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부지런히 녹화하던 sex and the city와 friends테잎을 다른 방으로 옮기고 그 자리에 옥찌들 물건을 넣을 수 있게 하는 대대적인 정리를 하느라 몸이 녹초가 되어버렸다. 하는김에 양말 정리며 기타 등등 정리로 정리 의욕을 고조시키다 그만 한밤의 청소까지 손을 뻗친 상태. 엄마가 너무 힘들다며 전기구이 통닭에 맥주 한잔을 제안하셨다.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집 근처에 있는 신토불이에 가서 닭을 사가지고 오는데 닭구이에서 풍기는 역한 냄새에 '어, 오늘 닭이 안 땡기나'했는데 안 땡기기는!  앉은 자리에서 모두들 배부르다며 물어날 때까지 가슴살을 맥주에 살살 녹여가며 먹어댔다. 이러면서 볼록 솟은 배를 귀여워해줄 누군가가 안드로메다에서 날아올거란 앙큼한 생각을 하다니!

 울산에서 일하시던 아빠도 돌아오고, 옥찌들도 안 자고 눈을 초롱초롱 빛내고 있었던지라 온가족이 맛있게 통닭을 먹는  자리려니 했는데 웬걸, 다 먹고 난 뒤에 안 자고 계속 장난만 치는 옥찌들에게 양치질을 시키느라 알딸딸한게 깬데다 민이가 비데 리모컨을 자기도 갖고 놀아야하는데 못갖고 놀았다며 울어버리는 바람에 고함과 협박이 오가는 험악한 분위기가 됐다. 그래도 이를 닦다가 화해를 하는줄 알았다. 하지만 역시 웬걸. 요새 밤에 쉬아를 가리고 있어서 웬만하면 밤에 물을 안 먹는 민이가 양칫물을 먹는 바람에 다시 상황이 악화됐고, 민은 고함을 지르며 울고, 옥찌는 옥찌대로 왜 비데 리모컨을(여기서 노래가 나온단다) 선반 위에 뒀냐며, 그러면 자기가 의자를 받치고 올라가야하는데 그 불편함을 이모가 아냐며 나를 윽박질렀다. 정신 상태가 좀 온전했다면 사정 얘기를 했을텐데 취한데다 다른때와 다르게 할아버지 할머니 빽 믿고 더 말을 안 듣는 옥찌들이 미워서 그만 소리를 빽지르고 말았다.

 아빠가 화장실에서 나오자 벼르고 있던 옥찌들이 단번에 달려들어 나의 죄상을 낱낱히 조아리기 시작했고, 아빠는 시늉으로나마 절대악인 나를 때리는척 했다. 솜방망이 주먹이 아플리야 없겠지만 서운한 맘도 있었고, 억울하단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다 그만 맥주가 점점 몸의 곳곳을 휘돌 즈음엔 참 다행이란 생각이 들고 말았다. 내가 옥찌들의 맘의 모든 부분을 아우를 수 없음에도 아우를 수 있다는 자만이, 내가 온전히 책임을 져야하는 상황의 답답함이 좀 해소되었다고나 할까. 전처럼 민이랑 싸우시기만 하지 않는 아빠며, 든든히 옥찌들의 서포트가 되어줄 엄마를 보며 책임감이 덜해서라기 보다는 옥찌들이 편향되지 않고 두루두루 맘을 줄 대상이 있다는게 맘에 들었다. 아, 무슨 말을 하는거지. 제이드님이 가끔 하시곤 하던 음주 페이퍼가 이런 느낌이었을까?

 딱 한잔 반이면 충분할 알딸딸한 느낌. 조금 서둘러 먹었던가? 알 수가 없다. 2PAC의 changes를 듣고 있다. 뜬금없이 즐겁다가 불현듯 침체되기도 했다가 다시 다른 음악에 업되고. 아 짜릿해. 나름 자족하는 음주의 맛을 점점 알아가고 있는 것만 같다.

 오늘의 말미는 개선문.

그들의 여행 중에 라빅의 말,

-당신은 나의 뿌리가 없는 행복이 아니었던가. 구름 속에 있는 나의 행복, 서치라이트의 행복이 아닐까? 자, 키스라도 한번 해주지. 생명이 오늘처럼 귀중했던 때는 한번도 없었지. 생명같은 것은 조금도 가치가 없는 시대이긴 하지만.

 나의 하루를 그야말로 뜬금없이 들뜨게 하는 것들을 난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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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08-10-23 2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왜 술을 마시면 시니에님 같은 그런 '짜릿한' 느낌의 단계는 그냥 뛰어 넘어 바로 인사불성 단계로 가는 것일까요. 그래서 저는 음주페이퍼도 못쓴답니다.
개선문, 라비크 (제가 읽었던 책에는 라비크라고 써있었거든요 ^^), 그 책을 고등학교때 읽고서 얼마나 좋았던지, 그리고 또 얼마나 뭔가 아는 체 하고 다녔던지~ 오랜만에 기억을 불러일으키시네요.

Arch 2008-10-24 10:02   좋아요 0 | URL
hnine님! 그러니까 막 허겁지겁 먹은 다음에 페이퍼를 쓰기 시작하는거죠. 페이퍼 말미엔 사실 눈도 침침해 뭔소리 썼는지도 잘 몰라버린답니다. hnine님도 그 맛을 아시는군요. 라빅의 독백과 조앙을! 라비크란 이름도 좋은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