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단상 동문선 현대신서 178
롤랑 바르트 지음, 김희영 옮김 / 동문선 / 2004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여전히, 그의 말들은 살아숨쉰다. 나는 지금까지 이보다 더 뛰어난 사랑의 단상을 보지 못했다. 보라색 괄호는, 현재진행형.

 1. 사랑의 목소리는 비실제적으로 다루기 힘든 어떤 것이다. (그렇기에 사랑의 목소리는 개별적이다. 쉽게 다룰 수 있는 사랑이라면, 상투적인 사랑일 것이다.)

2. 사랑은 멈추어 있는 것이 아니라 행동하고 있는 그 무언가이다.(멈춰 있는 것, 그건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현재 진행형이다. 첫사랑이란 말은 엄밀히 말하면 맞지 않다. 지금 사랑하고 있는 사람이 오늘의 '첫' 사랑이므로.)

3. 사랑은 어떤 우연에 의해서 늘 규정된다. 그것은 수많은 우연의 중첩일 뿐이다.(그러므로 그 우연은 얼마나 많은 가능성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

4. 사랑하는 사람이 세상에 바쳐야할 공물. 그것은 주체의 머리 속을 끊임없이 스쳐가는 저 커다란 상상적인 것의 흐름을 단지 고통스런, 병적인, 그래서 반드시 치유되어야만 하는 위기로 주체 자신이 환원시키기를 바라는 그런 일반 여론.(결국 사랑은 일종의 병이 아닐까. 언젠가 치유되어야 하는. 어떤 사랑의 병이든 치료되고 난 뒤엔, 평온함이 찾아온다. 하지만 이전으로는 결코 돌아갈 수 없는 것이다. 한 번 앓고 난 병을 두 번 앓기 어렵듯.)

5. 부재자 : 떠나는 자는 늘 그이고, 남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이다.(그렇기에 더 사랑하는 사람은 언제나 패배자일 수밖에 없으며, 덜 사랑하는 자는 떠나가기를 반복하는 것이다. 이것은 어쩔 수 없는, 만고의 진리이다.)

6. 나의 상상 속에서 그는 늘 결핍되어 있다. 그는 한번도 충족되어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실제 속에서 더욱 결핍된다. 실제 속에서의 그는 나의 세계와 더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그가 충족되는 것이야말로 내가 바라는 것이면서 동시에 가장 바라지 않는 것이다. 결핍이 없는 그, 완벽한 그가 도대체 왜 나와 어울리겠는가?)

7. 그는 근사하다. 그 사람의 전부가 불러일으키는 미학적인 환영. 그는 그 사람이 완벽하다는 것에 대해 찬미하며, 또 그렇게 완벽한 사람을 사랑한 자신을 찬미한다 .(나는 자아도취적으로 사랑한다. 그의 장점은 사실 내가 갖고 싶던 장점이었고, 내가 그를 칭찬하는 순간, 나는 그 덕목을 공유하게 된다. 그런 사실을 알아차린 나 자신은 얼마나 위대한가. 내가 사랑했던 사람을 경멸하는 순간, 나 역시 경멸당한다. 그러므로 나는 가능한 모든 사랑을 아름답게 치장하려고 애쓴다. 어떤 사람이든, 내가 사랑했던 사람의 어떤 면은, 내가 가지고 있는 어떤 욕망의 발현이었기에)

8. 모든 것은 텅빈 것이다. 있음이 아니면 없음이다. 사람은 모든 것 때문에 사랑하며, 모든 것 때문에 사랑하지 않는다.(그래서 사실은, 이유는 무의미한 것이다. 이유를 만들어내려는 행동은 본능적인 게 아니다.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생각해서 결정한 사랑이란 건, 결국 무의미하다.) 
 

9. 일생을 통해 나는 수백만의 육체와 만나며, 그 중에서 수백개의 육체를 욕망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수백게 중에서 나는 단 하나만을 욕망한다. 내가 사랑하는 그 사람은 내 욕망의 특이성을 증명한다. 그 선택은 엄격하면서 유일한 것이다. 그 수많은 사람 중에서 내 욕망에 꼭 들어맞는 이미지를 찾기 위해 그 얼마나 놀라운 우연의 일치가(그리고 어쩌면 수많은 탐색이) 필요했던가! 하지만 나는 왜 그런 사람을 원하는 걸까. 나는 왜 그를 지속적으로 초췌하게 원하는 걸까. 내가 원하는 것은 그의 무엇일까. 그의 전부일까, 실루엣 형상 분위기? 그는 근사하다. 그러나 내 욕망을 파고들어가면 갈수록 이름짓기는 더욱 힘들어진다. 그리고 동어반복을 한다. 근사하기 때문에 근사해.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한다. 그것은 바로 긍정의 폭발인 것이다. 내 욕망의 특이함에 기적적으로 부응하려 온 유일한 사람. 그 어떤 상투적인 것(타인들의 진실)에도 포함될 수 없는 내 진실의 형상. 나는 그 모든 어려움(불안 의혹 절망 빠져나오고 싶은 욕구 초연해지고 싶은 욕구)에도 불구하고 그 가치를 긍정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나는 그 모든 것을 부정하고 어떤 평가도 거절한다. (그러므로 그 중독 상태에서 깨어났을 때는 당황스럽다. 마치 3d 영화 속에 실제로 존재했던 느낌처럼, 나는 생생한 환상을 경험했던 것이다. 하지만 근사하기 때문에 근사했던 그가, 사실은 너무나 일상적이고 세속적이며 더없이 초라한 인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그 순간, 그 당시의 내게 그는 딱 들어맞는 이미지였다. 나는 나의 사랑이 그 무엇보다도 달랐고, 독창적이었다고 주장하려 애쓴다. 하지만 모든 독창성 안에는 위대한 세속이 담겨 있다. 고답적인 독창성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10. 사랑하는 사람은 그 사람을 만났을 때 즉각적인 긍정의 상태가 된다. 현혹, 열정, 흥분, 충일될 미래에 대한 미친 듯한 상상과 계획들. 나는 행복해지고 싶은 욕망과 충동으로 휩싸인다. 모든 것에 대해 그렇다, 라고, 말한다. 세상은 아름다워. 라고. 진정한 긍정은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다시 시작하자, 라고 말하는 것이다.(그건 놀랍게도 이 더럽게 절망적인 세상에서, 그래도 살아야겠다는 의욕을 준다. 그랬다. 그랬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렇게 살아야겠다는 그 놀라운 사랑이 깨어진 후에는, 세상도 깨어진다. 깨어진 세상은 파편이 되어 온 몸을 찌른다. 그 깊은 충일감만큼 살이 도려내지고 영혼이 깊이 패인다. 사랑이 여러 번 반복될수록, 영혼은 파이고 또 파인다.)

11. 이미지는 순식간에 변질된다. 아주 작은 오점 하나, 행동 하나, 말 한 마디에. 완벽한 얼굴-방부제를 연상시키는-에 아주 작은 오점이 나면 내가 생각하던 이미지는 순식간에 손상된다. 그 사람을 갑자기 비속적인 세계로 비끄러내는 그 무엇! 나는 얼떨떨해지고 하나의 역리듬을 듣는다. 이미지의 변질은 내가 그를 부끄럽게, 가치없게, 매력없에 생각할 때 발생한다. 그는 무엇인가에 조정되고 있다. 그것도 천박하고 비속한 어떤 것에게. 그는 갑자기 변질되어 우리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이 된다. 그는 욕망에도 예속되어 있다. 그 자신도 모르고 나만이 간파하는 어떤 형태의 욕망. 사랑의 붕괴는 영원히 되풀이된다는 점에서 두렵다. (가면은 벗겨진다. 나는 의아해진다. 도대체 그런 게 어떻게 가능할까? 누군가의 진실을 보고 난 뒤에도 그를 사랑할 수 있을까? 누군가와 가까워진다는 건 그의 악덕에도 가까이 접근한다는 뜻이다. 과연 그 천박함을 사랑할 수 있을까! 가족조차도 인정할 수 없는 그 천박함을, 도대체 누가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까. 받아들인다는 주장은 다 거짓이다. 눈은 이미 다른 곳을 향하고 있다. 악덕을 보기보다는 그냥 눈 감는 것이다. 적당히 감추지 않으면 어떤 사랑도 지속되지 않는다. 마치 거짓 없이는 진실이 존재할 수 없는 것처럼.)

12. 고행자 : 스스로를 징벌하고 처벌하려 함으로서 그를 감동시키는 행위
나는 이런 저런 일로 죄를 지었다. 그럴만한 이유도 있고, 그럴만한 이유로 나를 만들었다. 나는 나 스스로를 벌하려 하며 나 스스로를 망가뜨리려 한다. 나는 그러면서 아주 인내심 있고 의젓한 사람이 되려 한다. 마치 나 자신의 한의 인간인 것러럼. 나는 나를 비난하고 깎아내리고 무시하고 모욕한다. 그 모욕의 고통 속에는 어떤 초월적인 것, 어떤 긍정적으로 진실한 것이 있다. 바로 내 사랑은 더 절실하고 가치있는 그 무엇인가가 되는 것이다!

13. 나는 그 사람의 아토피아를 발견한다. 위대한 순진함과, 그 무엇으로도 평가할 수 없는 그만의 독창성을. 나는 그를 그 모든 평가에서 제외시킨다. 어느 누구도 그 사람에 관해 말할 수 없다. 모든 수식어는 거짓이며 고통스럽고 잘못된 것이며 거추장스러운 것이다. 그 사람은 진실로 무어라 특정지을 수 없다. 그를 평가한다는 것은 너무도 우스꽝스러운 일이다. 그 사람의 독창성 앞에서 나는 자신이 그에게서 분리되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러나 독창성의 진짜 처소는 그 사람도 나 자신도 아닌 바로 우리 관계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쟁취해야 하는 것은 독창적인 관계이다. 대부분의 상처는 상투적인 것에서 온다. 모든 사람들처럼 사랑해야 하고, 질투해야 하고, 버림받아야 하고, 또 욕구불만을 느껴야 하는 둥둥. 그러나 독창적인 관계일 때에는 상투적인 것은 모두 흔들리며, 초월되고, 철수한다. 이른바 질투라는 것도 더 이상 설 자리가 없게 되는 관계가 된다. 그 관계는 어떤 담론이나 결론도 부재하는 진정으로 독창적인 관계이므로. (이건 가정에 불과하지 않는가. 사랑은 결국 상투적으로 흔들리며, 초월되고, 철수된다. 사르트르와 보부와르는 정말 행복했을까? 다른 사람들처럼 사랑하지 않는 척, 질투하지 않는 척, 버림받지 않은 척, 욕구불만이 아닌 척 하는 게 도대체 가능하기나 한 건가? 그렇다면 그건 거짓이다. 담론이나 결론도 부재하는 독창적인 관계가 존재하는 건, 철통 같은 이성의 통제 아래 놓인, 교조적인 사랑이다. 변하지 않았다고 몸부림쳐도, 뱀이 계속 허물을 벗듯, 관계도 새로운 차원으로 전환된다. 그렇기에 정답이 없는 문제와도 같은 것이다. 누구나 절반의 해답을 가지고 있을 것이므로. )

14. 검은 안경 : 이것은 그에게 사랑을 고백할지 아닐지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정념을 어느 정도로 감추어야 할지를 자문하는 문형이다. 바로 내가 그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를 사랑하는 것을 감추어야 하는 게 아닐까? 그리하여 나는 얼버무린다. 내 정념을 조금만 보여준다. 내 정념에 신중함(태연함)의 가면을 씌우는 것, 거기에 진짜 영웅적인 가치가 있다. 고매한 영혼들은 자신이 느끼는 혼란을 주변에 퍼트려서는 안 된다. 그러나 정념은 본질적으로 보여지기 위해 만들어졌다. 완전히 꾸민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내가 지금 당신에게 뭔가 감추고 있다는 것을 좀 아세요. 이것이 본질적인 것이다. 정념은 동시에 알려져야 하고, 또 알려지지 말아야 한다. 다시 말하자면, 내가 그것을 보이고 싶지 않다는 것을 당신은 알아야만 한다. 그것은 손가락으로 가면을 가리키며 걷는 것이다. 그 사람이 알아차리지도 못하는 어떤 일 때문에 내가 울었다고 가정해보자. 그리하여 그것을 안보이려고 나는 검은 안경을 쓴다. 이 의도는 계산된 것이다. 그는 금욕적으로 의젓함을 보임으로서 도덕적 이익을 취하는 동시에 가련하고도 감탄할 만한, 어른이자 아이이고자 하는 일종의 도박을 하는 것이다. 그가 무슨 일이 있나요, 라는 질문을 하도록. (귀엽지만 동시에 역겨운 가장. 하지만 가장 인간다운 가장. 숨기면서 드러내야 하는 이중의 과제를 달성하기 위해 보이는 눈물겨운 노력. )

15. 아아, 그의 주위에는 왜 그토록 사람들이 많을까? :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를 둘러싼 모든 사람들을 안착하였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모두 어떤 계약상의 실제적이고도 감정적인 시스템을 모두 갖추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리하여 자신만이 거기서 제외되었다고 생각하며, 부러움과 비웃음이 섞인 모호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은 그의 시스템 안으로 들어가고자 한다. 여기 한 놀이가 있다. 아이들 숫자보다 의자가 하나 모자르다. 부인이 피아노를 치는 동안 아이들은 빙빙 돌다 피아노를 멈추면 각자 의자에 앉는다. 가장 서투르고 덜 난폭한, 혹은 재수없는 아이만이 홀로 멍청하게 여분인 채로 서 있다. 그것이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 사람의 구조. 내가 끼어들지 못하는 그 특수한 구조는 때로 가소로워 보인다. 그는 판에 박힌 삶에 길들여져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그 구조보다도, 구조의 힘인 것이다.
그가 괴로워할 때 나는 괴로워한다. 나는 그 사람을 아파한다. 내가 아픈 또 하나의 이유는 그가 아프고, 내가 그것에 무관하기 때문에, 나는 그 사람으로부터 버려진 듯한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나는 그 사람이 아프다. 나는 그 사람을 아파한다. 전율을 느꼈던 이 문장. 나는 시시각각 그에게서 버려진다. 나와 함께 하지 않는 순간, 그는 나에게 속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으며, 아니면 환영에 예속되어 있다. 사랑하는 사람은 의자에 앉지 못하기에 의자를 열망한다. 그 의자가 내 것이 된다면, 더는 그것은 욕망의 대상이 아니다. 내가 버려져 있는 순간 나는 가장 그를 강하게 욕망한다. 그리고 내가 그 의자에 앉으면, 욕망은 이성적인 칼날을 심장에 겨눈다. 나는 의자에서 고민하는 것이다. 이 의자는 내 것인가? 내가 앉아야 할 의자인 것인가?) 

16. 이해받고 싶어한다는 것. 나는 이해하고 싶어! 라는 나의 말은 실상 사랑의 외침이다. 나는 나를 이해하고 싶고, 나를 이해시키고 싶고, 나를 알리고 싶고, 포옹받게 하고 싶고, 누군가가 와서 나를 데려가기를 바란다. 이것이 나의 외침이 말하는 진짜 내용이다. (때때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을 원하게 되는 아이러니. 나를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이해해주는 사람에게 나는 사랑을 느끼는 것일까? 아니면 우월감을 느끼는 것일까? 나는 내가 들어가기를 허용받은 파티에는 가고 싶지 않다. 이해하는 사람에게 이해받는 건 너무 단순하다. 그래서 어리석을 정도로 낯선 이에서 위험할 정도로 매력을 느끼는 것이다. 일회용의, 24시간도 가지 못할 매력을. )

17. 어떻게 해야 할까?-처신 : 사랑하는 사람은 대개는 아주 하찮은 문제에 대해, 양자택일의 기로에 서서 무엇을 할까, 어떻게 할까 등등의 처신의 물음을 고통스럽게 제기한다.(그 고민의 시간들은 사랑의 불투명함에 정비례한다. 확실하지 않은 근거들은 부정확한 추측을 낳는다.)

18. 계속해야만 할까? 가장 흔하고도 많이 쓰이는 물음이다. 이것이냐 저것이냐 하는, 만약 내가 이것을 택한다면, 다시 두 가지 이상의 문제가 제기된다. 이러한 양자택일의 연속은 사랑이 끝날 때까지 계속된다. 넌 희망이 있어, 그러니 잘해봐, 또는 희망이 없어, 그러니 단념해,라는. 그러나 베르테르는 말한다. 나는 선택하지 않는 것을 완강하게 선택한다네. 난 표류를 선택한다네, 그래서 계속한다네.
(선택하지 않는 것을 선택하는 것. 칼을 든 자와 겨누어지는 자는 똑같이 이런 처지에 놓인다. 한 발자국을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은 서 있다. 칼을 든 자는 상대를 찌를 것인지 말 것인지를 선택하지 않는다. 겨누어진 자는 찔릴 것인지 말 것인지를 선택하지 않는다. 그렇게 시간은 유예된다. 하지만 사랑은, 참지 못하고, 겨누고 있는 자를 향해 스스로 몸을 던진다. 찔릴 것을 알면서 그에게 한 걸음 다가선다. 그의 사랑이 한 걸음 다가가면 한 걸음만큼 또 끝난다. 그는 찔리고 또 찔린다. 칼을 든 자는 여전히 미동이 없다. 그는 선택하지 않았으므로 책임지지 않는다. 사랑은 스스로 찔렸기에, 죽더라도, 그건 자살일 뿐이다.)
 

19. 내 처신의 고뇌는 하찮은 것이다. 그것의 하찮음은 끝이 없다. 만일 그가 그의 새 전화번호를 알려주었을 때 나는 거의 미칠 지경이 된다. 전화를 해야할까, 말아야 할까. 지금 전화하라는 뜻일까, 나중에 전화하라는 뜻일까. 그러나 내가 그에게 전화할 수 있다, 라는 것이 이 메시지의 객관적인 의미이다. 나를 정말 미치게 하는 것은 바로 <그럴 수도 있다>라는 상황인 것이다. 내가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것은 바로 이 허용 때문인 것이다. (그 하찮은 결정들. 우스꽝스러운 고민들. 나는 실수하지 않으려 한다. 지난 사랑에 너무 실수가 많았기에, 실수하지 않으려 고심한다. 하지만 실수는 죽을 때까지 반복된다. 죽는 순간까지, 나는, 실수로 유언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럴 수도 있다>는 실수를 반복하게 하는 원흉이다. 상상력이 풍부하지 않은 사람은 실수를 적게 한다. 많은 종류의 실수는, 너무 많이 생각하는 데에서 기인한다.)

20. 대수롭지 않은 어떤 현상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해석해야만 하는 어떤 기호로 분류된다. 작은 몸짓과 말, 눈빛, 혹은 주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이 그의 행동과 자연현상 등이 모두 해석해야만 하는 과제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던져진다. 아무 것도 아닌 일 때문에 심사숙고하던 나는 곧 기진맥진해진다. 그러다가 나는 곧, 물에 빠진 사람이 즉각적으로 물밑을 치듯이, 어떤 자발적인(자발적인 것은 위대한 꿈이며 천국 권력 쾌락이다) 결정을 내리고자 한다. 네가 그토록 그것을 열망하니, 그에게 지금 즉시 전화를 걸어보라.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해석되지 않은 기호는 미지수로 남는다. 기호를 해석하는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다른 사람이다. 기호를 해석하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더욱 모호해질 뿐이다. 그리고 결국 흑백논리로 끝을 맺게 된다. 그랬거나, 그러지 않았거나. 사랑하거나, 사랑하지 않거나.)

21. 어쩌다 내 손가락이 스칠 때 : 어쩌다 그 사람의 손이 내 손에 스친다. 그러면 나는 이 우연한 의미에는 초연한 채, 다만 그 접촉된 미세한 육체의 부분에만 몰두하여, 마치 성도착자처럼 그것이 대답할지 어떨지를 결정하지 않고, 그 무기력한 손가락이나 발가락을 즐길 수도 있다. 나는 도처에서, 아무 것도 아닌 것에서 의미를 만들어내고 이 의미는 나를 전율케 한다. 손을 꽉 잡는다는 것. 수많은 소설의 얘깃거리가 되어온, 손바닥 안에서의 그 미세한 움직임, 비키지 않는 무릎, 아무 일도 아니란 듯 소파의 등받이를 따라 늘어뜨린 팔, 그 위로 차츰차츰 다가와 기대는 그의 머리, 그것은 미묘하고도 은밀한 기호들의 천국이다. 감각의 축제가 아닌, 의미의 축제와도 같은 그 어떤 것. (그건 축복된 순간이다. 드물고 희귀하고 놀라운 순간. 돌이킬 수 없는 광휘. 꼼짝없이 사로잡히는 마술. 그러나 유효기간이 존재하는 약. 몇 개의 커트로 기억될 뿐인, 휘발된 순간들.)

22. 대담. :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하는 이와 더불어 자신의 감정을 억제한 채, 그의 사랑, 그, 자기 자신, 그들 자신에 대해 끊임없이 얘기를 나누고 싶어한다. 언어는 살갗이다. 나는 그 사람을 나의 언어로 문지른다. 마치 손가락 대신에 어떤 미묘한 말이 달려있는 것처럼. 내 언어는 욕망으로 전율한다. 한편으로 모든 담론 행위는 나는 너를 욕망한다, 라는 유일한 시니피에를 간접적으로 드러내고, 양분을 주고, 가지를 치며, 폭발하게 하는 것이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나는 그 사람을 내 말 속에 둘둘 말아 어루만지며, 애무하며, 이 만짐을 얘기하며, 우리 관계에 대한 논평을 지속하고자 온힘을 소모한다.
사랑스럽게 말한다는 것은, 끝이 없는 미적지근한 소모를 의미한다.  논평하고 싶은 충동이 방향을 바꿔 대체의 길을 따른다. 처음 나는 그 사람을 위해 우리 관계에 대한 담론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속내 이야기를 할 수 있는 타자 앞에서도 가능하다. 나는 너에게서 그로 넘어가며, 다시 그에게서 누군가로 넘어간다. 나는 결국, 일반적인 헛소리에 지나지 않을, 사랑에 대한 추상적인 담론을, 사랑의 철학을 늘어놓는 셈이다. 그리하여 다시 온 길을 거꾸로 가보면, 사랑을 대상으로 하는 모든 이야기는(그 초연한 태도가 어떠하든간에) 필연적으로 어떤 은밀한 대화 상대자를 내포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당신이 알지 못하는, 그러나 내 격언의 끝 저기 있는 누군가에게 말하고 있다. 그렇다. 누군가를 위해서가 아니라면 아무도 사랑에 대해 말하고 싶지 않으리라. (수없이 말하고 또 말한다. 우리에 대한 말은 끊임없이 다르게 규정된다. 가능성이 넘친다. 우리는 사랑 얘기를 한다. 지금 사랑하는 사람도, 사랑하지 않는 사람도, 지나간 사랑에 대해, 엇나간 사랑에 대해 끊임없이 이야기한다. 사랑 이야기의 속살은 은밀하게 공개되어 있다. 하지만 우리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사랑 이야기가 아니던가.)

23. 우리는 우리 자신을 천국에서 내쫓는다. 사랑을 하는 나는 어느 순간, 내게 상처를 주는 이미지들(질투 버려짐 수치심) 등을 연신 떠올리면서 스스로를 자해하려 하고, 천국에서 추방하려 한다. 절망 지루 체념 명예 욕망 불확실한 처신 체면을 잃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의 거품들이 일정한 순서 없이 하나씩 터져나간다. 그것은 자연의 무질서 그 자체이다. 그렇게 생겨진 언어는 다른 언어에 의해 싸워진다. 나는 악마 같은 그 말들을 좀더 온화하고 완곡한 말로 바꾸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나는 다시 그에 대한 상념 욕망 회한 비난 등으로 복잡해진 내 마음을 느끼면서, 다시 그 병이 재발되었음을 느낀다.(자학과 감상주의는 인간을 황홀하게 한다. 죽음에 대한 열망만큼이나 강렬하다. 나는 슬픈 나를 열망하고, 버려진 나를 꿈꾼다. 버려진 이미지가 비극적일수록, 나는 쾌락을 느낀다. 왜 하나님의 한쪽 팔 위에 악마가 앉아 있겠는가. 고통이 쾌락을 준다는 아이러니.)

24.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얼어붙은 세상이 보인다. 그의 전화가 걸려오지 않는 날, 그의 제안이 없는 날, 그와 안 좋았던 날, 세상은 갑자기 모든 것이 얼어붙는다. 세상은 나 없이도 잘 돌아간다. 나는 수족관을 바라보는 아이처럼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 세상은 히스테릭한 물건으로 가득차 있으며, 내가 바라보거나 만지는 모든 것들은 나에 대해 적대적이다. 이것이 사랑하는 사람이 슬픔에 빠졌을 때, 세상에 대해 느끼는 감정이다. (하루가 죽어버리는 순간이 있다. 조용한 편지함. 답장이 없는 새벽. 들리지 않는 목소리. 그 달콤한 슬픔은, 이 세상에 온전히 나 하나만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그 얼어붙은 진실, 잠시 망각하고 있던 진실이 고개를 드는 순간, 사랑은 아무 역할도 하지 못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