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집 끝나고 같이 집까지 걸어오며 아파트 이곳저곳 놀이터에서 놀곤 한다. 보통은 격에 안 맞게 놀이터에서 책을 읽고 계시거나 사색한다며 모래를 바라보다 눈이 시어서 혼자 눈을 쿡쿡 누르기 일쑤였는데 오늘은 좀 움직이고 싶었다. 사실 책을 읽는다고 하지만 아이들 뭐하나 신경쓰느라 집중도 잘 안 됐다. 게다가 오늘은 옥찌들 기운도 없고 놀이할만한 적당한 숫자의 아이들이 있었으니까. 진짜 속내는 전에 아이들끼리 하던 놀이를 한번 해보고싶은 욕심이 더 컸다. 그때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얼마나 해보고 싶었던가.

 근처에서 놀던 아이들을 끌어모아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했다.  어렸을 때 이후로 처음 해보는 놀이. 술래의 눈을 피해 움직이고 있을때는 몰랐는데 막상 술래가 되니까 이거 보통 긴장되는게 아니었다. 아이들이 언제 인질(?)들과 이어진 손을 끊고 도망을 칠런지. 아, 그 초조함이란. 물론 내가 100미터 20초를 훨씬 넘기는 달리기 실력이래도 아이들 정도는 이긴다는 자신감이 있었는데도 이런다. 첫번째 주자가 손을 딱 끊는 순간 빛처럼 빠른 속도로 도망을 가야 술래를 면한다. 긴장감과 집중. 이토록 재미있는걸 왜 이제서야 해보는거야. 

 그런데 놀이를 하다 그만 난관에 부딪쳤다.

 선을 그은 곳으로 술래가 오면 안 돼. 인질이 있으면 땡하는게 아니라 먼저 구해주는거야. 깍두기는 어떻게하지? 아이들은 각자 의견을 내기도 하고, 우기기도 하고, 그닥 신용이 가지 않는 내게 동의를 구하기도 했다. 그냥 같이 뛰어놀고 술래하고 그럼 되는거 아니었어? 아니란다. 이런게 다 정해져야 깍두기들만 술래하는 법이 없고, 골고루 돌아가면서 술래를 하는거란다. 그럼 놀이가 더 재미있어진다고 승빈이 누나 시은이가 귀뜸을 해줬다. 아. 그래서 나도 아이디어가 솟아나오는대로 규칙이란걸 만들어봤다. 야, 스릴을 위해 우리 그냥 걷는게 아니라 멈춤 할 때 한발을 들어보자, 깍두기 술래하면 깍두기 엄마가 대신 잡아주자, 물론 예리하고 똑똑한 아이들이 내 말을 귓등으로 흘린건 말할 것도 없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가 좀 시들해지자 얼음땡 놀이로 이어졌는데 이것 역시 내가 생각한 얼음땡이 아니었다. 물총으로 땡을 하거나 셀프 땡. 그림자처럼 움직이기. 그냥 얼음하고 땡이 다인 놀이에 이토록 세세한 규칙들이 있을줄 며느리도 몰랐다. 내가 어렸을때도 이랬을까?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지금은 좀 나아졌다고 생각하지만 어렸을때만 하더라도 내가 정말 원하는게 뭔지 뭘 하고 싶은지 잘 몰랐다. 혹시 알았다고 하더라도 말하지 못했다. 행여나 아이들이 거절하거나 내 놀이가 재미없으면 어쩌나싶은 마음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럼 다른거 하면 되지라고 생각할만한 여유가 없었는지 머리가 부족했는지. 그때나 지금이나 약간 맹한 구석이 있는건 확실하다.

 우리 옥찌들 반응도 즐거웠다. 지민인 집에서 큰소리 빵빵칠 정도로 왈패인데 의외로 수줍음을 탔다. 깍두기로 같이 하자고 몇번을 조르고, 같이 하는 시늉을 하는데도 모래 장난만 쳤다. 그러면서 굉장히 그윽한 눈으로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쳐다봤다. 모든 규칙을 다 외워서 다음엔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지존이 되리라는 야망까지는 아니고, 분명히 하고 싶어하는 것 같았는데. 지희 역시 쑥쓰러워하긴 했지만 또래인 승빈이랑 부지런히 깍두기를 하며 박수까지 치면서 놀이에 푸욱 빠졌다.

 저녁 시간이 되자, 모두들 집에 들어가는데 재승이만 놀이터에 남아서 심심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재승아 집에 안 가?

-8시에 특공무술 배우고 집에가요.

-밥은?

-학원 끝나고 먹으면 돼요.

-배고프겠다. 아줌마네 집에 같이 가서 먹을까. 찬은 별로 없지만(이러면서 본의 아니게 가짓수를 늘릴게 분명하다. 애들은 밥 달라고 야단인데 오로지 찬이 없는데용 접대를 하려고.)

-그럼 엄마한테 혼나요.

 그런 말이 나올줄 알았으면서도 물어봤다.모두가 가버린 놀이터에 혼자 남겨놓기 미안했으니까. 빈말은 아니었는데 결국은 빈말이 되고 말았다. 아직 그네를 구를줄 모르는 지희 등 뒤에서 세상에서 제일 높이 그네를 밀어줄 수 있다고 살짝 뻥을 섞는 재승이.  괜히 제때에 밥을 못먹는 재승이 부모님은 어떤 사람일까 궁금해하다 이건 완벽히 오지랖이란 생각에 옥찌들을 데리고 집에 왔다.

 놀이터가 더 많아지고, 신나게 뛰어놀 수 있는 아이들과 어른이 많아진다면 정말 좋겠다. 세상을 한뼘 더 행복하게 하는건 사실 멀리 있는게 아니다. (이거 너무 뻔한 결론으로 치닫고 있다.) 아이들의 깨알같은 웃음 소리가 점점 많아지고 커지는 것. 아이들에게서 희망의 흔적을 본다면 나의 일상도 종종걸음치며 희망의 부스러기라도 나눠먹지 않을까. 즐거울 수 있다는 희망, 오늘도 만족스럽지만 오늘보다 내일은 더 재미있을거란 기대 말이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순오기 2008-05-27 2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를 언제 했더라~~~~ㅎㅎ 우리 애들 어려서 했으니까 아마도 10년은 넘은 듯해요.
저렇게 규칙이 세분화되었군요. 역시 요즘 녀석들 똑똑해요~~~~
재승이 때문에 짠~~~해요. 아이가 놀이터에서 놀다가 특공무술 갔다오면 도대체 몇시에 저녁밥을 먹는거에욧! 버럭~~ㅜㅜ

Arch 2008-05-27 23:01   좋아요 0 | URL
9시래요. 요즘 맞벌이 부부들의 실정이라고 보기엔... 좀 안타깝더라구요.

비로그인 2008-05-28 0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정한 규칙을 추가해서 놀이에 공정함이 더해지는 거군요. 모두가 재미있을 수 있도록요. 아이들은 원래도 예쁘지만, 이렇게 배려까지 배워버린 아이들이라면 눈에 넣어도 정말 아프지 않겠는데요? ^^

재승이는 정말 짠하네요. 아홉 살도 안 된 아이가(맞나요?) 아홉 시에 집에 들어가서, 저녁을 먹어야 한다니요.

Arch 2008-05-28 09:43   좋아요 0 | URL
제가 본의아니게 재승이를 너무 짠하게 만들었나봐요. 앞으론 재승군의 엉뚱한 면도 많이 보여드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