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지희가 일어나자마자 내게 다가와선 날 꼭 안아줬다.

-이모 사랑해.

 옥찌가 뭔가 아쉬워서 사랑한단 말을 하는건 아니었지만 잠에서 깨자마자 이러는건 어떤 기분 때문일까 궁금했다.

-나도 지희 사랑해. 그런데 이모를 어떻게 사랑해?

-(옥찌의 눈동자가 위 45도에서 머물다가) 이모가 애기였을때도 사랑해.

 내가 애기였을땐 존재하지도 않았던 이 녀석이 그때부터 나를 사랑한다니. 갑자기 최규석씨의 '대한민국 원주민'이 생각났다. 울고 있는 꼬마를 다 큰 내가 꼬옥 껴안아주는 장면. 물론 그 책과 전혀 상관없는 내용이지만. 어렸을때 나라니.

 이번엔 어떤 정의일까?

-지희야, 사랑이 뭔데?

-이모테 사랑해라고 편지를 쓰는 것.

-아,

 지희랑 쭈욱 뭉개고 있다가 밖에서 소리가 들리길래 부스스 일어났다. 부엌에선 엄마가 라디오를 들으며 냉장고에 쓸만한게 있나 보고 있으셨다.

-엄마, 나 뭐할까. 어! 라디오 듣네.

-응, 이만수 방송인데 재미있어.

 이만수는 또 누구냐. 오늘 아침은을 진행하는 이문세. 엄마의 말실수편(나도 만만치가 않다.)은 따로 시간내서 써봐야겠다.

 지희는 밥을 먹고, 그림을 그리다 내게 신중하게 말해줬다.

-이모, 내가 이모랑 할아버지랑 그리는데 목도 그려줄게.

 아, 지희는 이제 사람들 목도 그려넣을 줄 알게됐다. 손이랑 발도 뭉퉁그려지지 않고, 손가락 발가락만 없을 뿐 그림은 꽤 구체적으로 변하고 있다. 아이들이 콩나물처럼 자라고 있다는게 가끔은 이렇게 실감되기도 한다.

 지희랑 지민이랑 좀 놀아주다가 밖에 나갔다.

<낮>

 월명산을 돌까, 버스를 타고 군산을 한바퀴 돌까하다 동네 주위만 어슬렁댔다. 비가 올 것 같았고, 먼곳으로 훌쩍 떠날만큼 기분이 상쾌하진 않았다. 갑자기 쑥차를 먹고싶단 생각에 동네 주변 마트를 둘러봤다. 자판기용에서 개별 포장까지. 가격도 성분도 제각각이었다. 아빠 말로는 쑥차는 따로 분말로 만들어 차를 타도 맛이 안 난다고 하셨다. 맛을 내기 위해서인지 뭔가 요상한게 잔뜩 들어있었다. 다음엔 세곳 중에 물건도 다양하고 가격도 저렴한 A마트에서 성분 잘 확인하고 사야겠다.(이런 얘긴 대체 왜 하는거야. 낮이 너무 빈다 싶어 그만.)

 낮엔 주로 멍때리거나 나무를 그리거나 영화를 봤다. 공산당선언을 읽으려다 눈이 침침해져(꼭 이럴때만) 서문만 황급히 훑고 말았다.

<밤>

 옥찌들은 나갔다와서 피곤했는지 일찍 잠이 들었다. 드라마 열혈팬인 엄마와 동생이 '엄마가 뿔났다'를 보면서 열무 비빔국수에 꽂혀선 급조된 열무 김치와 오이를 공수해 요리 플랜을 짜는데. 아뿔사, 국수가 떨어졌다. 결국 열무 비빔밥을 먹었는데 맛이 아주 그만이었다. 특히 고추장이 매운데다 급조된 친구치곤 열무 김치가 적당히 익어줘서 아주 짜릿할 정도였다.

 엄마랑 동생이 수순대로 주말 드라마를 섭렵하다, 어떤 장면에서 부인이 남편의 외도를 한다는걸 다시 또(징글징글하단 표현이 맞다) 확인하는 장면이 나온다.

엄마 - 야, 저거 결재 서류 보는건데 뭐라고 써있는줄 알아?

동생 - 엄마, 나랑 같이 봤잖아.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엄마는 드라마 몰입 맥이 끊기셨는지 점 본 얘기를 해주셨다. 굳이 방에서 뭉기적거리는 나까지 친히 불러내서.

엄마 - 신기가 있대.

나 - 응? 누가?

동생 - 가족 모두 다.

나 - 그래?

엄마 - 1500만원 있으면 너 신기 풀어줄 수 있대.

나 - 난 신기 있는줄 모르겠는데. 그런데 점보시는 분은 그걸 어떻게 알았대?

동생 - 엄마가 다 말했대. (가족 각자의 사정 나열)

나- 엄마 내가 점쟁이어도 신기 타령하게 생겼네. 그거 풀려고 1500만원 벌려고 용쓰다 보면 뭐 따로 풀어줄 필요 없이 성공하겠네. 뭐.

엄마 - 신기 풀어주면 돈도 잘 벌고, 성공한다는데.

 엄마는 못내 굿을 못해주는게 아쉽나보다. 점은 화살을 쏴놓고, 과녁을 그리는거라던데. 족집게는 달리 쭉 집어내는게 아니라 대부분 점을 보는 사람이 알아서 구구절절 설명을 해서라고 말을 해도 엄마한텐 소용이 없다는걸 잘 안다. 엄마는 그저 잠시동안의 위안. 이게 결코 아이들이나 아빠가 못나서가 아니라 단지 신기때문일지도 모른단 위안이 필요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내가 불행하기 보다는 불가항력이라고 생각하면 조금 맘이 놓일지도 모르는 일. 그리고 당분간은 1500만원 때문에 뭔가가 안 풀린다는 생각이 사소한 핑계거리가 될 수도 있으니까. 물론 굿을 벌일 비용이 당장 없다는게 가끔 한방씩 먹일 날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나저나 복채 3만원에 가족 모두 신기타령만 한거면 점을 못봐도 너무 못본다니까 엄마는 그래도 누구네 누구네는 귀신같이 잘됐다며 내게 방귀 한방 날려주셨다. 열무 비빔밥이 독하긴 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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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08-06-30 0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저도 알아요 그 방송. 이 문세가 진행하는 '오늘 아침은'. 프로 제목도 모르고 들었었는데 이 참에 알게 되었네요. 어제도 얼마나 웃으면서 들었는지.
저의 일요일은, 하루 종일 먹고 치우고 먹고 치우고 하는 주부의 일상의 쌤플이었습니다.

순오기 2008-06-30 05: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방귀 한방~~~~ ㅎㅎㅎ 압권입니다!

Arch 2008-06-30 1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hnine님 치우고 먹고 치우고. 일요일은 왜 이럴까요. 순오기님 방귀뿐은 아니지만 엄마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해(다 까발려놓곤) 그 정도로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