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눈 마음을 여는 따뜻한 이야기 1
위베르 멩가렐리 지음, 김문영 옮김 / 샘터사 / 2003년 2월
평점 :
절판


여기, 소리내어 울지 않는 아이가 있다. 눈물은 언제나 그저 줄줄 흘러내린다. 아이의 아버지는 죽어가고 있다. 아이는 감정을 좀처럼 표현하지 않는다. 아이는 어느날 갑자기 솔개를 희망한다. 새장에 갇힌 솔개를 집에 데려오고 싶어한다. 그 솔개는 아버지와 아이를 연결해준다. 아이는 있지도 않은 솔개 사냥 이야기를 들려주며 병석의 아버지와 소통한다. 그러나 아이는 가난하다. 아버지의 연금과 아이가 양로원 노인들과 산책을 하는 대가로 받는 불규칙적인 임금이 수입의 전부다. 아이는 돈을 모으고 또 모은다. 가게 앞에서 언제나 솔개를 바라본다. 그 솔개가 겨울에 얼어죽지 않기만을 기도한다. 하지만 아이의 소망은 너무 멀어 보인다. 아이는 가난하지만 부끄러움을 알고 염치가 있다. 아이는 공짜로 커피를 마시는 아저씨에게 모은 돈으로 고급 커피를 사다드린다.

어느날 아저씨가 아이에게, 자기 누이가 고양이를 처분해달라고 했다며, 넌지시 그 일을 제시한다. 곧 울듯이. 아이는 그 비열한 제안을 수락한다. 그리고 작은 고양이 영혼들이 떠도는 집에서 울지 않는 아이는 깊은 우울에 시달린다. 아이가 고양이를 익사시켜 죽였다는 이야기를 들은 양로원의 한 노인은 늙고 병든 개를 맡긴다. "꼭 하지 않아도 돼."라고 아저씨가 물었지만 아이는 덤덤하게 "할게요",라고 말한다. 그리고 아이는 눈이 많이 온 그 날, 그 개와 함께 철길을 걷고 걷고 또 걷는다. 개가 더는 못 따라올 때까지 멀리 가서, 개를 버리고 온다. 그러나 개줄이 떨어진 자리와 개발자국을 보고 숨이 막힌다. 울지 않으려면 생각하지 않는 수밖에 없다. 생각하지 않으면 슬프지 않을까? 아이는 작은 울음이다. 아저씨가 "세상에, 우리가 무슨 짓을 한 거지?"라고 했을 때, "그 일은 제가 했잖아요."라고 아저씨를 위로한다. 그리고 결국 아이는 솔개를 산다. "빌어먹을, 넌 그 솔개를 사서 대체 뭐하려는 거야?"라고 소리치는 상인을 뒤로 하고, 아이는 그동안 닦고 또 닦았던 새장 속에 솔개를 넣는다. 아버지에게 이젠 좀 더 실감나는 솔개 사냥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다. 솔개에게 먹이를 주는 그 순간의 의례적인 대화는, 아버지와 아들의 안부 인사다. 그러던 어느날 죽음을 예감한 아버지가 말했다.

"방법은 모르겠지만, 어쨌든 난 너와 영원히 함께 있을 거다."
아버지의 그 말씀에 나는 갑자기 목 뒤가 쭈뼛해지더니 무언가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나는 입으로 숨을 내쉬었다. 소름은 몸을 타고 계속 내려가 무릎까지 내려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소리 없이 나를 텅 비워버렸다. 아버지는 내 상태를 짐작이라도 한 듯 속삭이셨다.
"아...미안하다. 나를 용서해다오."

아버지가 죽고 나서, 아이는 솔개를 갖고 있다는 실감을 더는 갖지 못한다. 그리고 여전히 울지 않는 아이는, 조용히 부츠에 윤을 낸다. 우는 건 어머니다. 아이의 어머니는 무심하다기보다 잔인하다. 아이의 어머니는 일도 하지 않으면서 밤마다 어디론가 사라져 새벽에 들어온다. 어머니는 아이를 종종 끌어안고 운다. 그리고 밤에 외출할 때 스위치를 켜고 계단을 내려가 아버지의 잠을 설치게 만든다. 아이는 어머니에게 스위치를 켜지 않고 계단을 내려가는 법을 알려준다. 그런 아이다.

많은 사람들이 소설을 불필요한 읽을 거리라 여기고 있다. 아마도 고등학교 때 읽은 텍스트가 전부인 사람도 많을 것이다. 소설을 무용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현실이 소설을 압도하기 때문에 읽을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혹은 남는 게 아무 것도 없어서, 라고도 말한다. 인문서적이나 실용서적에 비해서 소설읽기는 말 그대로 유흥에 불과한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런 소설들도 많다. 아무 것도 남지 않는, 재미도 의미도 없고, 그저 종이 위에 적힌 문자인 말들. 이제 갈수록 문자와 예술을 가려내기가 힘들어진다. 책을 팔기 위해 말은 과장되고, 자아를 발전시키기 위한 독서는 뒷전으로 밀려나 있고, 자기 복제만이 가득하다. 발칙한 척은 하지만 실제로는 제도권에 충실한 소설만이 제도권 안에서 살아남는다. 그러니까 발칙한 척은 하되 제도를 공격해서는 안 되는 '착한 소설'들이 넘쳐난다.

그런데 작고 진실한 목소리가 있다. 거창한 이야기가 없으면서도, 이런 이야기들은, 삶을 되돌아보게 한다. 단순한 추체험이 아니라 남의 마음 속에 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울지 않는 아이의 마음을 경험하게 한 '마지막 눈'도 그러했다. 아이는 사랑하는 아버지를 위해, 걷고 달리고 말하고 일한다. 때로는 결코 잊을 수 없는 충격적인 일도 저지른다. 그 일은 아마 아이가 죽을 때까지 떠다닐 것이다. 죽은 고양이와 개의 영혼이 아이를 목쥘 것이다. 아이는 자신이 한 일을 방어하지도 않고, 죄책감을 느껴 짐을 떨쳐내려고 하지 않는다. 오롯한 자기의 몫으로만 남겨, 그 고통을 받아들인다. 도대체 이 작은 아이는 어떻게 이런 모습을 보일 수 있을까. 입술을 깨물지 않으면서도 그저 줄줄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아이는, 얼마나 큰 가슴의 구멍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 그것이 너무 아프다. 소설은 한 문장 한 문장이 아리다. 말하지 않음으로 슬픔을 말한다. 아마도, 효용이라고 한다면 이런 것이 아닐까. 인간다운 삶에 대한 탐구. 인간임을 잊지 않는, 뜨거운 가슴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한 영혼의 마사지. 그리고 울고 싶고 웃고 싶어도 그러지 못하는, 감정의 정화. 김영하가 추천사에서 밝힌 '촉수 낮은 전구의 카타르시스'가 여기에 있다. 김영하의 헌사는 전혀 과장되지 않았다. 이 아름다운 이야기를 읽고, 아이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고 싶지 않을 수 있을까.

이 감동적인 이야기는, 요약과 작품이 너무 다르다. 줄거리만으로 말해지지 않는 소설, 감정을 흔들고, 가슴을 떨리게 하는 소설, 그런 소설을 나는 좋아한다. 우리 시대의 어느 이야기도, 이런 방식으로 써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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