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위에 책을 읽는 사람들의 취향은 대동소이하다. 나랑 비슷하거나 조금 다르거나, 아주 다르거나. 요즘 유행인 자기계발서는 너무 울궈먹어 빛이 바래고, 베스트셀러는 난 책에 대해 요만한 취향을 갖고 있다고 표명하는 것 같아 사람에 대한 호기심도 사라지기 일쑤다. 여자라면 '왜 남자는 여우같은 여자를 좋아할까' 정도는 읽어줘야한다고 생각하거나, 무협지와 할리퀸, 만화를 좋아하는 사람도 나와 잘 맞지 않는다. 연애 기술은 선천적이라고 믿는데다 열거한 책들에서 내가 재미를 못느끼기 때문이다. 첫인상으로 사람을 판단하는건 무리수지만, 무슨 책을 읽는지를 두고 사람을 대충 짐작해보는건 대개의 경우 맞아떨어졌다. 어제의 경우도 그랬다.
건너편에 앉은 그녀가 두꺼운 책을 읽고 있었다. 가슴 부위가 도드라진 옷에 곱게 화장을 한 모습. 난 섣불리 '저렇게 두꺼운 연애북이 있나' 정도로 생각했다. 미간을 찌푸리며 책을 덮는 그녀와 내 눈이 마주쳤다. 무슨 책일까. 슬쩍 곁눈질로 책을 보자, 그 이름도 유명한 노마니즘이다. 이 공간, 이 시간에 노마니즘을 읽다니. 나는 단번에 그녀가 좋아졌다.
- 천개의 고원은 다 읽었어요?
- 어? 이 책을 알아요? (그럼요. 모든 것에 두루두루 얕은 사람인걸요.) 친구들은 거의 다 모르던데.
그렇게 그녀와 대화를 시작했다. 그녀는 모두가 토익 공부를 하고 있을 때 학과 수업 시간에 배운 푸코가 좋아 들뢰즈 강의까지 들었다고 했다. 수유 공간에서 수업을 듣다 도저히 이해가 안 돼서 중간에 포기하고 잃어버린 아이처럼 남겨진 노마니즘을 틈틈히 읽는다고도 했다. 문학을 좋아하는 선배가 카뮈를 몰라서 놀랐다고한, 가끔은 답이 안 나오는 경쟁보다 나에게 주어진 길이 있다면 좋겠다는, 작가나 제목을 잘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자기 안에 쌓여가는 책의 면면이 참 좋다는 23살의 그녀. 난 조금 흐뭇해지고 말았다.
그건, 뭔지 모르겠다고, 누군가 보면 영락없이 현실도피의 색깔을 지닌채 방황하는, 방황이 언제 끝날지도 모르게 들끓던, 23살의 나를 보는 것 같았으니까.
그녀는 그때의 나보다 영리하고, 지금의 내가 느끼는 감정의 층위들에 좀 더 접근한 애어른같은 말을 털어놓기도 했다. 나는 이제서야 뭐가 뭔지 좀 알 것 같은데 그녀는 내가 조금 알 것 같던 것들을 어린 나이에 섬세한 결로 느끼고 있다는게 부럽기도 했다. 그런데도 흐뭇했다. 누군가 나를 바라보며 흐뭇해하는게 아니라 내가 다른 누군가를 보면서 흐뭇해질 나이가 됐다는걸 알았기 때문이다. 민에게 자주 하는 말대로 이제 형님이 되었으니까 좀 더 의젓해져야하는거야. must be가 답답하겠지만 때론 견뎌야할 시간을 지나며 성숙에 이를 수 있을테니.
예쁘고 점잖은, 웃음마저 자연스러운 그녀와 친해지고 싶다. 친해지고 싶다. 뭐뭐 하고 싶다란 생생한 느낌. 나이 든다고 가슴이 시들고, 주름이 늘어난다고 푸념만 해댔는데 좀 더 생생하게 사람들과 가까워지는 느낌은 덤으로 받아가는 것 같다. 여전히 누군가와 친해지기는 어렵지만, 덤으로 받아가는 나이에 감사하며 문득, 춤이라도 추고 싶어진다. 몸을 비틀고, 팔을 휘젓는 요란한 동작에 불과하겠지만. 앗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