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뜬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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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지투표가 모든 일의 시작이었다. 과반수의 사람들이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어느 정당에도 투표하지 않았다. 그건 정당한 항의였다. 기권도 아니고, 선택도 아니다. 선택하지 않음을 선택한 것이다. 수도에서 일어난 이 기이한 투표에서 승리한 정당은 없었다. 정부는 시민의 신뢰를 얻는 데 실패했다. 그래서 대통령과 총리, 장관들은 민주주의가 도마 위에 올랐다고 개탄했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건재했다. 시민은 자발적 백지 투표를 함으로서 뭔가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말하려 했다. 권력의 뜻대로 움직이는 민주주의가, 도마 위에 오른 것일 뿐이다.

극소수의 예외를 제외하면 투표 내용을 묻는 출구조사에 완강한 침묵으로만 대응한다는 점이었다...이 벽은 모두가 공유하는 비밀, 모두가 지키기로 맹세한 비밀을 둘러싸고 세워진 것 같았다. 서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 똑같은 생각을 하지 않는 사람들, 서로 다른 사회 계급이나 계층에 속한 사람들 수천 명이 이런 행동의 일치를 보인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불가능하다고까지는 할 수 없어도 놀라운 일이었다.(40)

국가의 주인은 누구인가? 사실은 국민이 뽑아놓은 대표들이다. 그들이 정책을 결정하는 데에는 그들 자신이 속한 정치적, 경제적 계급의 복지와 행복이 가장 우선시된다. 이는 국지적인 상황이라고 볼 수 없다. 물론 모두의 입장에서 행복한 그런 국가는 존재하지 않는다. 행복을 이루는 방법은 다양하므로, 완전한 보장이란 애초에 불가능하다. 최소한의 국민이 고통을 덜 겪을 수 있도록 노력하는 방법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주지하다시피,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는 일심동체가 되어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변형되었다. 이 시스템 아래에서,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생겨난다. 소수의 지배자와 다수의 피지배자가 조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제도와 법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투표라는 이름의 권리는 피지배자들에게 유일한 카드일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피지배자들은 자신이 뭔가 바꿀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의심한다. 피지배자들은 연약하고, 의심과 두려움이 많다.

그런데 그러한 피지배자들이 감히, 투표하는 것 외에는 관여할 수 없는 정부라는 거대한 시스템에 반기를 든 것이다. 그리고 이 소설에 등장하는 대통령와 각료들은 우리에게도 친숙한 지배자들이다. 그들은 ‘민주주의에 반기를 든’ 시민, 사실은 ‘지배자들의 체제에 반기를 든’ 시민들에게 본때를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책임자를 가려내 범인 또는 음모자들을 처벌하는 것이 시급히 필요한 일이라는 데 동의했다는 것이다.(46)” 정부를 겨냥한 이러한 테러에는 분명히 주동자가 있으며, 그 범인을 잡아 족치는 것이야말로 그들이 일을 처리하는 손쉬운 수단이다. 모두를 잡아 가둘 수는 없으므로, 본보기를 보여줘야 하는 것이다. 지배자들이 처음 택한 방법은 스파이를 통한 조사였으나, 시민들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또 임의로 선택된 몇 백명의 시민들도 쉽게 본색을 드러내지 않았다. “누구도 어떤 구실로도 자신의 투표를 공개하도록 강요받지 아니하며, 이 점과 관련하여 당국으로부터 답변을 강요받지 않습니다.(63)” 시민들은 모두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정부는 거짓말탐지기를 이용해 백지투표를 한 사람을 가려내려고 했다. 거짓말탐지기는 신체를 탐지할 뿐 정신을 탐지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그들은 무시하려 했다. 용감한 한 여자는 자신을 심문하는 스파이에게 거짓말탐지기를 써보라고 했다. 거짓말탐지기는 스파이가 백지투표를 했다고 ‘증언’했다. 자신이 애국자라고 주장하는 그에게 여자는 말한다.

“우리는 진실을 말할 때도 계속 거짓말을 하고, 거짓말을 할 때도 계속 진실을 말한다고요. 내가 댁한테 나하고 같이 자고 싶지 않느냐고 물었다면 댁은 뭐라고 말했겠어요. 저 거짓말 탐지기는 뭐라고 말했을까요.(74)” 
 
정부는 결국 각료회의를 통해 계엄을 선포할 것을 결정한다.

"
병역을 마친 적도 없는 민간인 국방부장관에게 비상사태 선포는 맥주 한 모금에 불과했다. 그는 전부터 제대로 된 순수한 계엄을 원했다. 말 그대로의 계엄. 소요와 원천을 격리해 단 한 방의 압도적 반격으로 분쇄해버릴 수 있는 움직이는 벽 같은 계엄. (중략) 나 같으면 체재를 겨냥해 수중폭탄을 터뜨린 것에 비유를 하고 싶습니다만.(48)"

‘병역을 마친 적도 없는 국방부장관’이라는 말에 쓴웃음이 났다. 대통령과 총리부터 시작해서 각료들 중에 제대로 병역을 치른 자가 거의 없는 나라가 어디던가? 그러면서도 전쟁과 계엄을 쉽에 입에 담는 그들의 모습이 무참하게도 낯익었다. 그들은 ‘체제를 공격하는 어뢰’라는 은유를 즐겨 사용하면서, 이 상황의 위험성을 확대해석했다. 그리고 그들은 도시를 떠나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체제가 시민을 버렸을 때, 시민이 곤경에 처하리라 여겼고, 무릎을 꿇고 다시 체제에 속하기를 빌 것이라 여겼다. 정부 요인들뿐 아니라 경찰, 군인, 공무원, 심지어 환경미화원까지도 모두 도시에서 철수했다. 그들은 이제 도시에는 폭동이 일어나고, 무뢰한들이 시민을 공격할 것이라 장담했다. 하지만 도시는 조용했다. 시민들은 오히려 평소보다 더 질서있었으며, 범죄가 늘지도 않았다. 반면 의기양양하게 도시를 떠났던 그들은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더구나 이 계획은 무모하고 어리석은 것이었다. 그들은 “계엄이라는 일반 원칙들만 강조할 뿐 그것을 집행하는 관료적 세부사항은 완전히 무시하고 있었는데, 바로 그런 부분에서 불가피하게 혼돈이 찾아들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89)” 그런데도 시민들은 참을성 있게 그 불편함을 견디고 있었다. 그들은 결국, 사건을 일으켰다. 지하철에 폭탄을 설치해 시민들을 죽인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폭도들에 의한 것이라는 루머를 신문에 실었다. 그러나 시민들은 진실을 알고 있었다.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거리에 모이기 시작했다. 도시에 남아 있던 마지막 관료인 시장은 폭탄이 터질 때 근처에 있었다. 그의 양심이 꿈틀거렸다. 그래서 그는 시장이 아니라 시민이 되기로 마음먹었다.

“그들은 왜 자신들의 시장이 반정부시위에 가담했는지 알고 싶어할 겁니다. 이건 반정부시위가 아니오. 애도의 시위지. 사람들은 죽은 자들을 묻으러 이 곳에 왔소. (중략) 시장님은 백지 투표를 던진 사람들에게 동조하십니까. 그 사람들은 자기들 하고 싶은 대로 투표한 거요, 내가 동조하느냐 아니냐는 상관없소.(182)”

또다시 플래시백. 용산 참사가 떠오른다. 살인이 있었으나 범인이 없었던 그 참사. 폭도들이라 매도당한 시민들의 죽음.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아무도 사과하지 않는 살인. 유족들의 눈물. 그것은 반정부시위가 아니다. ‘애도의 시위’인 것이다!
 
“놀라운 건 아무런 외침도 들리지 않는다는 겁니다. 만세 소리 하나, 타도하라는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군요.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말해주는 구호 하나 없습니다. 그냥 등뼈까지 떨리게 만드는 이 위협적인 전율뿐입니다.(184)”
“이 자들은 시위도 제대로 할 줄 모르네. 돌이라도 몇 개 던져야 하는 거 아냐. 시위는 그들(기자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그들은 말없이 삼십 분 동안 눈앞의 대통령궁을 바라보며 서 있더니, 이윽고 해산했다. 어떤 사람들은 걸어가고, 어떤 사람들은 버스를 타고 갔다. 어떤 사람들은 마음씨 좋아 보이는 낯선 사람에게 차를 얻어타기도 했다. 그렇게 다들 집에 갔다.(185)”

눈물이 날 것 같은 장면이었다. 2004년에 쓰인 이 소설에 나타나는 침묵의 시위가, 지금의 정권에서 그대로 재현되고 있다. ‘등뼈까지 떨리게 만드는 이 위협적인 전율’은 침묵이 곧 분노라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말하지 않는 것도 말하는 것이다. 국가적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작은 희생은 감수해야 한다는 논리로 정부가 시민들을 죽인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희생’에는, 그들 자신이 감당해야 할 몫은 없다.

한편 각료회의에서, 문화부장관은 이 사태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했다. 그것은 바로 4년 전의 백색실명 사태다. 이 도시가 바로 눈먼 자들의 도시였던 것이다. 이유없이 실명했다가 다시 이유없이 시력을 회복한 사람들은, 모든 것을 불문에 부쳤다. 고통스러울 정도로 치욕적인 일은 차라리 묻히는 편이 나았다. 특히 그 상황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정부에게는 도려내고 싶은 상처였다. 문화부장관은 그런 가능성을 들춰낸 죄로 자리에서 물러났다. 한편 법무부장관은 자신도 백지투표를 했다고 고백하고 역시 평범한 시민으로 되돌아갔다. 하지만 백색실명이 백지투표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은 그들에게 고무적인 것이었다. 책임을 돌릴 무언가가 생긴 것이다.


“텔레비전이 우리가 시력을 회복한 직후에 찍은 도시의 모습을 보여주게 합시다. 우리가 견디어야 했던 여러 가지 악을 보여주게 합시다. 사 년 전 그 눈먼 상태가 새로운 모습으로 돌아왔다고 말하는 겁니다, 사 년 전 그 눈먼 상태의 텅빈 시야와 지금 텅 빈 투표용지를 맹목적으로 던지는 사태 사이의 유사성을 보게 하는 겁니다.(230)”

그러나 그들의 판단은 실제 백지투표 사건의 의미와는 달랐다. 원래부터 눈먼 자들이었던 사람들이, 실제적으로 눈이 먼 뒤, 역설적으로 ‘진짜 눈’을 뜨게 된 것이다. 무엇보다 그 실명 상태에서 시민들은 정부가 얼마나 무력한지 알았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일어났던 그 도시에서, 시민들은 깨달았다. 정부에게 시민의 생명은 우선순위가 아니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보호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를 위해, 진짜 체제를 세워야 한다. 이런 생각은 누군가의 선동으로 일어난 게 아니었다.

맞춤하게, 그들의 음모론을 부추긴 것은, ‘첫 번째로 실명한 남자’의 편지였다. 어쩌면 모든 일의 원인일 수도 있는 그 남자에게 아무도 죄를 묻지 않았다. 하지만 그 남자는 죄를 물었다. 그것도 생명의 은인에게. 남자는 대통령과 총리에게 같은 편지를 보냈다. 4년 전 실명상태에서, 눈이 멀지 않은 단 한 사람의 여자, 의사 아내가 있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녀의 살인을 고발하는 편지를.

그들은 도시로 경정과 경감, 경사를 몰래 파견했다. 경정은 먼저 편지를 보낸 남자를 만났다. 그 파렴치한은 자신의 아내와도 이혼한 상태였다. 자신을 먹이기 위해 아내가 깡패들에게 강간당한 일을 견딜 수 없어서였다. 백색실명의 재앙에서 벗어난 단 한 사람과 백지투표 현상이 어떤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그는 증명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다른 일도 할 수 있다는 거였습니다.(280)” 내무부장관은 한 술 더 떠 음모론을 확실시한다. “아무도 음모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는 그 사실이 음모가 있다는 증거다. 이 경우에는 침묵이 음모가 없다는 증거가 아니라 음모를 확인해주는 증거다.(289)” 경찰들은 남자가 준 사진과 그가 적어준 주소를 가지고 의사 아내가 이끌었던 사람들을 찾아갔다. 하지만 경찰들은 의사 아내가 숭고한 일을 했다는 사실만을 알았을 뿐이었다. 경정은 의사 아내를 찾아가 정부에서 무엇을 조사하고 있는지를 밝혔다 의사 아내에게 죄가 없다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공무원이었다. “부인이 자신의 무죄를 증명해야 하오. 증거란 필요하면 나타나게 마련이오.(중략) 부인은 이게 그 일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묻겠지만, 그 전에 내 한 마디 하리다. 냄비를 만든 사람이 뚜껑도 만드는 거요.(326)”

의사 부부와 그들의 친구들은 이제 정부를 전복할 음모를 꾸민 집단이 되어 있었다. 경정은 의사 아내를 감시하다가 공원에서 그녀와 말을 했다. 정부에게는 희생양이 필요하며, 그들이 어떤 나쁜 짓을 할지 모른다는 것을, 그는 가감없이 알려줬다. 의사 아내의 이야기는 빠르게 신문에 실렸다. 무죄를 증명하는 방법은 없었다. 경정은 그 더러운 물에서 발을 빼기로 결심했다. 작은 신문사의 편집국에 사실을 알렸다. 신문사의 기지로 시민들은 왜곡된 진실을 알았지만, 경정의 희생은 불가피했다. 총리는 사건을 지휘했던 내무부장관이 오히려 큰 실수를 저질렀다는 사실을 알았다. 가리면 가릴수록 진실은 더욱 크게 부풀어오른다. 시민들은 회수된 신문의 복사본을 수도 없이 돌렸다. 눈이 내리듯 빌딩에서 복사본이 마구 떨어졌다. 그들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를 어렴풋이 알던 시민들은, 이제 뚜렷하게 알게 된 것이다. 총리는 내무부장관을 해고했다.

“내가 나라에 봉사한 것에 이렇게 이상하고 자의적인 방식으로 보답을 하는 경우가 어디 있습니까. 이유가 있을 겁니다. 그 잔인한 해임의 이유를 말입니다.(중략) 경정은 우리 적들이 죽였습니다. 제발 내 앞에서 오페라 아리아 좀 부르지 마시오. 나도 이 게임을 오래 해본 사람이라 동화는 안 믿는단 말이오. 당신이 말하는 적들은 그를 영웅으로 만들면 만들었지 죽일 이유는 전혀 없소.(중략) 그를 죽인 건 용서할 수 없는 대실수요. 이제 지금까지 벌어진 사태로도 모자라 거리에 시위대까지 나오게 되었지 않소. 이미 주민의 반이 거리로 나왔고, 나머지 반도 곧 합세할 거요. 미래는, 총리님, 미래는 틀림없이 내가 옳았다고 판단할 겁니다. 현재가 당신이 틀렸다고 판단하는데, 미래가 퍽이나 당신한테 도움이 되겠소.”(424)

그렇게 내무부장관은 끝까지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이다. 어리석인 자가 추진력이 있고, 악하기까지 하면, 그건 최악이다. 내무부장관은 그런 권력자의 전형이다. 그는 시민을 희생시키는 것을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소설의 결말은 암울하지만, 또 한편 희망을 보여준다. 그것이 희생을 요구했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그 희생의 의미는 헛되지 않을 것이다. 백지투표가 침묵의 저항이었다면, 이 소설 속의 시민들은 이제 수다스러운 저항을 하게 될 것이므로. 사라마구는 이 소설 어느 부분에서도 구체적으로 혁명을 언급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우화 같은 소설에는 분명 혁명이 있다. 여든이 넘는 작가가 여전히 혁명을 말했다는 사실은 존경스럽다. 작가는 기성세대를 이렇게 냉소한다.


“맹목적으로 비틀거리며 앞으로 나아가는 이 시대에, 나이가 들면서 젊었을 때 꿈꾸던 것과는 달리 돈도 많이 벌고 편안하게 살아가는 남자와 여자를 만나는 것은 아주 흔한 일이다. 그들도 열여덟 살 때는 단지 유행의 빛나는 횃불이었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자신의 부모가 지탱하는 체제를 타도하고 그것을 끝내 우애에 기초한 낙원으로 바꾸어놓겠다고 결심한 대담한 혁명가들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선택할 수 있는 수많은 온건한 보수주의 가운데 어느 것 하나로 몸을 덥히고 근육을 풀었다. 따라서 그들은 과거 혁명에 애착을 갖던 것처럼 지금 애착을 갖고 있는 그 신념과 관행들은 시간이 흐르면 가장 외설적이고 반동적인 종류의 순수한 자기중심주의로 변할 것이다. 예의를 약간 걷어내고 말을 하자면, 이런 남자와 이런 여자들은 자신의 인생이라는 거울 앞에 서서 매일 현재의 자신의 모습이라는 가래로 과거의 자기 모습이라는 얼굴에 침을 뱉고 있다.(143)”

이 소설을 읽어내는 것은 고통이었다. 행간을 조금만이라도 놓치면 앞 부분으로 돌아가야 했고, 대화는 많은 은유를 포함하고 있었기에 긴장을 놓을 수 없었다. 처음 읽었을 때 막연했던 장면들이, 두 번째 읽자 선명해졌다. 다음에 읽을 때는 또 다른 메시지를 줄 것이다. 이 묵시록 같은 소설은 읽기 힘든 만큼 가치가 있다. 생각하면서 읽지 않으면 다음 구절로 넘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떤 소설가는, 잘 읽히는 소설은 이미 많이 쓰인 이야기들을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익숙한 상황과 인물들은 고심하지 않고 페이지를 넘기게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사라마구의 독창성은 더욱 빛난다. 안타깝게도, 그는 더 이상 작품을 쓸 수 없다. 하지만 그가 남겨놓은 이야기들은 또 다른 이야기의 모태가 될 것이다. 인간다운 삶이란 무엇인지, 그런 삶을 살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우리 스스로 생각하게 만드는 이야기들은, 위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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