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리를 하고 있었다. 다들 언제쯤 자리에서 일어날지 눈치를 살피고 있는데 동석한 커플의 집에 놀러간다고 우겨댄건. 예의바르고 모범적인 그들은 아치의 지난 음주 실력에 비해 술이 늘었다는 우스개소리를 하거나 부페 음식치고 맛있는건 없다는 식의, 무난한 날씨 얘기만 하고 있었다.
예상치 못하게 시간이 한토막 날아가버린 날. 두토막의 시간이 사라졌다면 집에 가서 잠을 자거나 원대한 계획이었으나 반년 넘게 다짐으로만 그쳤둰 미룸 목록을 처분할 수 있을텐데... 반토막이라면 지나가는 사람들 구경으로 소일하며 보냈을텐데... 이 한토막이 문제다.
나는 당장 전화를 해서 불러낼 수 있는 친구들의 목록을 머릿 속에 떠올려봤다. 누군가의 시간을 메우기 위해 호명되는건 별로라는걸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난날 나는 꽤 많이 한토막의 시간에 친구들에게 연락했고, 그들도 아낌없이 나를 불러냈다. 그들의 면면과 아주 흡족할 정도로 보고싶은 맘은 아니란게 떠올르자 열의는 금세 사라졌다.
아무도 나를 알아볼 수 없는 조용한 모텔에서 쉬는건 어떨까. '조용하고 한적한'에서 모텔이 아닌 호텔을 떠올리는건 부르주아를 동경하는 중산층의 호기로 본다고 하더라도 왠지 자연스럽게 어떤 지위를 떠올리게 하는 연상을 하는건 좀 부럽다. 모텔의 제각각 조명 아래서 할 수 있는거래야 텔레비전이나 영화보기가 다일테니 더더욱.
토막난 시간. 삐뚤어져보고 싶었다. 술을 진탕 먹거나 피부 각질층이 떨어져나갈 정도로 음식을 많이 먹는 것. 숨이 찰 때까지 달려보거나 음악을 아주 크게 틀어놓고 고함을 빽빽 질러보는 일. 그리고, 그리고. 대체 왜 그래야하는지를 설명할 수 없는 짓을 해보고 싶었다.
모임이 끝나고 풀이 죽어 옥찌들과 집으로 걸어오고 있을 때였다. 다른때라면 자기 정말 다리 아픈데 어디까지 가느냐고 따져물을 옥찌에, 탱탱볼처럼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는 민 때문에 정신이 없었을텐데 오늘은 그냥 좀 그러려니, 그렇게 지나가려니 하고 있었다. 아이들은 잔소리 없는 이모를 이리저리 훑어보더니 아직은 심하게 상태가 나쁘지 않다는 것을 확인한 후 자기들끼리 재잘되기 시작했다. 옥찌는 가끔씩 내게 몸을 돌려 생일 때 고모가 크림이 잔뜩 묻은 딸기 케익을 만들어준다며 자랑을 하거나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게 뭔지 아느냐며 나를 자꾸 찔러봤다.
귀찮고 피곤해서 건성으로 응응. 내 손을 잡고 재잘거리는 입을 보지도 않고 응응, 아주 오랫동안 응응.
그런데도 옥찌는 내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 이모, 오늘은 정말 좋은 것 같아. 맛있는 케잌을 아주 많이 먹었잖아. 이모도 좋았지
그제서야 나는 내 한토막의 시간이 어디로 간건지 알게 되었다. 다른 때였다면 잔소리하고 의욕한 질문들로 건성이었던 옥찌와의 대화가 내가 어쩔줄 몰라하는 사이에 달라져 있었다. 그러고보니 예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던 것 같다.
지치고 힘들어서 옥찌들 어깨라도 빌려 엉엉 울고 싶은 때였다. 울어버리면 바보 이모라고 옥찌들이 놀릴까봐 울음을 꾹꾹 참으며 민과 얘기를 하고 있었다. 내가 듣고 싶은 이야기나 해야할 일을 점검하는 대화가 아니라 지금 이 시간을 견디는 방법으로 주고받는 이야기. 민이 이렇게 다양한 표현을 할 수 있는 아이이고, 먹을 것에 대한 묘사를 정말 최고로 잘할 수 있는 녀석이란걸 이전에는 결코 알 수 없었다.
가끔씩 토막난 시간은 이전과는 다른 패턴의 관계를 보여준다. 아주 가끔 찾아오는 순간, 나는 아주 충실히 내 곁에서 노래 부르고 통통 발을 구르는 옥찌들에게 귀를 기울여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