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민이 어린이집 데려다주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자전거를 타고 있었는데 가던 방향에서 뒤를 확인 하지 않고 횡단보도를 건넜다. 차소리가 안 났고, 모자를 쓰고 있어서 뒤돌아보기 귀찮았던거다. 아뿔사, 바로 뒤에서 따라오던 오토바이가 있었고, 하마터면 부딪칠뻔 했다. 미안해서 어쩔줄 모르겠어 가만히 서있는데 오토바이 운전하던 사람이 욕을 하고 지나갔다.
-씨발년이 진짜 확
깜짝 놀라서 그 사람을 쳐다봤다. 그 사람은 나를 지나치면서, 신호가 떨어진 교차로를 지나가면서, 그리고 좀 더 멀어질때까지 계속 나를 쳐다봤다. 나는 아무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차들이 경적소리만 내도 불끈거리며 욕지거리를 해대던 내가 꿀먹은 벙어리처럼 가만히 있었다.
내가 잘못한게 맞다. 도로를 건널 때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고, 머뭇거리느라 사과할 타이밍도 놓쳤으니까. 하지만 대놓고 욕을 하는건 심했다. 그 사람은 내가 자기를 따라가서 같이 싸우지 않을걸, 같이 욕하지 않을걸, 막상 싸우더라도 얻어터지기만 할거란걸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아무말도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 잘못치고는 네 반응이 과하단 항의도, 같이 대들지도, 내가 화났다는 표시도 내지 못했다. 남자가 화난걸 내게 풀까봐 무서웠기 때문이다.
난 병신같고, 재수없었다.
만일 내가 잘못을 안 했는데 아무 이유없이 욕을 먹었더라도 나는 가만히 있었을까. 아마도. 욕을 하고, 싸우는걸 한번도 해본적이 없었기 때문에. 통제되지 않은 상황에서 누가 힘이 더 센지는 싸우기 전에도 분명히 알 수 있으니까.
오만가지 생각이 났다. 자전거를 끌고 다닌다고 교통비도 절약되고 얼마나 좋냐고 나불댔던 입을 꼬매고 싶었고, 나 나름대로는 그래도 이만큼 용기내서 살아가는 것도 대견하네 어쩌네했던 생각도 수정하고 싶었다. 옥찌들한테만 큰소리치고 나보다 힘센 사람 앞에선 아무 말도 못하는 비겁함에 치가 떨렸고, 세상이 내 맘대로 돌아가는 것처럼 오만했던게 폭폭했다. 나는 나를 조금씩 안다고 자신했지만, 결국 내 틀에서 반발자국도 못미쳐 정체가 드러나고 만거다.
정말 어처구니없게도 온갖 생각 가운데 정말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있었다. 결국 여성주의 공부를 해도 소용없다는 것, 그 사람이 내 얼굴과 자전거 모양을 보고 나중에 복수하면 어떡하지란 것, 내가 하는 모든 행동들-자전거 타기조차-이 같잖아지는 것, 내가 바뀌고, 세상이 조금씩 바뀔 수 있는 방법은 책을 읽는 것보다 차라리 쌈질을 배워서 싸움을 하고 다니는게 더 낫지 않을까라는 것 등등. 정말, 그러다 한대 맞기라도 했으면 생각은 이보다 더 터무니없이 날뛰었을거다.
잘 아는 언니가 있다. 남자 친구들한테 맞은 얘기를 하길래, 정말 무식하고 폭력적인 질문을 하고 말았다. 왜 맞았냐고. 그건 곧 난 안 맞게 눈치를 잘 보는데 왜 넌 맞냐는 질문이기도 했다. 언니도 안단다. 어느 지점에서 말을 멈춰야 여남 관계의 허구적인 틀을 유지하면서 매끄럽게 싸움이 종료되는지를. 하지만 자신은 멈추지 않았단다. 계속 자극했고, 이러다 맞을 수도 있겠구나, 그러다 죽을 수도 있겠구나란 생각이 들었지만 같이 싸웠단다. 지금 이 순간 나는 무엇보다 그렇게 싸운 그 언니가 부럽다. 그 언니는 끝까지 가봤다. 맞을까봐, 험한 꼴 당할까봐, 무수한 핑계를 제쳐두고 죽을때까지 같이 싸웠다.
나는 끝까지 가지 못했으니까 아무말도 해선 안 된다는 말은 아니었지만, 왠지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