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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동네
유동훈 글.사진 / 낮은산 / 2010년 11월
세상에서 하나 뿐인 어떤 동네, 어떤 관계, 어떤 사람들 이야기
혜정이가 간다.
정식이가 간다.
혜정이가 아픈 엄마 아빠를 대신해
정식이 손을 꼭 잡고 간다.
유월의 지는 햇살 속으로
빛나는 한때를 간다.
오누이가 간다.
아프게 간다.
당당한 걸음으로
아주 먼 길을 간다.
해바라기
새봄에 중학생이 되는 명호는 부두 노동자이던 아버지를
하늘 나라로 보낸 뒤 늘 이렇게 혼자 동생 명숙이를 업고 있다.
명호의 마른 어깨에는 아버지 대신 지켜야 할 엄마와
집안 살림까지 얹혀 있다.
명호는 어깨의 짐을 누군가와 나눠 지고 싶었고,
이제 큰 짐 하나를 내려놓게 되었다.
2000년 봄이면 초등학생이 되는 명숙이가 동자승으로 절에 보내지기 때문이다.
명호는 혼자 짊어지기에는 너무 버겁던 짐 하나를 부처님께 내려놓는다.
어깨의 짐은 덜지만 명호는 혼자 남는다.
봄이 오면 명호는 동네 공장 담벼락에 혼자 기대어 해바라기를 할 것이다.
갈래갈래 찢긴 아버지 주검 앞에서 울음을 참아 냈듯이
엄마 없는 캄캄한 밤을 함께 견뎌 낸 동생에 대한 그리움도 그렇게 참아 내면서 봄볕 아래 서 있을 것이다.
자꾸 잠이 와요
잠이 와요. 자꾸 잠이 와요. 집을 생각하면, 학교를 생각하면 자꾸 잠이 와요.
아무리 애를 써도 눈꺼풀이 너무 무겁고, 어깨가 굳어서 고개를 들 수가 없어요.
잠 속에서 나는 아기가 돼요. 엄마 뱃속에서 웅크린 아기의 몸이 되어, 그냥 내 모습 그대로 감싸져 보살핌을 받아요.
비 개인 하늘, 햇빛이 이렇게 좋아도 나는 자꾸 달팽이처럼 몸을 웅크려요. 너무 아프고, 너무 잠이 와요.
골목을 지나다 만만치 않은 놈을 하나 맞닥뜨렸다.
‘씁~ 알 만하나 사람이 남의 구역에서 뭐하는 짓이야’ 하는 표정으로 내 얼굴을 꼬나본다.
그 당당한 기세에 눌려 골목을 되돌아 나가다 괘씸한 생각이 든다.
사실 그 골목에 있는 개집이 녀석의 집은 아니다. 본 주인도 얌전히 자기 집 안에 있구만
저도 나처럼 어슬렁거리며 친구 집에 놀러 온 주제에......
못마땅한 표정으로 한 장 박았다.
그놈도 역시 못마땅한 표정이다.
용기
뒷집 대인호 할아버지 할머니는 60년 넘게 바다에서 일을 하셨다. 이제 폐선을 하고 집에만 계시려니 오죽 답답했을까. 할아버지가 식사도 잘 안 하신다며 할머니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할아버지는 개를 한 마리 데려다 키우기도 하고, 비둘기들 모이도 주면서 적적함을 달래려 하셨지만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얼마 전 할머니의 빨랫줄에는 할아버지 생일상에 올릴 민어가 널렸다. 할머니는 “돈을 주고 생선을 다 샀다.”며 그게 참 웃기시단다.
빨랫줄에 민어가 걷히고 며칠 뒤 외출복 차림의 할아버지를 뵈었다. “할아버지 어디 가세요.” “어, 경로당.” 헐~ 대인호 할아버지가 경로당을. 나는 그게 참 웃겼다. 재빨리 골목을 돌아 할아버지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할아버지의 용기를 축하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꼬마 눈사람을 만들 만큼만 희끗희끗 깜빡이며 첫눈발이 날렸다.
아이들이 만든 꼬마 눈사람.
어디서 주워 왔는지 싱크대 거름망을 멋스럽게 비껴 쓰고 담벼락 한구석에서 사그라지는 동네 집들을 배경으로 웃음 띤 얼굴을 하고 제 몸을 녹이며 슬프게 서 있다.
우리 동네가 그러하리라.
겨울이 되면 이곳은 한동안 홍역을 앓는다. 방송국 헬기가 동네 하늘을 돌며 구경거리를 찍어 대고 무슨무슨 기업의 직원들은 ‘사회봉사’라며 기업 로고가 선명한 울긋불긋한 형광색 조끼를 입고 동네를 누빈다. 동네 골목을 막고 한 줄로 서서 연탄을 나르고, 한 집을 골라 전시용 페이트칠을 하며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다. 어떤 이들은 이곳의 삶을 박제화해 박물관을 만들자는 정신없는 소리를 해 대기도 한다. ‘지금 여기’를 살고 있는 사람을, 그 삶을 구경거리로 만드는 것은 폭력이다.
웃음 띤 얼굴로 햇볕 아래 자연스레 사라지는 첫눈은 슬플지라도 의연하다.
오리야
나는 어떤 동네를 떠나던 날,
눈물 한 방울 흘리지 못했어.
난 그때 너무 아프고 무섭고 힘들었거든.
낯선 이곳에서 외롭지 않냐구?
응, 조금.
하지만 괜찮아, 네가 있잖아.
그리고 이건 비밀인데
어떤 동네 공부방 사람들이
내 옆에서 계속 날 지켜 줄 거야.
이제 내려 달라구
그래, 알았어.
조금만, 아주 조금만 더 안고...
치니님 소개로 이 책을 읽기 전에는 그저 골목길을 조심스럽게 찍는 사람의 이야기를 담은건줄 알았다. 아주 오랫동안 골목에서 살고, 그 골목이 변해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떠나버린 사람들을 그리워하며 골목에 남은 사람의 이야기일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이 책엔 르포르타주류의 객관적이고 논리적인 잣대보다는 따스한 시선이 담겨 있다. 그렇다고 감상적이거나 낭만적으로 웅얼거리는 것도 아니다. 잘 아는 사람을 그려낼 때 부딪히는 적당한 거리에 대한 고민을 저자는 간결한 문장으로 메우고 있다.
이 책 속엔 누군가 대안이 없다고 가차없이 잘라냈을 파릇파릇한 삶이 살아 있다. '세상 사람들은 찌질하다고 하지만 우린 괜찮아요'가 아니라 사실 괜찮지 않지만 그렇다고 너무 죽겠는 것도 아니라며 담담하게 살아가는 사람들. 세찬 바람에 옷가지가 다 날라가버려 몸보다 맘이 더 시렵지만 바람이 그친 후 지붕을 수리하러 올라가야하는 고단한 일상을 사는 사람들 이야기 말이다.
동생을 업어주는 명호를 보며 금세 녹아내릴 눈사람을 바라보며 얼마나 맘이 시큰했던지. 어떤 동네를 보고 나서 이제 더 이상 나 좋다고 골목을 찍어대는 일을 못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