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두둔하는 악마에 대한 불온한 이야기
정영문 지음 / 세계사 / 2000년 3월
평점 :
품절


정영문 소설의 지독하게 자폐적인 감성이 맘에 든다. 어떤 작품은 읽다가 졸음이 온다. 잠 안 올 때 읽기엔 제격이다. 하지만 불면의 밤에 카프카를 읽듯이, 이 몽환적인 작품 세계는 나를 늘 기이한 기대 속에 빠져들게 한다. 무엇보다도 절대로 대중적이지 않은 어투, 동어반복적 서술들, 의미 없고 기운 없고 회의적이고 황당하고, 답답한 진술들, 하지만 그 안에 숨어 있는 강한 광기가 나를 사로잡는다. 물론 내가 이런 소설을 쓰고 싶은 건 아니다. 좋은 소설을 읽을 땐 작가를 닮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만, 이 경우엔 좀 다르다. ‘즐김’과 ‘창작’의 영역은 다를 수도 있으므로.

‘괴저’. 이 작품은 정말 카프카적이다. 어느 날 일어났더니 벌레가 되어 있었다, 가 아니라 어느 날 일어났더니 그의 몸에 곰팡이가 피어 있었다, 라는 거다. 괴저[壞疽]는 혈액 공급이 되지 않거나 세균 때문에 비교적 큰 덩어리의 조직이 죽는 현상이라고 한다. 그는 죽어간다. 거기에는 이유가 없다. 그냥 몸에서 ‘푸른 가루가 떨어지면서’ 부패해가는 것이다. 가난한 농가에서 닭을 키우는 그의 부모는, 그의 병이 그들의 노후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할까 걱정한다. 죽어가는 그의 눈에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의 ‘본질’이 보이는 듯 한다. 그의 집에는 발육이 덜 된 것 같은 작은 네 마리의 닭이 있다. 그 닭은 모이를 자주 주는 데도, 성장이 더디다. 마치 ‘일종의 무서운 태만이 닭의 성장을 가로막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12)’. 길거리에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개나리를 보면서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보라.

개나리는 저게 좋은 모양이지, 그는 혼자 중얼거렸다. 그래, 봄이니까, 봄이 되면 개나리는 하는 수 없이 꽃을 피우게 되지. 말하자면, 습관적인 것이지, 그는 생각했다. 그게 개나리가 하는 짓이니까, 그러고 싶지 않더라도 어쩔 수가 없지. 개나리로서도 하는 수 없겠지. 그의 생각은 곧잘 그렇게 부정적인 것으로 기울었는데, 특별히 그에게 악의가 충만해서는 아니었다. 단지 그는 부정적으로 사고하는 데 익숙해 있었다.(14)

그의 ‘괴저’를 발견한 아버지의 반응 역시 그로테스크하지만, 지극히 자연스럽다.

그때 갑자기, 그 어색함을 깨며, 아버지가, 마치 네 얼굴에 곰팡이가 핀 것 같구나, 하고 말했다. 자신의 말에, 그의 아버지는 웃음을, 약간의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물론 그것은 적절한 웃음은 아니었다. 또한 그의 이야기는 웃을 만한 성질의 것도 아니었으며, 그렇게 웃는 것이 아버지로서의 도리도 아니었다.(..)그것은 어쩐지 허름한 웃음이었다. 어머니 또한 웃었는데, 그녀는 아버지가 웃을 때면 늘 따라 웃곤 했다. 그녀는 남편과 오랜 세월을 함께 하는 동안, 자신의 감정에 따르지 않고서도, 남편의 감정에 따르는 습관을 훌륭하게 익혔던 것이다. 그들의 웃음은 그들의 비참하고 볼품없는 삶을 위로하고, 견딜 수 있게 하는 것이 아닌, 차라리, 솔직한 감정을 감추고, 그 보품없는 삶을 위장하고, 그것을 끝없이 이어지게 하는 얄팍하고 뻔뻔스런 막이었으며, 서로를 질기게 이어주는 거북한 끈과도 같은 것이었다.(19)

죽어가는 그의 의식.

그가 예상한 것은 눈이 멀거나, 귀가 먹거나, 다리를 못쓰게 되거나, 후각을 상실하게 되거나 하는 것이었다. 그의 병은 그의 모든 예상을 깬 것이었다. 하지만 크게 염려되거나 하지는 않았다.(24)

작가의 다른 작품에는 ‘후각 상실’도 있다. 모든 감각을 하나씩 마비시키는 소설이라도 쓸 참인가?

부모는 그의 심상치 않는 병 때문에 비용에 대한 부담을 무릅쓰고, 의사를 찾아간다. 역겨운 요소란 대부분 갖추고 있던 그 의사는, 그의 병을 관찰하면서도 ‘시종 미소를 잃지 않았는데, 그것은 타인의 불행을 감내하는 것이 얼마나 쉬운 것인지를 보여주는 미소였다’. 의사는 부모를 따로 불러, 그가 죽게 될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그를 ‘자신의 필요에 따라 연구할 수 있는 권리를 갖는 대가로 거액을 제시했다’. 그리고 입원한 이후, 그의 몸은 ‘하루가 다르게, 몰라볼 정도로 악화되어 갔다. 거의 비약적인 발전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한동안 상태가 호전된 듯도 보였지만, 그것은 더 나빠지기 위한 준비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병의 경과가 그의 예상보다 훨씬 극적인데 어느 정도 흥분이 되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그는 갑작스럽게 그 증상이 나타난, 그를 정복해버린 그 병이 그의 몸 속에서, 그리고 어쩌면 그가 의식치 못한 그의 의지 속에서 오래 전부터 치밀하게 준비되어온 것처럼 여겨졌다. 그는 그의 몸 위에 쓰여지고 있는 그 재앙이 조짐이 싫지 않았다.(31)’ 그리고 그의 몸에서는 냄새가 진동했다. ‘그것은, 뭐라고 말하기 힘든, 이 세상의 어떤 냄새와도 같지 않은 냄새였다. 하지만 그의 부패해가고 있는 몸은 그에게 아늑한 느낌을 주었다. 그의 몸에서는 감미로운 썩은 사과 향기가 났다. 그것은 어떤 방향제의 냄새와도 비슷했다.(31)’ 그리고 죽음이 가까워진 그는, 퇴원을 해서, 마당에 있는 닭을 도살한다. 죽음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재앙은, 바로 교회로부터 시작되었다. 그의 부모가 변변치 않은 믿음을 지니고 다니고 있던 교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그를 찾아왔다. 제발 이 사람들을 나가게 해 달라는 그의 기도를 하나님은 들어주지 않았다.

투명한 빛 속에서, 사람들의 웅성거림 속에서 먼지들 또한 시련을 겪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사람들은 그를 고문하는 기도를 올렸고, 찬송가를 세 곡씩이나 부른 뒤에도 나가지 않았다.(..)그는 자신도 모르게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아니, 그것은 미소라기 보다는 비웃음에 가까운 웃음이었다. 그는 자신의 병에, 그리고 자신의 죽음에 그의 운명의, 그리고 동시에 운명에 대한 그 자신의 비웃음을 싣고 있는 듯 했다. 하지만 그를 에워싼 사람들은 그의 미소를 그의 편안한 죽음의, 그리고 은총의 증거로 생각했다.(..)그의 매장이 끝난 후에도 무덤가에는 한동안 찬송가가, 마치 어떤, 쉽게 물러가지 않는 악취처럼 울려퍼졌다. 하지만 죽은 그에게는 상관없는 일이었다.(39)

소설에 나오는 서사란 대개 간단하다. 한 노인이 그에게 동거를 제안해서 ‘혼자 있는 것이 아니면서 아무와도 살지 않는 듯’ 살기도 하고, 이웃 중의 하나가 그를 초대하여 맛없는 음식을 대접하거나, 동네 아이가 그와 낚시를 간 후 혼자 자살하는 이야기 정도다. 화자는 보통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정보’가 없다. ‘내가 어디에서 왔으며, 그 전에는 무엇을 했는지 아는 사람도 없었다. 그 점과 관련해서 남들보다 좀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을 게 틀림없고, 알고 있어야 하는 게 당연한 나로써도 기억에 남아 있는 게 별로 없었다(78)’는 것이다. 타인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그는 진지하지도 않으며, 어떤 의미를 두지도 않는다. 따라서 타인이 그에게 베푸는 친절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없다. 동거를 제안한 노인에 대하여, ‘그의 속셈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나의 모습에 반했을 리는 없다. 또한 말동무가 필요해서라는 것은 이유가 될 수 없었는데, 그건 내가 누구에게도, 나 자신에게조차, 좋은 얘기 상대가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라고 서술한다. 기묘한 동거나, 의미 없는 초대, 무료한 낚시 등이 반복되면서, 지루한 생의 한 지점이 적나라하게 보여진다.

또한 그의 소설에는 여러 가지 동물이 나오는데, 오리나 닭, 염소 등이다. 그들 동물은 오히려 그보다 더 인간적인 삶의 의지를 가지고 있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화자보다 고집이 세고 ‘자신의 말조차도 듣지 않는 것 같은’ 염소나, 성장하기를 거부하는 닭, 그를 깔보고 그의 무료한 일상을 방해하는 거위 등이 그렇다. 동물들과 그의 관계는 우스꽝스럽다. 인간보다 인간적인 동물에 대한 묘사가 작위적이지 않은 것은, 생의 의지를 잃은 무위의 인간에게는 당연해 보인다.

‘어두운 화면 위에 떠오른 느슨한 말들’은 작품은 말 그대로, 작가의 단상들을 모은 것이다.

그는 자신의 글의 주인공에게 도덕에 반하는 것이 아닌, 도덕과는 무관한 역할을 맡기고 싶어한다.(48)

그는 자신이 아무런 꾸밈 없이 표현할 수 있다고 느끼는 것은 적의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 생각을 한다.(50)

그는 악을, 하나의 숭고한 소명처럼 행할 수는 없을까라는 생각을 해 본다.(51)

그는 자신의 욕망이 크기나 강도나 아닌, 농도, 아니 그보다도 점도로만 측정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껍질의 상처로 흘러나오는, 고무나무의 수액과도 같은.(53)

그의 피로의 대부분은 그의 무리한 무위의 생활에서 오는 것이다. 그는 그의 무위에서 작위를 느낀다.(55)

그는 그의 글쓰기가 수명의 단축을 대가로 치러지는 의식의 한 형태라는 사실을 똑똑히 인지하고 있다.(58)

뭔가에 대한 재능의 부족이 다행인 경우가 있다. 가령, 대중적인 글을 쓸 수 있는 재능의 결핍에 대해 그는 감사한다.(61)

그는 그의 구원자를 자처하는 희망보다는 그의 배반자 행세를 하는 절망과 손을 잡는 편이 마음이 편하다.(61)

그는 조국을 떠나지 않았음에도, 스스로를 망명자로 생각하고, 그렇게 처신하고 있다.(65)

그의 삶은 외양에 있어서는 그지없이 평화로웠지만, 언제나 위기 상태에 처해 있었다. 그는 한 가지 위기에서 벗어나는 순간 그보다 더 큰 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는 한 가지 위기에서 벗어나는 순간 그보다 더 큰 위기에 처해왔다. 또다른 궁지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면서 이전의 궁지로부터 벗어나는 식이었다.(66)

삶에 대한 이토록 담담한 냉소, 의식을 밑바닥까지 들여다보는 끈질긴 서술, 삶을 하나의 점에 끄트러매고 그것을 바라보는 자의 시선, 그것이 나를 즐겁게 한다. 현실이 환상처럼 느껴지고 환상이 오히려 현실다운 서술들은 읽는 것만으로 재미가 있다. 하나의 세계에 천착하여 끊임없이 펜끝을(아니면 손가락끝을) 벼리는 작가에게 경의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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