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많이 왔다. 옥찌들이랑 도서관에 갔다. 오는 길에 눈싸움을 했다. 옥찌들이랑 난 눈을 단단하게 뭉치거나 바닥에 덩어리진 눈을 들어서 던지고 도망쳤다. 작은 손들이 기껏해야 내 엉덩이 부근에 눈을 던질 뿐이니 나로선 그다지 스릴 넘치진 않았다. 아이들이 추울까봐 옷에 맞도록 하기 때문에 차가워 어쩔줄 몰라하는 표정도 못보니 흥도 나지 않았다. 하지만 잔뜩 신이나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눈을 가지고 해볼 수 있는 모든걸 해보려는 듯이 의욕 충만한 녀석들을 보니까, 신나는건 전염되는지 나도 어쩔줄 몰라하고 있었다.
집에 거의 도착할 즈음, 옷에 묻은 눈을 털어내면서 옥찌들에게 이제 눈싸움은 그만 하자고 말했다. 민은 차렷 자세로 충성을 맹세했고, 옥찌는 시큰둥하게 내 뒤를 따랐다. '이제 그만'엔 별다른 의미가 없었다. 옷을 털었고, 이제 곧 집에 들어가야하니까, 놀이는 이제 그만해도 되겠단 의미 정도였다. 하지만 옥찌가 내 뒤를 따라오다 눈을 갖고 장난치는걸 보자 '이제 그만'의 의미가 부풀려졌다.
A는 충동적이다. 그 아이의 충동적인 성향이 대체 뭐 때문인지를 생각해본적이 있다. 어렸을 때 A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욕구불만이었던 상태가 있었을까, 아니면 일관성없는 부모의 태도 때문일까. 뭔가를 당장 못사면, 당장 술을 못 마시면, 뭔가를 뭔가를 앞에서 A의 충동은 갑작스러웠고, 그 아이 스스로도 자신을 통제하지 못했다. 옥찌들이 설마 A를 닮는건 아닐까. 나 자신도 어느 때의 게으름과 늘어지고 싶음, 몸을 함부로 훼손하고 싶은 느낌에 어쩔줄 몰라하면서 늘 A의 정도는 심각하고 일탈적으로 느껴졌다. 결국 집에서 어떤 위치와 발언권을 갖고 있느냐의 문제인지도 모르는데. 나는 옥찌에게서 A의 일면을 본 것 같았다. 내가 보기엔 이제 놀만큼 놀았으니까 그만해도 되겠다 싶었고 민도 괜찮아 보였는데 옥찌만 다시 눈을 만지자 커서 A처럼 되지 않을까란 생각까지 해버린거다. 그냥 눈을 더 가지고 놀고 싶은 아이일 뿐인데.
집에 와서 옥찌에게 왜 다시 눈을 가지고 놀았냐고 물었다. (이런 멍청한 질문을 하다니)
- 눈을 나 혼자 맞고 싶어서.
흩날리는 눈을 자기한테만 뿌려주고 싶었다는 옥찌. 옥찌가 이상한 이모 만나서 고생이 많다.
며칠 전 송년회를 하려고 집 근방 술집에서 사람들을 만났다. 가까워서 자전거를 끌고 갔다. 쥐포 튀긴걸 사정없이 먹고, 얼음물이며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노래방 커밍아웃한 사람도 아닌데 요샌 술 먹으면 무조건 노래방이라며 고집을 피워 사람들을 모두 끌어들였고, 목이 아플 정도로 노래를 불렀다. 다들 고민 많은 연말이라 그런지 놀기보다는 나가서 고민 얘기를 했지만 나와 말쑥한 청년 하나는 노래가 너무 좋아 노래방에 살지요 포스로 부지런히 노래를 불렀다. 왔다갔다 하던 사람들도 끊기자 흥도 안 나고 '어디 너네가 얼마나 부르는지 한번 보자'란 식의 주인 아저씨의 서비스 정신으로 거의 2시간 넘게 노래를 불러 더 이상 소리가 나오지 않아 아쉽지만 밖으로 나왔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얼마나 내렸는지 바닥은 온통 빙판이었다. 난 썰매 탄다고 사람들한테 손 잡아달라고 조르고, 눈맛 좀 보라며 사람들한테 눈을 던지고 다녔다. 연말이래도 이런 아치 꼬라지는 그만 보겠다며 사람들이 슬슬 집에 가고, 나도 아쉽지만 집으로 가려고 자전거를 갖고 왔다.
노래방의 말쑥한 청년은 자전거를 보더니 '누나 한번 타보면 안 되냐'고 물었다. 누나란 말이 달콤해 눈이 와서 위험하긴 했지만 그러라며 자전거를 내줬다.
호기롭게 페달을 굴리는 말쑥한 청년. 반코트 사이로 얼핏 보이는 늘씬한 다리와 가냘프지만 든든한 뒤태의 청년. 자전거를 제법 잘 끌고 가는 청년. 맞바람에 뒤뚱거리며 조금은 힘겨워 보이던 청년. 차를 피해 페달을 굴리다 어어 하는 사이에 콰당 미끄러진 청년, 아퍼 죽겠는 표정인데 정신없이 자전거를 들고 막 뛰는 청년. 청년의 뒤에서 한 무리의 아주머니들의 깔깔 웃음 소리와 그 정도 소리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엄청 크게 웃어제끼는 아치의 웃음 소리.
나도 '사랑스러운 뽀'처럼 눈 오는 날이면 생각나는 까마득하게 아름다운 추억 하나쯤 갖고 싶다.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