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나는, 내가 어떤 부류의 예술을 좋아하는지 깨달았습니다. 그건 내가 아직도 어떤 사람을 이상형으로 생각하는지 확신하지 못하는 것에 비하면 훨씬 명확합니다. 나는 특히 당신(들)의 소설을 좋아합니다. 특히 당신(들)의 소설에서 나는 보다 인간답게 살고자 하는 의지, 그리고 완성에 다가서고 싶은 인간의 욕망을 봅니다. 사실 좋은 예술품은 마음에 비슷한 감동을 불러일으킨다고 생각합니다. 매체가 다를 뿐, 위대한 정신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같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그렇게 기쁨을 줄 수 있는 예술을 값싸게 즐길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가요. 저는 그런 예술이 없었다면 삶의 기쁨을 거의 느끼지 못했을 겁니다.
그러다 나는 <그리스 비극에 대한 편지>(김상봉, 2003)을 읽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왜 특정한 작품들에 감동을 느끼는지, 그 이유를 어슴푸레 파악하게 되었습니다. 보통 그리스 비극이라는 말을 들으면 저는 상투적으로 오이디푸스 왕의 이야기를 떠올렸습니다.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는 비극적 운명’을 타고났기에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용어로 더 유명한 사람이지요. 그리고 호메로스의 서사시나 그리스 서정시, 그리스 비극은 그저 머나먼 옛 이야기로, 고리타분하고 뭔가 시대착오적일 거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합창이나 과장되고 극적인 어투에 도저히 적응을 할 수가 없었죠. 하지만 저자 덕분에 저는 그리스 비극에 대해 조금이나마 지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 비극이 어쩌면 예술의 본령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되었습니다.
먼저 그리스 비극은 그리스가 정치, 문화, 군사적으로 찬란하게 발전했던 기원적 5세기 때 쓰여진 것이라는 사실부터 언급하고 싶습니다. 물론 그리스인들은 물질적인 크기를 예찬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한편 호메로스의 정체에 대한 논란이 분분한 것은, 그의 작품들이 일종의 구전-즉 그리스인들의 공동창작에 가까웠기 때문일 거라 저자는 추측합니다. 아무튼 제가 놀란 것은, 그리스 비극은 고통스러운 시대의 산물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그들은 어둠이 없는 빛, 죽음이 없는 삶은 없다는 통찰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풍요롭고 자유로운 환경 속에서 비극이 태어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는 고통 자체에 탐닉한 것이 아니라 <존재의 한계가 정신의 크기를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을 그들이 알았기 때문입니다. 즉 그리스 비극의 상상력은 <존재하는 어둠 속에서 존재하지 않는 빛을 상상하는 힘>이 아니라 <존재하는 빛 가운데서 존재하지 않는 어둠을 상상하는 힘>(81)에서 나옵니다. 사실 슬픔 속에서 기쁨을 떠올리는 것이, 기쁨 속에서 슬픔을 떠올리는 것보다 훨씬 쉽습니다. 그래서 저자는 이런 <부자연스러운 상상력>이 그리스인들의 정신의 크기를 보여준다고 감탄합니다. 비극 작가들이 행복 가운데 고통을 상상한 것은, <인간 존재의 어쩔 수 없는 한계를 상기할 때 삶이 참된 진지함을 획득하기 때문이며, 인간이 그 한계에 부딪힐 때 당할 수밖에 없는 고통을 통해서만 보이지 않는 정신의 크기를 그려보일 수 있기 때문>(83)입니다.
또한 그리스 비극은 <당함의 비극, 노예의 비극>이 아니며, <자유인의 비극, 행함의 비극>이라고 합니다. 즉 그리스 비극은 제도나 관습에 얽매인 수동적 당함이 아니라, 능동적인 행위에 의한 비극입니다. 예컨대 오이디푸스는 신탁을 듣고 운명을 따르지 않으려고 집을 나가는데, 오히려 이 행동이 비극적 결말을 초래하게 됩니다. 정의롭다고 믿은 능동적 행위가 파멸적 운명으로 그를 이끈 것이지요. <의도와 결과의 불일치-하마르티아>를 낳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인의 힘이나 노력으로 제거할 수 있는 고통을 게으름, 비겁함 때문에 겪고 있는 상황은 그리스 비극과 거리가 멉니다. 심지어 사회적 약자라 할지라도 자신의 주체적 의지를 끝까지 밀고 나가는 인물이 어떤 숭고한 행위에 의해 겪게 되는 일이 비극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숭고한 행위란 <완전히 실현된 행위, 모든 정성을 다 바쳐 최선을 다해 자기를 전개하여 극한에 도달한 행위>(48)입니다. 합리적 정신을 통해 왜냐고 물을 수 있는 것은 자유인의 몫입니다. <자유인은 삶의 주인, 모든 일에 대해 스스로 결정하고 결과에 책임을 지는 사람이고, 언제나 왜라고 묻고 합당한 이유에 따라 행동하는 존재>라고 저자는 정의합니다. 자유인은 자신의 삶에서 일어나는 일의 근거를 찾으며 삶을 총체적인 문맥에서 이해하려 노력한 뒤, 법칙에 따르려 합니다. 하지만 거기에는 피할 수 없는 장애-즉 고통이 존재합니다.
그렇다면 그리스 비극에서 말하는 슬픔이나 고통은 무엇일까요? 저자는 우리의 슬픔을 이기심과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고 합니다. 보통 우리의 슬픔은 <채워지지 않은 욕망의 그림자, 사사로운 욕망, 과도한 욕심이 드리우는 그림자>(51)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지요. 욕망을 이루지 못할 때 느끼는 사사로운 슬픔이 무조건 이기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그 욕망이 어디에서 비롯한 것인지, 욕망이 멈추어야 하는 지점이 어디인지 사유하지 않으면 쉽게 타락할 수 있을 겁니다. 사실 우리가 믿고 있는 것들은 대부분 학습되고 주입된 것입니다. 저자는 우리가 <외적 강제와 편견 고정관념, 유행의 노예이면서 스스로를 자유롭게 주체적으로 믿는 모습>(232)이야말로 우리가 진정으로 극복해야 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욕망 역시 어쩌면 우리가 ‘욕망해야 한다’고 믿고 있는 것에 불과할 수도 있습니다. 진짜 슬픔은 보편적으로 추체험할 수 있는 슬픔입니다. 타인의 안에 조용히 흐르는 슬픔을 관조할 수 있을 때, 우리는 그 슬픔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편 고통이란 무엇인가요? 고통의 체험은 누구에게나 절실하면서 독자적입니다. 더구나 인간 존재 자체가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죽을 운명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에 우리는 필연적으로 고통을 당해야만 합니다. <우리의 능동적 행위와 노력이 아무 쓸모없는 순간이 있다는 것, 그리하여 삶은 표면에 드러난 능동적 행위들의 이면에 어찌할 수 없는 수동적 당함의 구조에 의해 규정되고 있다는 것>(88)이 고통을 유발합니다. 한편 그 고통은 우리가 속한 사회 혹은 제도의 불합리에서 오는 경우도 많습니다. 어떤 심각한 고통은 차라리 망각하는 것이 정신 건강에 유리한 일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기억을 도려내고 싶고, 없던 일로 돌려버리고 싶습니다. 안 그러면 죽을 만큼 괴롭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자는 <고통을 반추하는 것이 고통스러워 반성을 포기하는 순간 우리는 고통에 영원히 사로잡힌다>(97)고 말합니다. 고통에 대한 반성이야말로 우리가 진정으로 거기에서 헤어나올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요.
우리가 죽는다는 그 사실은 태고 이래로 변함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리스인들은 <어찌할 수 없는 운명이라면, 운명 앞에서 나 자신의 주관적 태도를 고상하게>(146)하려 했습니다. 죽을 수밖에 없기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정신, 죽음보다 큰 정신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겁니다. <어차피 죽어야 할 인간으로서, 얼마나 오래 사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고귀하게 사느냐 그리고 또한 그에 걸맞게 얼마나 용감하게 죽느냐를 통해 한 사람의 존재 가치를 평가하려 했던 것>(148)이지요. 그래서 그리스인은 영생이나 내세 따위를 바라지 않고, 다만 영광스럽게 죽기를 바랍니다. <자기의 탁월함을 실현하고, 공동체 속에서 자기의 의무를 다하고자>(151)하는 것입니다. 이는 칸트도 되풀이하는 말입니다. 칸트는 <인간이 존재하는 까닭은 그냥 생존이나 행복한 삶을 이루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인간만이 이룰 수 있는 보다 고귀한 가치, 즉 선을 실현하기 위해서라고 생각>(150)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고귀한 가치, 숭고한 삶이란 개별적인 우리의 삶 속에서 이루기 어려워보입니다. 우리는 호메로스의 서사시에 나오는 영웅도 아니고, 죽지 않는 신도 아니며, 정치적으로 자유로웠던 그리스의 ‘시민’도 아닙니다. 우리의 상황은 2,500년전보다 훨씬 나쁘죠. 하지만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도 그리스 비극 같은 예술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나는 당신들의 소설에서 그러한 면모를 찾으려 애쓰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는 무지한 존재들입니다. 자연에 대해서도 우리가 알 수 있을 정도만 아는데, 그나마 그런 과학 지식도 습득하기 쉬운 게 아닙니다. 더 심각한 것은, 과학이 우리의 삶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말해주지 못한다는 겁니다. <자연적인 필연성-아낭케>는 납득할 수 있어도, <도덕적 정당성-디케>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설명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 왜 이토록 큰 고통스러운 일들이 벌어지는지, 왜 고통을 준 자는 그만큼 되돌려 받지 않는지에 대해서 우리는 무지합니다. <현실은 불순하고 사악하며 정당화될 수 없는 고통으로 가득 차 있다>(316)고 저자는 말합니다. 자연재해는 가난한 나라들에서 빈번하게 일어나고, 나라들 간에 크고 작은 전쟁이 끊임없이 벌어지고, 한 국가 내에서도 온갖 부당한 이유로 사람들이 죽어갑니다. 물론 자연재해야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으니 논외로 한다고 해도, 인간이 만들어놓은 제도는 왜 이토록 불합리한 것일까요? 왜 인간의 문명은 의로운 방향으로 진화하지 않는 걸까요? 더구나 이젠 제도나 체제라는 것 자체가 너무나 거대해서 한 개인은 그 앞에서 심한 무력감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도덕적 정당성을 논하기에는, 각각의 처지가 너무 절박하다고 우리는 변명합니다. 모두에게 사정이 있고, 모두가 힘듭니다. 결과적으로 외부로부터 와서 내가 겪고 있는 이 고통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없고, 이웃의 고통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이 있다면, 도대체 어떤 근거로 그가 자애롭다고 할 수 있을까요? 저는 이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루이스의 <고통의 문제>를 읽었지만, 여전히 의문스럽습니다. 신이 인간을 너무 사랑해서 자유의지를 주었다고 합니다. 모든 인간이 도덕적 정당성에 의해서만 움직인다면 그건 자동인형일 테니까요. 하지만 이런 추상적인 이야기는, 애초에 자유의지를 펼칠 기회도 없이 태어난 사람들에게는 적용되지 않습니다. 누군가 장애인으로 태어나 사회의 무관심 속에서 비참하게 살다 죽었다면, 거기에 무슨 자유의지가 있으며, 신의 사랑이 존재한다는 겁니까? 무자비한 전쟁에서 학살당한 사람들, 의로운 일을 하려다 몰살당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현재 진행중인 이 세상에, 신의 사랑은 어디에 있습니까?
저자는 이에 대해 냉소적으로 말합니다. <하늘나라에서의 영원한 삶에 대한 열광은 땅 위에서 고통받으며 죽어가는 사람들에 대한 냉담한 무관심의 이면이며, 순수한 아름다움에 대한 탐닉은 현실의 추악함을 잊어버리기 위한 마약인 것입니다. 특히 아름다움은 직접적 쾌감을 동반하기 때문에 현실의 비참함을 잊기 위한 탁월한 마취제>(174)라고 말입니다. 종교나 예술이 현실을 외면하기 위한 도구로 쓰일 때, 그것은 추악해집니다. 심지어 저자는 직접 서정주를 거론하며 <기생의 시인>이라 일갈합니다. 권력의 종 노릇을 하는 아름다움, 노예를 자처하는 아름다움은 <장식품이며, 거세된 아름다움이고, 골방에 갇혀 현실을 변화시킬 수 없는 아름다움>이라는 겁니다. 불의한 현실을 고치지 못하기에 다만 망각할 뿐인 예술에 대해 저자는 냉혹하게 비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미적 자율성이 존재할 수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예술지상주의는 참으로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칸트도 미적 판단과 도덕적 판단의 기준이 다르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미와 선이 관련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미와 선은 주관적 인식의 산물이기에, 그들 사이의 관계의 성격을 밝히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저자는 <오직 예술이 삶 전체를 규정하는 원리가 될 때, 다시 말해 그것이 현실 전체를 인도하는 원리가 될 때에만 예술은 진정으로 자율적>(177)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는 바로 <예술이 삶의 자투리 시간의 여흥을 위해서가 아니라 삶을 본질적으로 규정하고 형성하기 위해 존재했던 시대>(178)였다는 겁니다. 참된 아름다움은 보편적인 진리, 즉 총체성을 보여줍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개별자들이 자기의 고유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자기를 통해 서로를 보존하고 아름다운 전체를 이룰 수 있다면, 그것이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최고의 완전성>(182)이라는 것이죠. 저자는 단순히 자연의 모방이라고 여겨지는 미메시스 역시, <상상력의 힘을 통해 아름다운 표상 속에서 존재의 온전함을 반복하고 따라체험하는 운동>(186)이라 해석합니다. 즉 미메시스는 미적 자율성을 이루기 위한 한 방법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방의 본질은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그를 통한 자기 반성에 있다고 저자는 주장합니다. 우리의 운명도 결국 <자기 자신에게 은폐되어 있는 삶의 타자적 이면>(192)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내재적 타자성>을 관조하는 것은, 자기 표현일 뿐만 아니라 자기 실현을 이룰 수 있는 일이 됩니다.
한편 그리스 비극은 세 단계에 걸쳐서 탄생합니다. 호메로스의 서사시에는 시간이 배제되어 있기에, 사건들은 박제된 채 흐르지 않습니다. 서사시에는 완벽한 인간성을 갖춘(심지어 불완전성까지 포함한) 이상적인 인간이 존재합니다. 이는 마치 공동체적 의지로 구현된 인간처럼 보입니다. 요즘 말로 하면, 그리스인의 집단지성이 창조해낸 존재들인 거지요. 한편 서정시 단계로 넘어가면서 ‘주체’가 부각되기 시작합니다. 고통의 탐구나 슬픔의 해석이라는 면에서는 서사시와 유사하지만, 주체의 자기반성이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달라집니다. 인간은 이제 시간 속에서 고통을 겪습니다. ‘주체’는 홀로 있음 속에서 탄생합니다. 하지만 <자기에 대해 말하면서 도리어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삶과 세계에 대해 말해야>(222) 보편적 주체성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개별적 주체와 보편적 주체를 의식하는 ‘시민’이 함께 하는 그리스 비극이 탄생합니다. 주체와 시민이 함께 할 수 있는 곳이 광장이었고, 그리스 비극은 공연예술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즉 <비극은 처음부터 사람과 사람의 만남과 소통을 목표로 하는 예술>(237)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 비극의 두 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합창은 시민의 ‘정신적 합일’을, 대화는 ‘개별적 주체성’을 드러냅니다. <참된 의미의 시민적 주체성과 공공적 이성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자기의 주체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전체를 사유할 수 있는 균형이 요구>(243)됩니다. 저자는 <오늘날 보편성을 획일성과 동일시하고 그것을 비판하는 것은 시대의 유행이 되었다.>(245)고 말합니다. 하지만 보편성은 파시즘적인 획일성과 달리 공동선을 추구하기 위해 필요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다시, 고통의 문제로 되돌아옵니다. 우리는 개별적으로 고통스럽습니다. 그리고 <서로 고통받고 슬픔 속에 있는 존재라는 걸 깨달을 때, 우리는 자기의 좁은 방으로부터 벗어나 타인의 슬픔에 참여하게 됩니다. 그렇게 타인의 슬픔에 참여함으로써만 우리는 타인과 진정으로 만날 수도 있게 되는 것입니다.>(261) 저자는 ‘만남’을 중요한 키워드로 강조합니다. 비극은 타인의 고통을 통해 연민을 불러일으킵니다. 하지만 플라톤은 자기 연민만을 불러일으키는 극은 쓸모없다고 여겼기에, 비극 시인들을 추방해야 한다고까지 말합니다.
<우리는 넘어졌다고 어린애들처럼 다친 데를 움켜잡고 울고불고 하는 데 시간을 낭비해서는 안 되네. 오히려 우리는 넘어져서 아픈 데를 가능한 빨리 치료하고 회복함으로써 의술에 의해 탄식의 노래를 그치게 하는 습관을 가지도록 항상 영혼을 단련시키지 않으면 안 되네.>(285)
그렇기에 슬픔이 다만 감상적인 자기 연민에 지나지 않는다면 비극의 의미는 희미해집니다. 다만 안도하기 위해, 내가 아닌 남의 불행을 목격하기 위해 비극을 본다면, 그것은 얼마나 천박한 일이겠습니까? 루소가 말한 것처럼, 자신도 겪게 될지 모르는 타인의 불행만을 동정하는 값싼 감상주의는 한껏 울다가 금방 되돌아설 수 있게 만듭니다. 감상주의를 통해서는 어둠의 깊이를 들여다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카타르시스는, 단지 감정 정화일 뿐 아니라, <타인의 고통에 동참함으로써 자기의 고통을 초월하고 극복하는 것>(293)이어야 한다고 저자는 주장합니다. 같은 고통을 겪거나 목격하더라도, <공포는 이기적 정념이나 이타적 정념의 원천>(306)이 될 수 있습니다. 불행히도 우리 시대는 공포에 의한 이기적 정념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비극의 힘은 자기 자신의 고통에 대한 연민과 공포의 정념들을 자기중심적인 구심운동으로부터 해방시켜 그것을 타인의 고통, 더 나아가 우리 모두가 같이 겪을 수밖에 없는 보편적 고통에 대한 연민과 공감으로 이행하도록 하는 것>(306)이라 저자는 말합니다. 모두가 겪을 수밖에 없는 본질적인 비극성을 응시하고 성찰하는 것이, 우리를 보편적 주체로 끌어올리는 일인 것입니다. 심지어 <인간은 오로지 타인의 고통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정도만큼만 자기 자신을 괴롭히는 고통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309)고 저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에 저는 크게 감동했습니다. 타인의 고통에 동참하는 행위야말로 우리를 진정으로 해방시켜 주는 것입니다. 그 어떤 부유한 권력자(예컨대 이건희)도 고통으로부터 최종적으로 면제된 것은 아니니까요. 진짜 카타르시스는 <편협한 이기심과 고립된 개별성에서 벗어나 열린 광장에서 타인과 만나고 더 나아가 보편적인 주체성에 참여할 때 느끼는 기쁨>(310)으로 재정의됩니다. 그것이 우리의 사사로운 고통이나 번민을 가볍게 만들고, 정신을 넓혀줍니다. 타인과의 만남이야말로 우리의 삶을 확장하고, 진정으로 삶을 긍정하게 한다는 것이지요. <고통을 통해서만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명랑함이야말로 그리스 비극이 보여주는 정신의 크기요, 숭고>(314)입니다. 이는 삶에 대한 무조건적인 긍정이나 도취가 아니고, 초인의 무감동이나 신적 초월이 아닙니다. 만남이 이루어지는 광장을 꿈꾸는, 시민의 명랑함입니다.
결론적으로, 그리스 비극의 정신은, 지금 여기, 오늘의 현실에서도 충분히 유효한 것이었습니다. 비록 삶이 고통으로 가득차고 죽음이라는 비극을 향해 질주하고 있더라도, 숭고하게 살 수 있는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는 것입니다. 그 방법은 우선 타인의 고통에 동참하는 일입니다. 우리에게는 비극적 감수성이 절실합니다. 저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타인과 대화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이 대화는 화기애애한 것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리스 비극의 대화는 인물들의 적대적 논쟁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적의 눈물을 존중하는 시대의 논쟁은, 결국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한 시도였습니다. 우리 역시 더 섬세하게 현실을 분석하고, 치열하게 쟁점을 논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고통이 만연한 시대에, 비극적 존재일 수밖에 없는 우리가 택할 수 있는 인간다운 삶이라고 믿습니다. 누군가는 부질없다고 할지 모르지만, 저는 여전히 문학이 비극적 감수성을 불러일으킬 하나의 수단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지금, 보다 인간다운 삶을 꿈꾸며 글을 쓰고 있는 사람들은, 그리스 비극 시인들의 후예가 아닐는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