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옥찌가 무슨 말 끝에 또 누구 얘기를 하며 편지를 쓰겠다고 했다. 순간 울컥해서 서운하단 얘기를 오뉴월 엿가락처럼 늘어놨다. 옆에서 밥 같이 먹고, 얼굴 트지 말라고 로션 발라주고, 옷 입을 때 예쁜지 아닌지 의견 보태는 나는 뭐냐고도 물었던가, 꿀꺽 삼켰던가. 창피했다. 나이를 먹었어도 사발 몇천개는 더 먹었는데 꼬마에게 서운하다고 투정부리는 꼴이라니. 게다가 곁에 있고 챙겨주면 맘도 기운다는 착각은 어쩌란 말인가.

 옥찌는 울면서 (에휴, 몹쓸 이모 같으니) 내 말을 들었다. 민은 자꾸 내게 안기며 자긴 큰 이모가 참 좋다고 입에 침 바르며 연신 말했다. 나는 아이들의 불안을 이용하고 있었다.

 옥찌들과 같이 있기 전에 만약 내가 엄마였다면 절대 안 했을거라고 믿었던 일들이 있었다. 매를 든다던지, 아이의 말을 끊고 지금 해야할걸 말한다는지, 아이가 원하는 것보다 아이에게 필요한걸 양육자가 알아서 제시한다든지 하는 것들. 그런데 내가 그러고 있다. 차분하게 대할 수 있는 것도 화가 날 때면, 행여 누군가의 습벽을 아이들이 물려받을까 지레 겁먹을 때면 적정한 수준을 넘어서 아이들을 혼낸다. 가끔은 너무 피곤해 이유 없이 아이들에게 짜증을 내기도 한다.

 옥찌는 자기 일은 알아서 잘 하고, 민 역시 조금만 도와주면 되는데 나는 왜 이렇게 피곤하고 지치는지 모르겠다. 아이들의 일과 뿐 아니라 그들의 감정과 행동까지 받아주기만해서 이렇게 지치는걸까. 한달 넘게 감기다. 이게 무슨 감기인가, 감기가 체질이 된 것 같다.

 양육에 대한 책에선 항상 같은 말을 한다. 경청하라, 아이의 창의력을 복돋아줘라, 좋은 습관은 양육자로부터 나오니 모범을 보여야 한다, 아이의 말을 끝까지 들어라, 구체적이고 명확하게 칭찬하라, 그리고 기타 등등 여러 가지 말들, 명령처럼 들리는 말들이 토씨 하나 안 빼놓고 써있다.

 책을 볼 때면 내게 98%쯤 모자란 양육자로서의 자질에 대해 생각한다. 양육자를 사람이라기보다는 모든 것에 통달한 성인쯤으로 보는 것에 분통이 터진다. 아이의 감성과 활동은 양육자로 인해 지지를 받는다 치자. 그렇다면 양육자는 어디서 지지를 받고, 자긍심을 느낄 수 있을까. 아이가 좋은 대학쯤 가줘야 양육자의 입장이란게 비로서 빛을 발하는걸까. 그건 너무 치졸하다.

 내가 아이를 안 보고, 집안일을 안 하면 된다. 그럼 이런 씨잘데기없는 고민은 처박아두고, 좀 더 신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럼 아이는 누가 보고 집안일은 누가 하지? 서로 미루다 결국 엄마가 하게 될 것이다. 엄마는 나보다 몇 배는 피곤한데.

 아이들은 변덕을 잘 부린다. 소란스럽고, 한순간도 가만히 있지 않는다. 가끔 아이 속에 점프 능력이 뛰어난 뭔가가 있어 아이를 충동질 하는게 아닐까란 생각이 들 정도로. 자는 아이는 세상에서 가장 예쁘다. 다행히 옥찌들은 내가 지어낸 엉터리 얘기를 들으며 깔깔대고 웃다가 '일찍' 잠이 든다. 아이들 잠들 때까지 야근하다(웃겨!) 오늘도 곧 퇴근이다.

 내가 아이들을 돌보는 게 아니라 같이 사는거다, 같이 살면서 부족한 부분을 서로 채워주는거다. 수천번 맘을 먹어도 맘처럼 되지 않는 하루를 지켜보면 내게 모자란건 양육자로서의 태도라기보단 괜찮은 인간성과 사람을 대하는 따스한 시선이 아닐까란 생각이 든다. 인성이 모자란 이모를 둔 덕분에 옥찌들은 가끔 나로선 생각할 수 없는 말과 행동을 보여준다. 그럴 때면 옥찌들 덕분에 내가 자라는건데, 나는 못난 이모답게 자라기 싫다고 떼쓰고 있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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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큐리 2010-05-11 1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아치님은 잘하는 편이신거 같은데요..ㅎㅎ 저는 애들 기르는 이야기를 페이퍼로 쓰면 공적으로 몰릴 것 같아 쓰기도 무서워요...

Arch 2010-05-13 10:39   좋아요 0 | URL
머큐리님이 잘 몰라서 그래요. 머큐리님 귀여워요. 앗흥 ^^

비로그인 2010-05-11 14: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벌써부터 이 작은 생명체 앞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어요.
액션과 리액션, 피드백을 제가 계산하지 않는다는 것도 이제야 알았구요. 이전엔 정말 나름 생각하고 행동하는 줄로 착각했다는 뜻이죠.
그러나, 그러나, 그러나, `같이 산다'는 이 멘트가 너무나도 참신해요. 이렇게도 동등한 관계로 아동을 바라보는 단어는 참으로 오랜만인 듯 합니다.

Arch 2010-05-13 10:41   좋아요 0 | URL
전 쥬드님이 잘 하실거라고 믿어요. 쥬드님 안에는 바다를 포용하고도 남을만한 것들이 가득 채워져 있을 것 같아요. 글 보면 안다니까요.
같이 산다는게 맞는데 맨날 내가 키우는줄 알아요. 옥찌들 입장에선 '같이 못살겠네, 이모' 정도가 될런지.

비로그인 2010-05-13 12:32   좋아요 0 | URL
for Arch님
아치님 아치님 아치님 바다가 아직 만으로 두 살 밖에 안되었다는 것을 간과하지 마시옵길. 자식이 부모에게 하는 효도는 세 살 까지가 전부라지요. 세 살이 넘어 본격적으로 자기 의견을 말로 소통할 때가 되면 효도는 끝입니다.(물론 지나가는 말이옵지요)
옥찌들은 절대 그런 생각 안할 겁니다. 아치님이 `같이 사는' 것이라는 말을 쓴 이상, 얼마나 그들을 존중하려 노력하는지가 보이니까요.(이런 자각은 아무나 할 수 없을 거란 생각이 들어요. 보통은 자신의 `소유'로 은연중에 많이들 생각하지 않던가요!)

穀雨(곡우) 2010-05-12 1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들의 변덕은 손에 쥔 아이스크림같아요. 녹을까 못내 아쉬워 살살 돌려 녹혀 먹다 어느새
흘러 내리는 것처럼 말이죠.
요즘 전 딸래미랑 대립이 하늘을 찌릅답니다. 이게 아닌줄 알면서도 분해하는 나를 보면 사는 게
뭘까하는 자괴감까지 든다면 너무 심할까요..^^ 그런 일상을 매일 반복하는 옆지기가 때론 우러러
보인다는...ㅋㅋ

Arch 2010-05-13 10:45   좋아요 0 | URL
변덕에 대해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는거로군요!
그런데 정말 아이들과 사는건 자기 인성을 점검하게 만들고 나아가 과연 삶이란 무엇인가란 물음에까지 이르게 하는 심오하고, 별난 경험이랍니다.(유먼데 이래요.)

요새 집안일에 대해 많이 생각해요. 모든 엄마들은 위대하다란 수사 안에 갇힌 희생과 저평가된 노동력, 전문적이지 않은 일 등등. 그런데도 필요해서 누군가는 해야할 일이란 것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