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반장은 잠시 그야말로 멍을 때렸을 뿐이다. 뭘 하다가 다른 사람이 말을 거는 것도 모르고 열중하는 순간이 왜 다들 있지 않은가. 하지만 점심엔 이런 작은 순간까지도 반찬을 씹듯이 곱씹고 아삭거리는 소리를 듣다가 그만, 톡소리를 내고선 뻥튀기가 되는 것이다. 부반장의 잠시 잠깐의 멍때림은 일파만파로 확대됐다.

 기억이 잠깐씩 나가서 저지른 실수 얘기가 나오더니 치매에는 고스톱이 좋다는 둥, 가끔씩 정신을 놓는 증상이 있는 부반장의 성향 분석에서, 자기 주위에 그러다 병원 들어갔다까지. 오늘의 백미는 누군가 조기 치매를 초록이 치매라고 부른다고 말하며 부반장을 아주 초록이 치매 환자로 만들어준거였다. 언니들! 정말 잠깐 딴생각을 했을 뿐이라구요! 부반장 자체도 약간 맹한 구석이 있어서 약올리는줄도 모르고 자기 얘기 한다고 신나선 싱글벙글이다. 누구 장단에 맞춰야할지, 그래도 악의없는 농담에 다들 신이 나긴 했다.

 오늘은 미선이가 밥이랑 반찬을 싸오는 날이었다. 두명씩 조를 짜서 9-10명분의 도시락을 싸오는데 오늘 반찬은 김치찌개와 김장 김치, 양념갈비였다. 묵은지를 살짝 씻어서 고추가루와 참치만 넣고 만든다는데 왜 이렇게 맛있는거야. 미선이는 나랑 같은 나이이다. 나보고 맨날 졸다가 가끔 두리번거리다 막 질문한다고 구박하긴 하지만 나를 은근히 좋아하는게 틀림없다. 뭔가 먹을게 생기면 자꾸 나를 불러대니 말이다. 곳간에서 인심난다는 소리 딱 맞다. 내 배의 1인치는 미선이 공이 크다. 미선은 임신중인데도 항상 유쾌하고 긍정적이다. 나와 다툰 다른 언니를 끌어안은 것도 미선이고, 아지트를 제공하는 것도 모자라 무제한 안주 공급 원칙을 고수하는 것도 미선이다.

 느즈막히 학교에 온 숙자 언니(노숙자란 별명을 가진 언니, 손언니가 지어준 별명이다.)가 자기 한식자격증 있다며 샌드위치와 김밥을 해온데다(무슨 관련?) 성은 언니가 풀빵을 사와서 밥 말고도 먹을게 많았다. 미선이는 언니들, 밥 다 먹고 저거 먹자. 저거 먹자 하다가 손언니가 아예 밥그릇은 내동댕이치고 간식류에 손을 뻗치자 맘이 급해졌는지 성질을 내고야 말았다. 꾸역꾸역 갈비를 씹어대던 난 깜짝 놀래선 미선이 몫을 챙겨주고 다시 밥을 먹었는데 그 사이 손언니가 우리쪽으로 와선 다시 정신없이 음식을 먹어대기 시작했다. 결국 손언니는 식탐주의자란 별명을 얻었다. 물론 별명 명명에 재미를 붙인 내가 지어준거다.  손언니는 얼굴이 벌개짐에도 불구하고 의연히 애초의 후식이었던 홍시까지도 다 먹어치워버렸다.

 내일은 라면을 먹는다고 부탄가스와 라면을 산다고 돈을 걷고 다녔는데 미경 언니가 부 반장 몫까지 내줬다. 왜 부반장만 편애하냐고 농담을 했더니 언니가 웃으면서 그럼 네것도 빼고 잔돈 주란 말을 한다. 음식솜씨가 남다르단 말엔 주부경력이 몇년차인데로 웃으며 넘기는 미경 언니. 많이 튀지도 않고, 쳐지지도 않고 어느 곳에서든 잘 어울리는 언니는 은근히 남을 배려하고 표 안나게 맘을 쓴다. 나는 언제쯤 저런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까. 뭐라도 해주면 표내고 싶어 안달하고, 조금이라도 눈에 띄길 바라고, 그놈의 존재감 운운에 도끼 자루 썩는줄도 몰랐는데... 사람경력 몇년인데 이 모양이람.

  점심 시간이면 뭘 먹는 것만큼이나 사람들의 면모를 볼 수 있다. 물론 나의 처량맞은 도시락도 맛있게 먹어주는 맘들이 있으니 가능한거겠지만.  그나저나 어제 얇은 돈까스만 먹는 손언니가 두꺼운 돈까스를 서슴없이 먹는걸 보고 고기를, 신념이 아니라 냄새 때문에 안 먹는 사람도 있다는걸 처음 알았다. 냄새 좀 나던데...... 손언니는 그러니까 그냥 채식주의자 이런거 아니고 식탐주의자가 제격인듯 싶다. 나 역시 꾸준히 식탐에 일가견이 있고.

 알라딘 모임 후기를 올리려다 행여 별로이거나, 그런건 앤간히 써, 혹은 너네들만 놀아서 나 삐질거야, 이러시는 분들이 계실까봐 망설이고 있어요. 혹 모임 후기에 알레르기 반응 있으신 분은 살짝 귓속말을. 저는 다른 후기는 모르겠는데 모임 후기 쓰는건 너무 좋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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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8-12-10 1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리도록하세요~~~ 삐질때 삐지더라도 일단 후기는 봐야하니까요 오호호

웽스북스 2008-12-10 14: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저저저저는 환영이에요!!! ㅎㅎ 중간에 등장한 제 얘기도 써주세요~

Arch 2008-12-10 15: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푸힛! 메피님은 더이상 신비주의를 고집하지 마시라! 마시라!
웬디양님, 저 과장이 심해서 사실왜곡을 할 수가 있는데 말이죠.

Mephistopheles 2008-12-10 17:13   좋아요 0 | URL
거 참...신비주의 아니라니까요..

신.기.주.의.

Arch 2008-12-10 19:15   좋아요 0 | URL
그럼 신기전? 신기하면 신기가 발휘되는건가요? 미안해요. 나도 웃기고 싶었어요. 흑

시비돌이 2008-12-10 2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고 나서 삐지든지, 말든지 결정할께요. ^^ 개인 블로그에 모임 후기를 쓰는 걸 가지고 뭐라고 하는 사람은 없을테고, 기대치를 높이려고 지금 뜸을 들이시는 것 같은데요. ㅋㅋ

뷰리풀말미잘 2008-12-11 0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니에님 망설임주의자!

Arch 2008-12-11 09: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비돌이님 정확하시네요. BG돌이, 아직 기억하세요? 히~ 기대치 높아지면 곤란해요. 사실 메모해둔걸 곰곰히 살펴봐도 뭔가가 안 떠올라 괜히 한번 이래본거에요.

말미잘님 ㅡ,.ㅜ;; 저는 그냥 규정주의자 할래요. 여러 사상주의면 머리 복잡해져요. 내가 무슨 주의였더라 혼자 이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