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엔 감기 때문에 못했던 목욕을 해서 기분전환이 됐나 싶었다. 아니면 누나가 공구놀이 시간에 가져온 기중기를 가지고 놀 수 있게 돼서 신난건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적당하게 끊고 다시 평정을 찾나 싶었던 기분이 결국은 잠옷의 단추 앞섶을 풀어헤치며 돌아다닐 정도로 방방 뜨게 되고 혹자는 야성적이다, 밖에서 들어오신 엄마는 '고거 참 나훈아같다'란 말을 할 정도에 이르러서야 이건 보통 조짐이 아니란 느낌이 들기 시작한거다. 그래도 다짜고짜 무슨 짓을 저질렀냐고 말할 수는 없잖아. 조심스럽게 흔적을 찾고 다녔는데 도통 보여야 말이지. 점점 정체를 알 수 없는 기운이 뻗쳐오르는데 사건 현장을 덮친 노련한 수사관처럼 저 멀리서 들려오는 '시니에, 여기야 여기'

 결국 예상은 들어 맞았다. 냉장고를 열어본 엄마 눈에 제일 먼저 띈건 빨간약. 요오드가 반찬통들을 타고 흘러내리는 광경이었다. 김치 국물처럼 선명한 자국과 반찬통들 사이에서 굴러다니는 용기. 이건 분명히 지민이야, 지민이야, 그러면서 민에게 갔다. 눈치는 번개보다 빠른 녀석이 옳다커니 하고선 준비한 말이래봤자 '말하면 안 혼낼거야?' 안 혼내긴 뭘 안 혼내!, 너인줄 다 알거든! 조근조근 말해줄 정신을 잃고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곤 곧장 씩씩거리며 화를 내며 냉장고를 닦아내기 시작했다. 그때 거실에서는 민과 동생이 말하는 소리가 들렸는데,

-민아, 왜 그랬어. 이모 화내잖아.

-응, 이모 놀래켜주려고.

 이건 너무나 짜릿하게 놀래켜서 한번만 더 그럴라치면 전혀 안 놀라게 되는 적응력까지 길러지는게 아닐지 모르겠다. 민은 뭐든 가능하게 하는 아이니까.

  어제는 할머니방에 가서 공룡 나오는걸 봤다며 신이나서 내게 떠들다가 내가 또 뭔 말을 했다고 금세 텔레비전에서 공룡들이 싸우면서 하는 말대로'죽어볼래'라고 하는거다. 그런 말 하면 기분이 별로라고 하니까 얄밉게 '내 맘이지'라며 요새 자주 쓰는 그 말을 새침하게 내뱉는거다. 하도 약올라 진짜 죽은척은 저번에 써먹다 약발이 떨어진걸 알아서 유령처럼 구는 방법을 써봤다. 그러니까 민이가 무슨 말을 해도 안 들려요였는데 민 입장에선 이게 꽤 답답했나보다. 결국은 징징대다 와락 울어버리며 다시는 죽인다는 말 안 할테니까 그만 나타나라고 고함을 질렀다. 이런 충격요법이 효과가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아마 며칠간은 잠잠하려니 생각했는데 빨간약이라니. 그래놓곤 스물스물 내 방으로 와서 딴청을 피우고 있는거다. 계속 모른척 하고 있는데 이것저것 건드리다가 뭘 먹고 있는게 보여서 이상한거 주워먹었을까봐


-민, 뭐 먹는데.

하자,

-응, 이렇게 (입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낀거 먹은거야.

 어찌나 알뜰한지 민에게는 옷에 붙은 밥풀도 함부로 허용해선 안 된다. 그런 민을 어떻게 오래 미워할 수 있겠어. 요오드 냄새가 풍기는 손으로 민을 안았더니 이 녀석이

-우리 이모, 우리 이모지?

이런다. 그래 민이 이모다. 민이 이모라 가끔 환장하겠지만 그래, 우리 이모야.

 밖에서 옥찌 기침하는 소리가 심해 한의원에서 지어온 기침할 때만 먹는 약을 준다고 했더니 갑자기 민이 억지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자기도 약 먹고 싶다는건데 모른척 했더니 피를 토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극성을 떠는거다. 결국 한 숟가락씩 약을 먹였다. 민은 말똥말똥한 눈으로 입을 쩍 벌리고선 약을 받아먹었다. 이 흐뭇한 표정. 밥을 먹을때면, 간식을 먹을때면, 물론 말썽을 피울때면 한번씩 반짝이는 민의 눈. 난 아마도 민의 눈이 마술처럼 반짝이는 순간들을 오랫동안 기억할 듯 싶다.

야성적인 민, 볼록 나온 배는 '먹어대'의 상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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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08-11-28 2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흐흐 고마워요 민~~ 민이의 저 뽀얗고 탱탱한 뱃살, 볼록해도 괜찮아~

Arch 2008-11-28 22:57   좋아요 0 | URL
히히히~ 그럼 좀 더 먹어대도 괜찮단? 저거 윙크하는거예요. 웬디 언니 복받은겨^^(막 강요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