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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도시 이야기 ㅣ 펭귄클래식 135
찰스 디킨스 지음, 이은정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12년 8월
평점 :
감동 깊게 본, 뮤지컬 두 도시 이야기
내게 '고전'은 두 가지 의미의 저서다. 첫째,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책이다. 물론 대부분의 책이 저자와 독자와의 일대일 강의가 아닌 만큼, 재해석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생각의 경계가 불분명하여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책은 드물게 발견된다. 현상을 심층적으로 전달하려다 보니 필연적으로 생기는 모호함이다. 인간의 정신 그 자체가 모순투성이이므로 해석의 다양성이 오히려 적절하다. 특히 도덕이나 심리의 영역에서 깊이를 보여주는 저서는, 명확한 답을 주지 못한다. 오히려 의문을 더 키울 뿐이다. 둘째, 다시 읽었을 때 의미가 살아나는 책이다. 살면서 다시 읽는 책은 매우 희귀하다. 다시 읽을 때 새로운 점을 발견한다면, 그 작품은 진귀한 보물이다. 다행히도, 그런 보물은 찾기가 어려워서 그 보물을 찾은 기쁨은 더 크다.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는 내게 '고전'이다. 수없이 다양한 '다른' 이야기가 떠오르고, 다시 읽을 때 더 생생해진다. 물론 즐겁기만 한 작품은 아니다. 풍경이나 인물 묘사가 더없이 길고 세세하고(물론 그 묘사가 작품의 주제나 전개에 필연적인 경우는 제외하고), 인물들의 욕망은 단선적이고, 작가의 서술이 너무 직접적으로 드러나거나 등장인물이 저간의 이야기를 통째로 읽어주는 부분은 투박하다. 너무 뚜렷한 상징들은 그래서 오히려 단점으로 보일 정도다. 현대의 독자로서 파악한 이런 낡은 점들에도 불구하고, 이 이야기는 더없이 생생하다. 무엇보다 감동적이다. 점점 소설을 읽고 울거나 웃는 일이 드물어진다. 물론 소설이 꼭 그래야 할 필요는 없고, 그래야만 감동을 주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감동과 전율은 여전히 중요한 덕목이다.
이 작품의 에피소드를 간명하게 연결하는 키워드는 사실 '우연' 혹은 '운명'이다. 그리스 비극에서부터 시작해 막장드라마에까지 영향을 끼치는 그 요소다. 작년에 충격적으로 보았던 '그을린 사랑'도, 그러한 비극을 다룬 영화다. 이 작품은 근친 상간이나 출생의 비밀을 다루지는 않는다. 하지만 인물들 간의 관계도가 너무나 비현실적으로 가깝게 닿아 있다. 우리는 그런 일-우연한 만남이나 기시감, 일치의 순간-을 꽤 많이 겪는 편이지만, 이야기에서 그런 요소가 나올 때 실망하기 쉽다. 그건 손쉬운 전개 방식이기 때문이다. '알고 보니'는 이제 반전 축에도 들지 못한다. 수많은 반전에 단련되어 고도로 영리해진(?) 현대인들에게 웬만한 반전은 코웃음만 나올 뿐이다. 반전을 알아맞힌 것이 대단한 능력이라고 과시하는(?) 무리도 있다. 그런 면에서 이 작품의 반전들은 우연적 요소에 기대어 효과가 떨어진다. 하지만 작가가 앞부분에 깔아놓은 수많은 복선을 다시 읽게 되면 묘미가 생긴다. 자연물의 변화, 화자의 예언, 인물의 대사, 인물의 행동이 나중에 일어날 일들의 예고다. 모든 사실을 다 알고 다시 읽게 된 '두 도시 이야기'는 작가가 빈틈없이 직조한 촘촘한 퍼즐이었다. 다시 읽어야 할, 더없이 좋은 구실을 만들어놓은 셈이다.
한편 '고통스러운 우연'은 인간을 실험한다. 우연이 단지 사람들의 증오와 호기심을 자극하는 매개체로 쓰일 때, 그건 수준낮은 장치다. 이 작품에서 그 우연은, 혹은 훌륭한 비극에서의 우연은, 인간의 위대한 선택을 보여주는 장치다. 인간이 죽음 앞에서 자신의 밑바닥까지를 드러낸다는 건 서글픈 진실이다. 우리는 대개 그러한 보통의 인간이다. 그러나 그 진실을 넘어서려는 소수의 '예외'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희망과 용기를 준다. 삶을 망치고 고통을 배가시킨 원수를 용서한다는 건 쉬운 선택이 아니다. 증오는 가깝고 법은 멀고 도덕은 헛소리다. 희생은 더욱 불가능한 말이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는 용서와 희생이라는 고전적인 테마가, 인물들의 행동으로 증명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최고의 시절이자 최악의 시절, 지혜의 시대이자 어리석음의 시대였다. 믿음의 세기이자 의심의 세기였으며, 빛의 계절이자 어둠의 계절이었다. 희망의 봄이면서 곧 절망의 겨울이었다. 우리 앞에는 무엇이든 있었지만 한편으로 아무것도 없었다. 우리는 모두 천국 쪽으로 가고자 했지만 우리는 다른 방향으로 걸어갔다."(13)
소설의 '두 도시'는 프랑스 혁명 직전과 직후의 런던과 파리다. 이 유명한 시작 부분은 소설의 주제를 관통한다. 미덕과 악덕, 사랑과 증오, 풍요와 가난이 잔인하게 뒤섞인 이 시기에 더욱 돋보이는 건 인간의 선택이다. 흙바닥에 떨어진 포도주를 머릿수건에 적셔 아이에게 짜먹이는 엄마와 초콜릿을 먹기 위해 다섯 명의 시종의 시중을 받는 높으신 나리가 공존하는 세상이다.
포도주를 받아먹는 장면. 소설에서 지극히 충격적이었다.
악인인 후작은 "나는 내가 살아온 이 체제를 영속화시키며 죽어갈 것이다."(179)라고 선언한다. 수많은 죄없는 이가 바스티유를 포함한 감옥에 갇혀 기약없이 살았고, 가난한 이들은 늘 그렇듯이 그들의 힘으로만 역경을 헤쳐내야 했다. 이 소설은 그런 혁명의 시기를 살아온 한 가족의 이야기다. 뮤지컬 '두 도시 이야기'에서는 이 소설을 사랑 이야기, 특히 삼각관계라고 강조했다. 루시 마네트와 찰스 다네이, 시드니 칼튼의 사랑 이야기라는 주장이다.
사실 결말을 보면 주제가 사랑이라는 설명을 수긍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전체적인 분위기는 사랑보다는 인간의 탐구에, 주인공보다는 다양한 인물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래서 지루하지만 백 페이지만 참고 넘기다보면 디킨스의 이야기 속으로 빨려들어간다. 어떤 정보도 없이 책을 읽는 편이 읽는 재미를 배가시킨다. 바스티유에서 인생을 빼앗긴 채 살아온 마네트 박사의 사연과 찰스와의 관계는 어쩌면 매우 상투적이지만, 그렇기에 진실이 밝혀지는 순간의 묘미는 아슬아슬하다.
한편 칼을 쥐면 휘두른다는 점에서, 인간은 대개 비슷하다. 혁명 이후 대중이 그들이 그토록 증오했던 귀족들과 가까워졌다는 것은 끔찍한 변화다. 작가는 인간의 그러한 면모를, 대중들의 모습을 통해 낱낱이 보여주고 있다.
그에게 일어날 끔찍한 일이 하나라도 빠진다면, 그만큼 매력도 줄어들 것이다. 잔인하게 토막난 운명에 처한 몸뚱이는 좋은 구경거리였다. 도살되고 갈기갈기 찢길 운명에 처한 유한한 존재에 사람들의 감각이 굴복한 것이다. 그 뿌리에 있는 호기심은 실로 '악마적'인 것이었다.(93)
귀족들을 처형하는 대중의 분노는 실로 무시무시했다. '새로운 압제자들이 보복적인 도구 사용으로 사멸'한다는 마지막 전언이 처음과 통한다. 기요틴은 '말끔하게 면도하는 면도날'이라는 유쾌한 별명으로 불렸다. 사람들은 피에 젖은 몸으로 카르마뇰이란 춤을 추었다. 피의 축제는 그동안 귀족들이 저질러온 악덕에 뒤지지 않는다.
"폭력에는 중단도, 동정도, 평화도 없었으며 약해진 마음으로 휴식하는 기간도 없고, 일정 시간만 휘두르는 일도 없었다. 시간이 처음 생겼을 때처럼 낮과 밤이 정기적으로 순환할 뿐이었다.(392)" 또한 그들은 귀족이 그들에게 베풀던 아량도, 죄수에게 베푸는 유사점을 보인다."청중이 너그럽게 자비를 베풀고 싶었고, 자기들의 변덕 혹은 바람직한 충동을 흐뭇하게 여겼으며, 자신들이 마구 내뱉었던 분노에 찬 잔인한 말을 상쇄하려다 보니 펼쳐진 것이었다.(411)"
디킨스는 그러나 무능하고 악랄한 귀족이 혁명의 원인이었다는 점은 잊지 않고 기록한다."애초에 모든 법과 형식, 정부의 행사를 무분별하게 남용하지 않았으면 이런 혁명도 일어나지 않았을 터였다. 자멸로 일어난 혁명의 복수심은 그 모든 것을 바람에 날려버렸다.(454)"
비극은 꼬리를 물고 되풀이된다. 복수의 원한을 끊을 수 있는 건 용서 뿐이다. 비극에 비해 희생은 너무 무력한 선택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한 인물의 남다른 선택이 더 빛난다. 우리는 누구나 별같이 빛나는 삶을 살고 싶어한다. 별은 너무 높다. 대개 우리는 별이 바라보는 위치에서 살 수 있을 뿐이다. 기요틴에서 목이 잘린 한 죄수가 '숭고한 예언자' 같은 얼굴을 한 이유는, 그가 생의 어둠을 견디다 마침내 가장 뚜렷한 한 점의 빛으로 죽었기 때문이다. 강렬하게, 열정적으로 사는 건 고통스럽다. 그 고통이 우리를 죽일 수도 있다. 그렇기에 그 고통은 숭고하면서 동시에 쾌락적이다. 그가 살면서 가장 가치있는 일을 한 순간, 그는 별이 되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