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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2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도시의 모든 사람들이 눈이 먼다. 단 한 명의 여자를 제외하고. 그 끔찍한 가정을 들었을 때, 상상력 있는 사람들은 일단 구역질부터 나왔을 것이다. 나는 이 소설이 영화화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경악했다. 도대체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것을, 눈으로 보는 영상으로 옮겨놓겠다니? 영화는 소설이 그리는 현실의 십분지일도 제대로 보여줄 수 없을 것이다. 이 소설은, 영상이 아니라 문자가 보여줄 수 있는 어떤 지옥을 형상화하고 있다. 밀란 쿤데라가 말한, 영화화할 수 없는, 소설로서 전부인 그런 소설인 것이다. 이 지극히 우울하고 사변적이며 퇴폐적이기까지 한 소설의 분위기는 행간에서만 발견할 수 있다.
인류에게 닥칠 디스토피아의 그림은 수도 없이 많다. 가까운 미래에 인간은 결핍이나 과잉으로 인해 고통받게 될 것이다. 언젠가 석유와 식량, 물이 고갈된다. 에너지가 없으면 전기가 끊기고, 인터넷이 마비된다. 인류는 손발을 묶인 채로 절규하며 죽어갈 것이다. 소수의 선택받은 사람 외에는 이 재앙에서 벗어날 수 없다. 한편 권력의 극대화로 인해 히틀러 같은 독재자가 부활해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거나, 과학의 발전이 왜곡되어 인간의 영혼을 망가뜨릴 수도 있다. 사이보그까지 생각하는 건 오버겠지만, 어쩌면 지금 현재도, 기계는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지 않은가. 이미 알고 나면, 이전과 같은 삶을 살 수 없다. 지식이나 진실이 그렇듯, 편리함도 그렇다. 편리함은 수족과 같은 도구를 제공한다. 과학은 인간의 몸에 새로운 감각기관을 심어놓은 셈이다. 그런 인간에게 문명과 과학을 제거하고 연약한 피부와 커다란 두개골만을 통해 살아가라고 한다면? 대부분의 인간은 죽어갈 것이다. 오히려 새로 태어난 인간은 그 상황에 적응하리라. 앎이 부재한 상황에서 오히려 잘 적응한다는 건 아이러니가 아닌가.
그러한 공포스러운 미래 중에서도 압권은, 바로 눈을 잃은 세계이다. 동물의 영역에도 머무를 수 없는, 괴물들의 세계. “사람 몸에서 그래도 영혼이 남아 있는 곳이 있다면 그게 바로 눈(190)”일 것이다. 그런데 그 눈을 잃은 사람들의 세상은? 다만 죽는 방법을 몰라 죽지 못하는 존재가 되리라. “어쩌면 눈 먼 사람들의 세상에서만 모든 것이 진실한 모습을 드러내는지도 모르겠습니다.(180)” 인용문처럼, 눈 먼 세상의 진실은 추악하고 고통스럽다. 이성은 힘을 잃고 본능이 세상을 지배한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부활한다. 숨겨져 있던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의 법칙이 적나라한 얼굴을 드러낸다. 기본적인 욕구를 채우기 위해서 인간은 짐승이 되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실명이라는 통증을 해소하기 전에는 그 어떤 도덕도 우스꽝스러울 뿐이다. 원래부터 눈 먼 자들은 오히려 강자가 되기도 한다. 눈 먼 자들 사이에서도 지배와 피지배의 권력 구조는 여전하다. “나는 불행이나 악에 한계라는 게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204)” 어느 무명맹인이 말하듯, 불행은 더 깊어지고, 악은 더 잔혹해진다.
“우리가 전에 지니고 살았던 감정, 과거에 우리가 사는 모습을 규정하던 감정은 우리가 눈을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에 가능했던 거야. 눈이 없으면 감정도 다른 것이 되어버려.(354)” 인용문처럼 세상은 재정의된다. 우리는 얼굴이나 몸을 볼 수 없기에, 미추의 구분이 사라진다. 누가 옳은지 알 수 없기에 선악의 개념도 사라진다. 시각을 잃은 인간은 다른 감각에 의존해 더듬더듬 살아간다. 원래 세계에서 맹인이 된 사람들은 그래도 돌봐줄 누군가가 있었다. 하지만 이제 눈은 없다. 불투명한 백색 공포 속에서, 눈 먼 자들은 진실을 깨닫는다. “우리는 눈이 머는 순간 이미 눈이 멀어 있었소. 두려움 때문에 눈이 먼 거지. 그리고 두려움 때문에 우리는 계속 눈이 멀어 있을 것이고. 지금 말하는 사람은 누굽니까, 의사가 물었다. 눈 먼 사람이오. 어떤 목소리가 대답하더니 덧붙였다. 그냥 눈 먼 사람. 여기에는 그런 사람밖에 없으니까. (185)”
마지막까지, 인간적인 유대를 나누었던 집단은 사실 ‘아직 눈이 멀지 않은’ 의사 아내가 속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들의 품위를 유지시켜 준 것은, 두 개의 눈동자였다. 실명이 만약 심판이라면, 의사의 아내가 가장 가혹한 벌을 받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녀는 진심으로, 여러 번, 다른 사람들처럼 눈이 멀기를 바랐다. 눈이 멀지 않았기에 그녀는 지옥을 목격해야 했고, 눈 먼 자들을 인도해야 했으며, 파렴치한 강간범과 약탈범을 살해해야 했다. 인류의 죄를 대신해 죽어야 했던 예수처럼, 인류의 죄를 대신해 그녀가 눈을 뜨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예수처럼 구원자가 될 수 없다. 다만 치욕적으로 살아남아, 지옥을 그대로 보고해야 하는 증인인 것이다. 진실을 똑바로 마주본 대가는 무겁다. 그녀는 눈 먼 자들 사이에서 눈 뜨고 있다는 중죄를 지었다. 그래서 이야기는, <눈 뜬 자들의 도시>로 이어진다.
주제 사라마구는 이 작품에서, 인류의 문명과 과학이 얼마나 허망하게 무너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실명이 아니더라도, 인류가 멸망할 수 있는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그것이 치명적인 전염병일지, 전쟁일지, 환경 오염일지, 아니면 운석 충돌일지, 누구도 알 수 없을 뿐이다. 커트 보네거트는 인류가 마치 멸망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려가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나 어떤 인간들은, 마치 지금의 부와 행복과 풍요가 영원하리라고 믿고 있는 것 같다. 그들만이 근심없이 살고 있다는 사실이, 바로 위기가 코 앞에 다가와 있다는 걸 암시하고 있다. 사소한 어긋남만으로도 붕괴할 수 있는, 문명이라는 바벨탑을 지키기 위해서, 인류는 필사적으로 노력해야 할 것이다. 준비 없이 눈 먼 인류에게 닥칠 건, 다만 멸망일 뿐. 전지자인 작가는 소설 속의 눈 먼 자들에게 자비를 베풀었지만, 과연 우리에게는 그런 자비가 기다리고 있을까?
“시간은 도박판에서 우리 맞은 편에 앉아 있는 상대예요. 그런데 혼자 손에 모든 카드를 쥐고 있어요. 우리는 삶에서 이길 수 있는 카드들이 어떤 것인지 추측할 수밖에 없죠. 그게 우리 인생이에요.(4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