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이 힘든건 아니다. 회사에선 내가 그만두지 못할 정도의 월급을 준다, 풍요롭기까지 한건 아니지만 너무 박하다고 할 수 없는 정말 딱 그만큼의 돈. 더 잘하고 싶은 의욕은 생기지 않을 정도로 적당히 지루하고 피곤한 일. 그게 다다. 늦게까지 회사에 붙어 있다가 집으로 가기 전이면 꼭 맥주 몇 잔을 먹어야 개운하다. 집에 와선 바로 곯아 떨어지는데 옆자리에 누운 사람의 말로는 내가 잠에 빠지면 개가 물어가도 꿈쩍 안 할 것 같단다. 가끔씩 멍해진다. 때때로 내가 어떤 사람인지 까먹는다. 일하는 사람들과 아직 잘 안 맞아서일까, 향수병일까, 아니면 너,무,오,래, 일하는걸까.

 하루 종일 고객의 전화를 받으며 되먹지 않은 통신 상품을 팔 때도 괜찮았다. 추운 겨울에 아무도 없는 곳에 떨어져 덜덜 떨며 나를 태우러 올 차를 기다리는 것도, 내 실적에 따라 차갑게 변한 사람들의 태도를 견디는 것도, 눈치 봐가며 라면을 끓여먹고 말할 때마다 잔소리를 한바가지씩 얻어먹는 것도, 다리가 끊어질 것처럼 아프고 허리고 저렸던 것도, 보이지 않는 노동을 하느라 인간적이기보다는 자기 기능을 하는 것으로 족한 인간으로 자리를 지킨 것도 괜찮았다. 그 모든 게 괜찮았다.

 그런데 지금은 왜 이럴까. 왜 권태롭다고, 울적하다고, 힘들다고 징징댈까. 내가 정말 하고 싶었던 건 어떻게 된 걸까. 정말 하고 싶었던 게 있었을까. 뭔가를 하고 싶다는게 그렇게 중요한 일이었나. 어쩌면, 어쩌면. 하지만 이젠 그 ‘하고 싶음’에 안부를 구할 수도 없다. 진즉에 현실도피, 채무 불이행 딱지를 붙여버렸으니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진심을 다해서 매달릴 정도로 하고 싶었는지도 의문이다. 

  이곳에는 현상유지하면서 근근히 살아가는 게 목표인 사람들로 넘쳐난다. 나만은 그러지 않을거라고, 나는 다른 사람들이랑 좀 다를거라고 생각해왔다. 상사의 눈치를 보고 업무 평가를 잘 받기 위해 살살 꼬리를 흔드는 짓은 내 적성에 안 맞다고, 어영부영 시간을 축내는건 너무 억울하다고, 퍼즐 조각처럼 제자리를 찾아야만 제 구실을 하는 사람은 되기 싫다고 줄곧 생각했다. 지금 와 생각해보니 그들만큼 잘해내는 것조차 어려울 따름이다. 월급은 일에 대한 대가가 아니라 실종된 인간성에 대한 일종의 위로금이었다. 
 

 오랜만에 소라닌을 펼쳤다. 예전에 이 만화를 봤을땐 유화 같은 감상평이 떠올랐다. 몽롱한 목소리로 맞아, 나도 그랬어. 아, 돌이켜보니 내 마음도 그랬구나. 덧칠한 물감처럼 감상 또한 덕지덕지 늘어졌다. 그런데 다시 읽은 소라닌은 수채화처럼 투명하다. 덧칠을 해도 계속 밑그림의 연필선까지 보이는 수채화처럼 말이다. 수채화의 투박한 연필선에선 한때나마 꿈꿀 수 있어서 행복했던 시절, 그러니까 지금 내겐 ‘없는’ 순간들이 보였다. 

 물론 없어진게 꿈만은 아니다. 이 자리를 박차고 자유롭고 맘 편하게 살려는 의지도 없고, 막상 박차고 나가면 먹고 살 일자리도 없다. 이 일 하나 제대로 하는 것도 벅차 다른걸 해볼 엄두도 낼 수 없다. D와 전화 통화를 하다 ‘없다’에 이르러 푸르르 웃고 만 건 그녀 말처럼 정말 없어서였다.

 어린 나이의 유치함과 고지식함, 뜬금없는 유쾌함과 미칠 듯한 열망은 냉동 피자가 상온에서 녹듯 질척거리는 감정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단 하나, 앞으로 어떻게 될지 아무것도 모른다는 -물론 어렸던 나를 뺀 대다수의 사람이 내가 하는 행동, 싹수, 평소에 뭘 하고 돌아다니는지, 계급 등등을 포함해서 내가 어떻게 될지 ‘확실히’ 짐작했겠지만- 사실 때문에 그렇게 반짝였던거였다. 그래서 젊은 날은 감자에 생긴 독, 소라닌처럼 아렸던거다. 지금 내가 갖고 있는 감자는 독기가 빠진 채 푸르딩딩 늙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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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0-11-28 1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에겐 그 모든것들이 처음부터 없었던 것 같아요. 내가 한 직장에서 오래 근무하고 좀처럼 일터를 바꾸지 않는것은 내게 그런것-꿈이라든가 열정이라든가 하는-들이 없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인 것 같아요. 어쩌면 그래서 이 직장을 마구 힘들지도 않고 마구 좋지도 않은채로 견뎌낼 수 있는건가봐요. 만약 무언가 하고 싶은 다른 일이 있었다면 더 힘들지 않았을까 싶어져요.
최규석이 [대한민국 원주민]에서 자신은 욕망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살기 편했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어요. 저도 그걸 보며 고개를 끄덕였던게 전 애초에 욕망 자체가 없었기 때문인 것 같아요. 꿈을 실현하는 사람보다도 제게는 꿈을 가진 사람 자체가 더 대단해 보여요. 그들은 대체 꿈을 어떻게 찾았을까?
감자독이라니,

아치는 고구마 키우는 여자사람이잖아요!

Arch 2010-11-28 13:46   좋아요 0 | URL
나도 없는데요. 뭘~

저도 그 구절 기억나요. 나도 그렇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만약 돈이 생긴다면, 혹은 다른 만약에에서 사고 싶은게 뭉게구름처럼 피어나더라구요. 욕망이 없는게 아니라 없는척 해왔거나 모른척 했다는걸 알았어요. 꿈이나, 열망, 의지도 마찬가지겠죠. 결국 어느 지점에 다다르면 어느 한쪽을 포기하게 되겠죠.

다락방과 함께라면 왠지 꿈 없이도 잘 살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러니까, 난 고구마(집을 떠나며 결국 화분에 버려졌지만) 키우는 여자사람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