 고백을 보다보니까 뭔가 책 페이퍼를 쓰고 싶었어요. 예전에 읽은 책도 넣고 그랬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