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분을 만났다. 

 언제 집에 와서 따뜻한 밥을 먹이고 싶다란 댓글을 남겨준 분. 짧은 글이지만 맘을 선선하게 해주는 분. 댓글로 페이퍼만한 생각들을 잘 털어놓던 분.  

 처음에 밥을 먹자고 했을 때, 아마 난 '내가 그런 말을 놓칠리 없다는 것을 간과했던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정말 예의상 한말이라 그냥 놓쳤음 했을지도 모를일이니까. 그래서 다시 조심스럽게 여쭸더니 그분은 정말이라며 선뜻 손을 잡아줬다. 아마 깜빡했다고 실토했다면 상당히 무안했을 상황이었다. 그녀 혹은 그. 언니 혹은 오빠, 동생으로 부를 수 있지만 난 그저 그분이라고 부르려고 한다. 왜 굳이 그분이라고 하는지는 글 말미에 밝혀질 것 같다. 이런식으로 끝까지 읽으라고 협박하는 치사한 아치! 

  마루야마 겐지는 '소설가의 각오'에서 자신은 CD로 녹음된 음악이 더 좋다란 얘기를 하며 콘서트의 번잡스러움과 변수들, 생방송의 혼잡이 '생생함'으로 상쇄되는게 별로라고 덧붙였다. 적절할지 모르겠으나 나에게 서재는 어쩌면 CD에 녹음된 '그 사람의 얘기' 같다란 생각이 들었다. 알라디너는 완결된 카테고리에 차곡차곡 채워지는 자신과 책, 음악, 영화, 그 밖의 이야기들을 씨줄과 날줄로 포개서 서재를 꾸민다. 누군가가 맘만 먹으면 어느 한 사람을 세심하고 사려깊게 들여다볼 수 있을 정도이다. 서재를 가진 사람은 적어도 몇분간은 글을 쓴다며 골몰하고, 쓴 글을 다시 읽어보고, 기존의 방식과 다른지, 지금과는 어울리지 않는 인격이 발현되고 있는지를 확인해볼 수 있는 시간적 여유와 완성도를 향한 경미한 강박증이 있고, 글을 보는 사람 역시 마찬가지니까. 그렇기 때무에 굳이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이미지를 나누지 않더라도 보여주고 싶은 것과 봐버리는 것, 행간의 의미와 눈빛이 마주칠 때 갖게되는 사람에 대한 판단은 다를 수 밖에 없다.  

 나로 말하자면 직접 콘서트장에 가기보다는 CD로 음악을 듣거나 콘서트 실황중계를 더 좋아한다. 현장의 미세한 숨소리와 연주자의 표정, 공간 안에서 내가 느낄 수 있는 질감도 좋다. 하지만 그것보다 좀 더 집중해서 음악을 들을 수 있고, 비싼 값을 주고 듣는다는 부담을 과잉 감동으로 포장하는데 거부감이 더 컸던 것 같다. 마찬가지로 정말 좋은 서재를 만나면 그 서재의 글들을 차근차근 읽어보거나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란 생각을 떠올리는게 내편에선 직접 대면하는 것보다 산뜻할 때가 많다. 막상 보면 어색함과 어긋남으로 대화는 브레이크가 걸리거나 엔진 과열로 유야무야되는 경우가 많이 있으니까. 게다가 페이퍼로 서로 알아버리는 것과 다시 알아가는 사이에서 헤매다 결국은 '그거 페이퍼에 쓴건데.'란 맥빠지는 소리만 해대기 일쑤고, 막연한 기대감이나 상상보다 적확하게 떨어지는 어떤 인물로 규정짓는 순간 서재마저 정이 떨어지는 경우도 종종 있어왔다. 물론 그 사람을 만나서 사람 자체의 좋음으로 서재마저 좋아진 경우도 있었으며 이젠 행간의 의미를 상상하는 것에서 나아가 므흣하게 짐작할 수 있다란 점이 좋을 때도 있다. 이렇게 써놓고보니 꽤나 누군가를 잘 만나고 다녔던 것 같지만 독서 모임과 '그녀'와의 만남 이외에는 별일 없었다. 괜히 비 온다고 부러 부러 거창해지는게 조짐이 안 좋다. 조짐은 종종 조증에서 울증, 울증에서 조증으로 넘어갈때의 미묘함이 적확했음을 확인됐을 때처럼 적확할때가 많지만. 

 요즘들어 누군가를 꾸준히 만났다. 누구를 만나든간에 했던 얘기를 울궈먹다가 자신의 논리나 감성에 충실하지 않은채 나뒹구는 말들을 막 주워삼키는 패악을 저지르고 있는 중이었다. 반백수라 시간이 많을거라며 자신들이 어렵게 낸 시간에 날 보려는 성은을 내가 거절한다는 것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하는 인간들이 많았으며 어렵게 낸 시간을 서로가 그다지 충실하게 보내지 않았으며 그렇다고 우리들이 의기투합해서 재미있는 일을 도모할 유형의 인간들도 아니었다. 느느니 뱃살이요, 쉬어지니 한숨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별일 없이 누군가를 만나고, 술을 먹고, 얘기를 하고, 다시 했던 얘기로 돌아와 물고 늘어지기를 반복, 재탕, 섞어서 섞어찌개를 만들던 중에 

 덜컥, 그분과도 약속을 하게 되었다. 

 적당히 재미있는 얘기를 하다가 돌아와야지. 다른 때라면 뭘 선물할까, 무슨 얘기를 할까, 정말 내가 상상한 이미지가 맞을까라며 온갖 설레발을 쳤을텐데 만남 자체가 흔해지고 먹고 사는게 고단해지다보니 평소보다 허술했고 소홀했다.  

 그분이다. 1번 출구에서 나를 씩씩하게 맞아주는 사람. 이런 저런 인사치레 없이 우린 곧장 그 분이 이끄는 곳으로 이동했고, 그곳보다는 다른 곳이 좋지 않겠냐는 내 제안에 다시 방향을 틀어, 거리로 쏟아져 나온 사람들 틈을 비집고 걸었다. 내 눈앞에서 그 분의 뒷모습이 아른거린다. 쓱쓱 사람들을 헤치며 유영하듯 움직이는 모습. 사람들이 각자 떠들며 동네를 들었다 놨다 하는 것에 아랑곳없이 앞으로 나가는 그 분을 보니 걸음이 빨라진건 둘째치고 다시금 오늘 우린 왜 만났을까란 의문이 들었다. 이 사람이 다시 보고 싶었을까? 아니. 심심했나? 아니. 보자고 했으니 본거야? 글쎄. 정말 글쎄. 우린 왜 만났을까. 의문은 의문대로 사람들이 자아내는 소음 속으로 사라지고 난 그분의 빠른 걸음을 좇느라 정신이 없었다. 

  매운 연기를 맡으며 갈매기살을 먹고선 자리를 옮겨 냉동 감자 튀김에 맥주를 마셨다. 검은 눈동자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곧장 내게 꽂힌다. 빤히 쳐다보는 눈길에 대해 그 분에게 얘기를 해보았다. 그분은 조금 이상할 수 있지만 버릇이란 얘기를 했다. 이상한 것도 불편한 것도 아닌데 그분의 눈이 내게 꽂히는 순간, 난 서툴게 무슨 이야기를 하던가 그에게서 어떤 이야기를 받아내려고 애를 쓰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부담스러운게 아니라고 했지만 좀 부담스러웠다. 부담스러움의 여러 갈래 중에 눈길이 들어가 있을 뿐이었고 그 나머지의 대부분을 차지하는건 도대체 이분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 수 없다란데 있었다. 

 논쟁적인 이야기가 종종 나왔고, 내가 가끔 불을 지르려는 수작을 펴기도 했지만 이 분은 쉽게 동조하지 않았다. 그래서 날씨 얘기 비슷한 소재를 꺼내면 날씨 얘기에 이런 분야가 있나 싶게 깊은 소견이 나오기도 했다. 모든 이야기를 가감없이 털어놓는 것을 보고 솔직한 사람인가 싶다가도 어느 한 지점에서는 아무리 흔들어도 아무런 이야기도 안 들려줄 것처럼 고집을 부리고, 자신은 어떤 사람이라고 규정짓는 것을 보고 그런 것 같다고 동조하는 순간 전혀 다른 모습으로 돌변하고, 돌변하는 것에 초점을 맞춰 카멜레온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다시금 일관됐던 과거의 경험을 털어놓고. 따로 규정주의자 노릇을 자임한 것도 아닌데 갈수록 첩첩산중이었다. 게다가 나에 대해 아무것도 묻지 않았는데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처럼, 한차례의 오차없이 순순히 나를 거친 이야기들을 그분은 그대로 몸으로 받아내고 있었다. 

 긴장됐다. 

 그분이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것부터가 긴장됐는데, 그러면서도 절대로 날 다 안다는식으로 나오지도 않는 지점의 틈에서부터 결국은 그 눈을 바라보면서 속수무책으로 해체된 기분이 드는건. 어떤 남자 앞에서도 느끼지 못한 귀속감이었으며, 어떤 여자에게서도 받아본적 없는 공감이었다.  

 누군가를 알 수 있다거나 확신한다라는게 얼마나 큰 과오였는지, 내가 배척했거나 마찬가지의 이유로 내가 배척을 당했을 때 억울함을 듣거나 억울함을 호소했을 때 나에겐 어떤 확신이 있었던가. 지금에서야 돌이켜보건데 확신보다는 억울함의 중량, 51과 49 사이, 가까스로 1을 넘은 맘의 비중이 있을 따름이었다. 내가 그 분을 잘 모르겠다라고 선언하듯이 말을 한 것도 경계에서 좌충우돌하지만 결국은 내게는 51인 사람으로 그 분을 기억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며 그 분이 말미에 다시 볼 수 있잖아란 말의 정서적인 측면에 공감을 표하기 때문일 것이다.  

 뛸듯이 그 사람이 좋고 맘에 흡족할만치 맘에 드는게 아니다. 그렇다고 믿어왔던 맘이 터무니없을 정도로 그 사람은 내가 사람을 보는 안목에 있어서의 편협함과 유아적인(아닌 사람은 있고?) 도취를 간파할 수 있게 해줬다. 그런 얘기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우리 둘 사이에선 나오지 않을 얘기겠지만 왠지 난 그 사람에 대해서보다 내가 사람을 봐왔던 시선에 대해 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앞서의 CD와 콘서트장의 비유처럼 난 근근히 그분의 서재에서 생각의 조각들을 접해왔다. 아마 우리가 만나지 않았다면 이상화까지는 아니어도 그저 내가 볼 수 있는 선 안에서만 우린 꽤 적절한 관계를 유지했을 것이다. 콘서트장의 불편한 자리와 비싼 입장료, 기대만큼 충족되지 않음이 자아내는 불편한 서사와 갑자기 장이라도 탈날 경우 등등의 사건들을 여전히 잘 알고 있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만났을 경우 나타나게될 다양한 이야기거리들이 자칫 불협화음으로 그칠 수 있다란 우려도 있었다. 우리의 만남과 헤어짐을 쭉 떠올려보니 서재에서 느꼈던 이미지를 내 안에 쌓아두기만 한 것과 실제로 생생하게 살아 숨쉬는 그분을 보고나서 홍수에 물이 뒤집히듯이 생각들이 뒤엉키는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아주 좋았다가 아니라 만나지 않았으면 후회했을게 분명했겠다란, 호불호보다는 더 강하고 깊게 원망했을지도 모르겠다란 느낌.  

 그분을 통해 사람을 만나는게 다시금 얼마나 근사한 일일 수 있는지를 알게 됐으니까. 만남이 흔하다고 징징댔지만, 어쩌면 그건 역으로 좀 더 만남다운게 없음으로인한 징징거림이었을테니까. 나로 인한 상대방들의 징징거림을 포함해서. 그래서 호칭이나 누구누구님보다 그분이란, 네이버에 의하면 3인칭 극존칭을 쓰게 된거다. 

 네, 다시 또 봐요. 계절별로 봐도 좋고, 술 생각나거나 좀 건조하게 만나도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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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20 23: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4-20 23: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조선인 2009-04-21 08: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치잇, 나랑은 언제 볼 거유?

Arch 2009-04-21 09:56   좋아요 0 | URL
저는 조선인님 만나는 것도 굉장히 끌리지만, 옥찌들과 마로랑 해람이를 같이 볼 수 있으면 더 좋을 것 같다 생각이. 그러자면 네 어린이의 스케줄과 적당한 거리와, 아아, 그 전에 연락처 하나 남겨주셔요.

2009-04-21 09: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조선인 2009-04-23 11:05   좋아요 0 | URL
네 어린이가 같이 만난다는 건 굉장히 매력적이지만 정말 가능할까요? 후후

Arch 2009-04-23 19:02   좋아요 0 | URL
히히. 매력적인 일은 추진하고 봐야는게 아닐까란.^^ 일이 좀 어마어마해지네요. 우선은 조선인님과 제가 기밀하게 만나서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