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데거를 전공한 근엄한 교수는 아내가 아닌 어린 정부의 집에서 하루 종일 <우먼센스>를 탐독한다. 말러 음악을 최고라고 생각하는 한 고전음악 애호가는 심수봉의 목소리를 모창하는 것으로 유명해진 트로트 가수를 정부로 두고 있으면서, 그녀와 함게 하루 종일 트로트를 듣는다. 집안에서는 물론이고 몸에 해롭다는 커피를 어느 장소에서도 마시지 않는 어떤 남자는 애인의 집에 들를 때마다 커피를 청해 마신다... 등등의, 이런 이중적 행동은 하나도 이상하지 않다. 남편이 아내에게 (혹은 아내가 남편에게) 하는 행동과 정부에게 하는 행동이 전혀 틀리는 것은 흔히 관찰된다. 그래서 결혼한 친구가 숨겨 둔 애인을 데리고 와서 우리에게 보여 줄 때나, 그 관계가 우연히 목격되었을 때 우리는 "뭔가 언밸런스하다"는 느낌을 자주 갖게 된다. 하여 충고랍시고 그 친구에게 "네 타입이 아니야!"라고 말해 준다. 하이데거를 전공한 교수나 말러만을 듣던 고전음악 애호가 또는 저대 커피를 마시지 않는다던 어떤 사람이 그렇게 돌변하는 것은 원래 인간이 다중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결혼이란 하나의 자아, 그것도 서로 견딜 수 있는 하나의 자아만을 서로 보여 주고, 또 받아들이기로 한 타엽(연기)의 산물이다. 

 그러므로 결혼 생활이 서로에겐 속박이 아닐 수 없고, 그 생활이 갑갑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이치다. 한 인간 속에 깃든 다중적 자아를 한 사람이 다 맡아 보살펴 주면 다행이겠지만, 예를 들면 한 명의 아내가 어머니. 누나. 여동생. 소꼽 친구. 비서. 간호사. 창녀...(점점, 이 무슨 코스프레?)가 되어 남편의 다면적 자아를 모두 어루만져 주면 좋지만, 다면체로서의 남편을 파악하는 일도 쉽지 않을 뿐 아니라 혼자서 그 모든 역할을 다 감당하기란 너무 힘든다. 정부란, 애인이란 그 사람의 또 다른 자아를 분출하고 실현하는 곳이다. 가진 거라고는 돈밖에 없는 재벌 회장님이 빈민가의 옥탑방에 방을 얻어 놓고 정부와 몇 시간씩을 보낸다면, 나는 그게 무슨 뜻인지 알겠다. 집안에 미스 코리아를 모셔 둔 남편이 곰보딱지의 못난 여자와 몰래 데이트를 한데도 나는 웃음 지을 수 있다. 아내는 물론 가족과 친지로부터 "인간도 아니야!"라고 매도되는 그 남자들, 그 남자들을 이해한다. (여자라도 물론이다.) 

 당신 남편 혹은 아내의 정부는 당신 배우자의 또 다른(억눌린) 자아를 보살펴 주는 해방자다. 남편은 아내와 정부를 넘나들며 자신의 다중적인 자아에 젖을 먹인다. 그게 일부일처 사회에서 빈번히 일어나는 바람의 정체다. 재미있게도 바람을 피우는 배우자가 아내나 남편에에게 들키게 되는 것도, 그가 지금까지 보여 주지 않았던 전현 낯선 흔적을 어저다 남겨 놓기 때문이다. 그것이 단서다. 

 글을 마치자. 나는 이 재미없는 글을 통해, 바람 피운 남자가 아내에게 잘해 주는 것은 '죄책감'을 상쇄하고자 하는 보상심리 때문이라는 일반적인 상식을 공박하고자 했다. 물론 그것이 보상심리를 포함할 수도 있지만, 이제는 다른 해석도 허용되어야 한다. 억눌려 있는 또 다른 자아가 마음껏 뛰놀며 물을 마시고 풀을 뜯었으니, 지금 그 사람은 행복한거다. 그래서 부드러워지고 여유만만해진 것이다. 그러니 아내에게 잘해 줄 수밖에. 김수영의 어떤 시 한 편은(귀찮아서 찾지 않는다.), 바람을 피운 혹은 정부를 둔 한국 남자들이 가진 일반적인 심리상태를 포착하고 있는데, 그 시를 통해 추출할 수 있는 한국 문화의 특징은 '주눅듦'이다. 한국인은 대체, 정부를 지니고도 마냥 즐거워할 줄 모른다. 천진난만 즐겁기는커녕 마음 한 켠에 배우자에 대한 죄의식과 보상심리만 잔뜩 키운 채, 그걸 사리처럼 짊어지고 있다. 바람을 피우고 안 피우고를 떠나,

왜 사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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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gettable. 2010-06-05 1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쭉 정독하다 보니 급 우울해 집니다요. 왜사는지 모르겠다 ㅠㅠ
이론은 쉬운데 관계는 쉽지않죠. 주역 배울때 선생님이 맨날맨날 바람피우라고. 상대방도 바람피게 냅듀라고 하셨는데 성공한 적이 난 있는데 상대방을 냅두는건 매번 실패하더라고요.

Arch 2010-06-08 10:17   좋아요 0 | URL
나도나도. 나는 성공했는데(죄의식도 없었다구요!) 늘 의심하고, 사건 조작하고, 시나리오 작성하고 그래요.

Forgettable. 2010-06-08 11:56   좋아요 0 | URL
시나리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ㅠㅠ

뷰리풀말미잘 2010-06-05 2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서민을 위한 정부가 필요한 것이죠!

Arch 2010-06-08 10:17   좋아요 0 | URL
피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