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년 한림신서 일본현대문학대표작선 1
다자이 오사무 지음, 유숙자 옮김 / 소화 / 1997년 10월
평점 :
품절


다자이 오사무는 마흔 살에 여자와 동반자살했다. 동반자살을 시도했다가 혼자 살아남은 전력도 있다. 그때의 경험은 ‘광대의 꽃’에 그러져 있다. 그는 죽음을 결심하고 이 소설들을 썼다고 한다. 일종의 유서인 셈이다. 죽음을 의식하는 스물 일곱의 청년. 돈을 많이 벌어 권위를 가지게 된 집안의 여러 아들 중의 하나. 형들과 동생과 비교되는 삶 속에서, 자신만의 삶을 찾아 고심했던 자전적인 이야기가 주를 이루고 있다. 그의 의식세계는 죽음을 당면한 인간의 실존을 보여주고 있다. 사실 죽음을 의식하지 않을 수 있는 인간이 어디 있겠는가. 다만 관성의 일상 속에서, 그 무서운 의식을 멀리 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그의 이야기들은 기묘하다. 살아있지만 이미 죽어 있는 사람처럼 느껴지는 말투다. 유년 시절의 추억을 이야기하지만, 전혀 즐겁지 않다는 투다. 누군가는 이 소설에서 ‘청춘’을 언급했지만, 소설을 쓴 작가의 나이만 청춘이었을 뿐, 세상 다 산 노인네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 같다. 결국 청춘이란, 죽음을 망각하고, 마치 죽지 않을 것처럼 열정적으로 사는 시기를 말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은 죽음 앞에 선 한 인간, 고귀하고 귀족적이고자 하지만 늘 스스로 열등 의식에 사로잡히는 늙은 인간의 인생기에 가깝다.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로마네스크’이다. 세 인물의 이야기가 모자이크처럼 짜여 있다. 선술 다로의 이야기부터 시작된다. 태어날 때부터 ‘하품’을 한 이 아이는 모든 것을 시시해했다. 어머니의 젖을 먹는 것도 귀찮아하고, 아이들다운 놀이에도 흥미없어 했다. 그리고 세 살이 된 어느 날, 혼자서 4킬로미터가 넘는 곳까지 걸어갔고, 돌아와서는 ‘백성의 아궁이는 풍성하도다’라는 예언(?)을 했다. 그리고 그 예언은 풍년이 옴으로써 적중했다. 그러나 이 아이는 결국 게으름뱅이가 될 수밖에 없었다. 어느 해 홍수가 나서, 열 살인 다로가 모두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성으로 가서 영주에게 선처를 구했다. 운 좋게도 다로는 목숨을 잃기는커녕 포상까지 받았다. 그러다 어느 날 다로는 ‘선술’이 적혀 있는 책을 발견했다. 쥐도 되어 보고 독수리도 되어보다가 미남자가 되는 방법을 익혔다. 사랑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책은 ‘너무 오래 되었던’ 것이다. ‘얼굴 빛이 얼빠진 듯이 희고 볼 아래가 불룩이 살이 쪄 통통했다. 눈은 가늘고 콧수염이 길게 나 있었다’(마치 일본 그림에서 본 듯한 인상이다). 

다음은 싸움 지로베에다. 지로베에는 어느 날 기필코 싸움 잘 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하며 수련을 시작한다. 그러나 그 수련을 써먹을 대상이 없었다. 지로베에가 너무 대단해보였기 때문에 아무도 도전하지 않았다. 그러다 지로베에는 술을 먹다가 싸움에 강한 것을 말하다가 실수로(?) 신부를 죽이게 되어 감옥에 갇히게 된다는 이야기다.

마지막은 거짓말 사부로. 사부로는 학자이자 지독한 구두쇠인 아버지 때문에 거짓말을 하기 시작했다. 이웃집 애견을 죽이고, 친구를 죽이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거짓말은 들키지 않았다. 살인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사부로의 거짓말은 점점 불어났다. 학교에 간 사부로는 ‘부모님께 돈 많이 보내주게 하는’ 편지를 써서 유명해진다. 그리고 곧이어 소설을 쓰게 된다. 사부로의 거짓말은 ‘신의 경지에 도달해 있어 자신이 이렇다고 속일 때는 모두 진실의 황금으로 변해 있었다’. 사부로의 아버지는 유서에 ‘나는 거짓말쟁이다. 중국 종교에서 마음이 멀어졌지만 사람들에게는 계속 그것이 옳다고 강요했다.’라고 썼다. 

주먹만한 돌멩이가 느릿느릿 기어가는 걸 보았다. 돌이 기어가고 있군. 그저 그렇게만 생각했다. 그러나 그 돌멩이는 그의 앞을 걸어가는 지저분한 아이가 실에 매달아 끌고 있는 것임을 금방 알 수 있었다. 아이에게 속임을 당한 것이 쓸쓸한 것은 아니다. 도무지 일어날 수 없는 일을 태연히 받아들인 자신의 자포자기가 쓸쓸했다.(12)

소설을 시시하다고는 생각지 않아. 내겐 그저 분명하지 않을 뿐야. 단 한 줄의 진실을 말하려고 백 페이지의 분위기를 조성하거든.(13)

형은, 자살을 제 흥에 겨운 짓이라고 꺼렸다. 그렇지만 나는 자살을 처세술처럼 타산적인 것이라 생각하고 있던 참이었으므로, 형의 이 말을 뜻밖이라고 느꼈다.(13)

그런 꽃 이름 아니? 손을 갖다대자마자 부서지면서 더러운 즙을 튀겨 순식간에 손가락을 썩게 만드는 그런 꽃 이름을 알았으면.(..)이런 나무 이름 알아? 이 잎사귀는 질 때까지 푸르지. 뒤쪽만이 바삭바삭 말라 벌레 먹은 잎사귀여도 그걸 감쪽같이 감추고는 질 때까지 푸른 척 하는 거야. 그런 나무 이름도 알았으면.(19)

죽는 게 가장 좋은 거야. 아냐, 나만이 아냐. 적어도 사회의 진보에 마이너스 역할을 하는 녀석들은 전부 죽어버리면 되는 거야. 그렇지 않다면 너 말해 봐. 마이너스가 되는 녀석이든 뭐든 사람은 모두 죽어서는 안 된다는 과학적인 뭔가 이유라도 있기나 한가 말야.(20)

받침돌에는 이렇게 새겨줘. 여기에 남자가 있다. 나서 죽었다. 일생을 쓰다 버린 원고를 찢는 데 썼다.(23)

안락한 생활을 하고 있을 때는 절망의 시를 짓고, 패배의 생활을 하고 있을 때는 삶의 기쁨을 기록한다.(30)

나는 잠자리에서 화재의 공포에 이유 없이 괴로워했다. 이 집이 타 버리면 하고 생각하니 도저히 잠들 수 없었다.(46)

나는 지고 있는 꽃잎이었다. 약간의 바람에도 파르르 떨었다. 타인으로부터 아무리 사소한 멸시를 받아도 죽을 듯이 괴로웠다. 나는 자신이 이제 곧 훌륭한 사람이 될 거라고 생각하였고 영웅으로서의 명예를 지켜 가량 어른이 얕보는 것조차 용서할 수 없었으므로 이 낙제라는 불명예도 그만큼 치명적이었던 것이다.(57)

완전히 멍하게 있어 본 경험이 그때까지의 나에게는 없었다. 뒤에서 누군가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나는 언제나 뭔가 태도를 꾸미고 있었다.(..) 나는 모든 일에 대해 만족할 수 없었으므로 늘 공허한 발버둥을 치고 있었다. 나에게는 열 겹 스무 겹의 가면이 착 달라붙어 있어서 어느 것이 얼마나 슬픈지 확인을 해볼 수가 없었다.(..)나는 어떤 쓸쓸한 배출구를 발견했다. 창작이었다. 여기에는 많은 동류가 있어서 모두들 나와 똑같이 이 정체를 알 수 없는 떨림을 응시하는 것처럼 생각되었다.(67)

게다가 한번 상처입으면, 상대를 죽일까, 내가 죽을까, 꼭 거기까지 생각을 몰아간다. 그래서 논쟁을 싫어하는 것이다. 그들은 대충 얼버무리는 말을 많이 알고 있다. 아니라는 한 마디조차 열 종류 정도는 힘들지 않고 다양하게 사용해 보일 것이다. 논의를 시작할 때부터 이미 타협의 눈동자를 교환한다. 그리고 마지막에 웃으면서 악수하고는 속으로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 이렇게 중얼거린다. 바보 녀석!(121)

언제부터 그런 습성이 배기 시작했을까. 웃지 않으면 손해본다. 웃어야 할 어떤 사소한 대상도 놓치지 마라. 아아, 이거야말로 탐욕스런 미식가의 덧없는 편린이 아닌가. 그런데 슬프게도 그들은 진정으로 웃을 수 없다. 배를 잡고 웃으면서도 자신의 자세를 신경쓴다. 그들은 또 남을 잘 웃긴다. 자신을 상처입히면서까지 남을 웃기고 싶어한다.(125)

그들의 논의는 서로의 사상을 교환하기보다는 그때그때의 분위기를 기분 좋게 마무리하기 위해 행해진다. 무엇 하나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 그렇긴 해도 한참 듣다보면 예기치 않은 수확을 거두는 수가 있다. 그들의 과장된 말 속에 때로 깜짝 놀랄 정도의 솔직한 느낌이 전해지기도 한다. 부주의하게 흘리는 말이야말로 진실된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다.(129)

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불쌍한 건 여기 있는 요조가 아니라 요조와 똑같은 처지에 있던 때의 자신, 혹은 그런 처지에 대한 일반적인 추상이다. 어른은 그런 감정에 능숙하게 훈련되어 있어서 쉬 남을 동정한다. 그리고 감동 잘하는 자신에 대해 자부심을 갖는다. 청년들도 역시 때로 그런 안이한 감정에 젖는 수가 있다. 어른은 그런 훈련을 우선 호의적으로 말해, 자기 생활과의 타협에서 얻는다고 하면 청년들은 도대체 어디에서 배운 것일까. 이런 시시한 소설에서?(140)

노인의 긴 생애 가운데 거짓말이 아니었던 것은 태어난 것과 죽은 것, 두 가지였다. 죽기 직전까지 거짓말을 했다.(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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