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단했다. 일번 출구에서 내려 바로 앞에 있는 마을버스를 타고 가다가 친구가 말해준 곳에서 내리면 되는거였다. 일전에도 아빠 말씀만 듣고 강원도까지 차를 몰고 갔을 정도니 이건 누워서 떡먹기였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성공적으로 길을 찾은 다음 날 발생했다. 불현듯 전철에서 내려 1번 출구까지 가는 길에 옥외 승강장을 지나쳐서 다시 계단을 두 번이나 오르내리는 일이 무모하다는 생각이 떠오르고 만 것이다. 그리하여 난 난데없이 5번 출구로 나갔고 생판 모르는 친구의 동네에서 나보다 더 그곳이 낯선 사람에게 길을 물어보고, 기업명만 써있는 동네 소개 표지판을 보고선 계속 우왕좌왕 댔다. 우여곡절 끝에 1번 출구에 간신히 도착해 칼바람을 가슴춤에 쟁여넣으며 얼마나 아득아득 이를 갈았던가. '내, 다시는 모험, 아니 삽질 따위는 하지 않으리.'라고.

붕어 머리가 아니면 어제의 일을 반면교사 삼아 다시는 그와 같은 우를 저지르지 않겠지만 난 또 그보다 더 멍청한 짓을 하고야 말았다. 내려야할 역의 전 정거장에 떡하니 내려버린 것. 출근할 때 탔던 지선 버스로 이쪽 역에 내려 한 정거장 앞서 전철을 탔다는 생각만 했지 그게 어디인지, 어디서 타야하는지, 버스 번호는 뭐였는지, 그것보다 중요한건 11시가 넘은 이 시간까지 다니고 있을까라는건 생각도 못했다. 그리하여 다시 어제와 같은 출발점에서 우왕좌왕대려고 폼을 잡고 있는데 문득 친구 집과 무슨무슨 오거리가 가까웠던 기억이 났다. 부랴부랴 정거장으로 달려가 오거리를 찾아봤더니 모든 버스가 거의 지나간다고 표시돼 있었다. 길도 확실히 모르지만 애초부터 이런 일을 저지를만한 자가 갖고 있을만한 터무니없는 낙관이 스물스물 기어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래, 오거리에서만 내리면 건물이 보이겠지.'

오거리에서 내렸다. 모든 건물들이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었고, 고가도로에서 떠드는 차들은 시끄럽기 (서울역에-이런 유머 알레르기 있는 분들이겐 미안. 거지의 비하발언이 아님을 덧붙임-)그지없었다. 웬 여인숙은 이리도 많아 집이고 뭐고 괜히 묵고 싶게 하는건지. 한참을 두리번거리다 친구 집 근처에서 봤음직한 큰 건물을 봤다. '못먹어도 고!'란 심정으로 그쪽을 향해 걷고 있는데 순간, 마술처럼 친구네 집이 보이는거다. 그것도 마을 버스나 일반 버스를 탈 때보다 심리적으로 더 가까운 위치에.

그 순간, 겨울 바람에 움츠려졌던 어깨까지 펴지고 발걸음도 어찌나 가벼워지는지. 마치 대단히 높은 힐을 신었는데 발이 아프기는커녕 허리까지 꼿꼿하게 펴지는 것만 같았다. 그 정도로 비포 애프터가 확실했다는 얘기다.

만일 최단거리로만 왔다 갔다 했다면 아마 나는 친구 집에 묵은 며칠 동안 이 동네에 대해서 관심도 안 갖았을테고 이 동네가 풍기는 냄새에도 집중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동네가 지하철 역사를 좌우로 해서 신시가지와 구시가지로 나뉘어졌으며 가끔씩 5번으로 시작하는 버스의 아저씨가 난폭 운전을 해서 승객들을 놀래키며 한번쯤은 봐왔음직한 이름의 여인숙들이 즐비한 길을 걷는게 어떤 쓸쓸함을 주는지에 대해서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공룡같은 건물들 틈새에서 여전히 골목들은 생생하게 살아있고, 그 속에서 딱 골목만큼 낡아가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살아 숨쉬고 있다는 것 역시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멍충이가 아닌가 싶은 삽질 끝에 마술처럼 나타난 집 덕분에 간간히 떠주는 삽질의 맛도 알게 되었다. 아마도 끝끝내 집을 못찾았다거나 에라이란 심정으로 택시를 타고 왔다면 삽질 우울론으로 끝났을 이야기가 결론이 좋았으니 다 된거 아니냔 식으로 끝내려는건 아니다. 난 다시 익숙하다고 믿지만 어디 붙어있는지 알 수 없는 장소에서 무작정 내려 삽질을 시작할테니까. 그때 만난 사람들에게는 '클로저'의 앨리스처럼 인사 해야지.


-안녕, 낯선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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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08-12-30 2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 낯선 사람이란 마지막 말이 맘에 꼭 들어오네요. ^^

Arch 2008-12-31 15:56   좋아요 0 | URL
부비적 부비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