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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굽는 타자기 - 젊은 날 닥치는 대로 글쓰기
폴 오스터 지음, 김석희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8월
평점 :
어렸을 적에 나는 코난 도일의 홈즈 시리즈를 즐겨 읽었다. 사건이 터진다. 의뢰자가 홈즈를 찾는다. 홈즈는 여러 가지 고난에 부딪히지만 결국은 사건을 해결한다. 늘상 이런 구조로 이루어져 마치 디즈니 만화의 해피엔딩을 예상하는 것처럼 결말을 예상하면서도 홈즈의 이야기 속으로 끊임없이 빠져들어갔다. 어느날 코난 도일에 대한 글을 읽었는데, 홈즈 시리즈는 먹고 살기 힘들어서 태어난 작품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책 속의 인물들이 끔찍한 사건 때문에 고통을 받고, 목숨이 위급해지고, 음모를 꾸미고, 오래된 복수를 하고는 동안 작가는 '먹고 살기 위해' 끊임없이 새로운 범죄들을 만들어 내야만 했다.
결국 코난 도일은 유명한 작가가 되었지만, 생계가 너무도 어려워서 탄생했다는 그 계기만큼은 내게 의미심장하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작가의 생계는 얼마나 유지되기 어려운 것이었나. 물론 문학이 최고의 학문으로 대접을 받고, 동시에 대중이 즐길 수 있는 최고의 엔터테인이었던 시절은 조금 다르긴 하겠다. 또한 치사한 대접을 받았겠지만, 궁중 시인 제도라는 것이 존재하던 시절만큼은 글쟁이=가난이라는 수식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리라. 물론 얼치기 글쟁이들(이라는 말에 대해서는 일단 왈가왈부하지 말고), 시대가 문학을 외면할수록 더욱 더 문학으로 돈을 벌겠다는 환상을 품는 황당한 사람들은 일단 이런 수식에서 열외로 하는 것이 좋겠다.
폴 오스터의 빵굽는 타자기는 가난한 글쟁이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글의 첫머리에서부터 그는 선언한다.
'내 꿈은 처음부터 오직 작가가 되는 것이었다. 나는 열예닐곱 살 때 이미 그것을 알았고, 글만 써서 먹고 살 수 있으리라는 허황된 생각에 빠진 적도 없었다. 의사나 정치인이 되는 것은 하나의 진로 결정이지만, 작가가 되는 것은 다르다. 그것은 선택하는 것이기보다는 선택되는 것이다. 글쓰는 것말고는 어떤 일도 자기한테 어울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 평생 동안 멀고도 험한 길을 걸어갈 각오를 해야한다. 신들의 호의를 얻지 못하면(거기에만 매달려살아가는 자들에게 재앙이 있을진저), 글만 써서는 입에 풀칠하기도 어렵다.
비바람을 막아 줄 방 한칸 없이 떠돌다가 굶어 죽지 않으려면, 일찌감치 작가가 되기를 포기하고 다른 길을 찾아야 한다. 나는 이 모든 것을 이해했고 각오도 되어있었으니까, 불만은 없었다. ....... 작가들은 대부분 이중생활을 하고 있다. 생계에 필요한 돈은 본업에서 벌고, 남는 시간을 최대한 쪼개어 글을 쓴다. 이른 아침이나 밤늦게, 주말이나 휴가 때. 윌리엄 칼러스 윌리엄스와 루이 페르디낭 셀린은 의사였다. 윌리스 스티븐스는 보험회사에 다녔다. T.S. 엘리어트는 한때 은행원이었고, 나중에는 출판업에 종사했다.'
그의 선언은 적나라하기 때문에 오히려 아무런 감흥을 일으키지 않는다.
소설의 시작에서부터 그는 가난한 글쟁이의 모든 것을 말해준다. 글쓰기는 돈이 되지 않는다. 글만 써서 살 수는 없다. 다른 직업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잡문이라도 미친 듯이 써야 한다. 돈으로 바꿀 수 있다면 번역이든, 기사든, 에세이든, 닥치는 대로 써야지 푼돈이라도 얻을 수 있다. 아이디어가 떠오르기만 한다면 조금이라도 돈으로 바꾸어야 한다. 간혹 운이 좋아서 무슨무슨 예술기금(?)을 받을 수도 있지만 어차피 금방 탕진한다. 글쟁이 기질을 가진 인간들은 뻔하다. 그런데 생활력은 없는 주제에 웃기지도 않는 반골 기질 때문에 타협하는 글은 못쓴다. 일례로 포르노 따위를 써서 좀 큰 돈을 버느니 서푼짜리 서평을 기고하는 것이 차라리 낫다. 돈을 주기야 하지만 고깝게 구는 문화예술 후원자(?)에게는 쩔쩔매고 싶지 않다. 가끔 글쓰기에 지쳐서 아르바이트를 하지만 그조차 오래 할 수 없다. 당연히 하루 종일 투자해야 하는 일 따위는 적성이 맞지 않아 못한다! 그래도 정말로 목숨이 경각에 달하면 여기저기에 또 미친 듯이 이력서를 넣어본다…… 그러다가 또 살만하면 일은 집어치우고 글을 쓴다. 그리고 그 글을 이력서를 넣듯이 여기저기에다 찔러본다. 어쩌다 작품이 편집자의 눈에 들어 판권이 팔린다고 해도, 그 돈 또한 푼돈에 불과하다……
"돈을 벌기 위해 책을 쓴다는 건 그런 것이다. 헐값에 팔아 치운다는 건 그런 것이다."
단돈 900달러에 판권을 넘기고 나서 작가가 마지막으로 하는 말이다.
이 책은 글쟁이 이력을 가진 사람이 겪을 수 있는 최대치에 가까운 것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가장 소설다운 소설가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소설가의 영적 고뇌(?), 소재의 빈곤, 글쓰기의 고통 같이 소설가 소설에 흔히 등장하는 이야기들은 거의 볼 수 없다. 그런 것을 따지기에는 생활이 너무 절박하다. 나는 살기 위해서 글을 쓴다. 글쓰기 자체의 고통을 느낄 여유가 어디 있는가. 위에 열거한 대로 순수한(?) 글쟁이로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기막힌 소설 아닌가.
하여튼 그의 이력이야말로 정말 기상천외하다. 여기서 문화적 차이를 어느 정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부모님의 이혼에 대해 나이브한 태도를 취하고[부모의 불화라는 소재 하나만으로도 장편소설을 너끈히 써낼 수 있는 국내 소설풍토(?)에 비해 뭔가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무 살도 되지 않는 나이에 혈혈단신으로 외국으로 떠나서 이것저것을 경험하고, 유조선을 타고 뱃사람(?)이 되거나 할렘 문화에 편입되고, 예술을 다룬 책이 아니라 책 자체가 예술인 책을 파는 일을 하고, 함께 글을 쓰기로 한 부인과 멕시코에 가는 등---한 글쟁이가 이토록 다양한 이력을 가질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
그의 능청스러움은 글쓰기를 예술로 비유하지 않는다. 때로는 햄버거 가게에서 햄버거를 굽는 것이 차라리 더 생산적이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비생산적인(?) 일을 줄기차게도 해댄다. 왜일까? 먹고 살기 위해서라면 다른 일들도 널려 있다. 그런데 유독 글쓰기에 목을 매다는 이유는 무엇일까. 글을 쓰기 위해 나는 직업을 가질 테야, 라는 식의 선언 따위도 하지 않는다. 그냥 그렇게 살 뿐이다. 나는 왜 글을 쓰는가, 라고 묻지조차 않는 글쟁이라니! 그 솔직담백한 고백들과 우스꽝스러운 사건들, 수많은 직업을 전전하면서 겪고 느낀 일들은 모처럼 만의 독서에 통쾌함을 안겨다주었다. 소설을 읽으며 킥킥대고 웃어본 것이 얼마나 오랜만이던지.
어쨌든 간에, 폴 오스터는 결국 성공한 작가의 반열에 올라섰다. 그리고 이 소설 곳곳에서 보이는 것이지만, 그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기막히게 나타나서 그를 구원해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아르바이트를 구해주거나, 방 하나를 잡아주거나, 글쓸 거리를 제공해주는 사람을 연결해주거나, 희곡을 무대에 올려준다고 열의를 보이거나, 문예기금을 주어 한동안 그의 생을 유예시켜주는 행운(?)들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입에 풀칠은 못해도 주머니에 담배는 넣고 다닐 수 있을 만큼의 글쓸 거리가 그에게는 있었다. 그러나 그런 지면조차 없이 살아가는 글쟁이 아닌 글쟁이들이 더 많은 게 현실인 것 같다. 말하자면, 잡문조차도 담배 한 개피와 바꿀 수 없는, 어떠한 글도 쉽사리 생산성을 가질 수 없는 시대인 것이다. 그래서 이 소설에 등장하는 작가처럼 사는 것에 허덕허덕하면서도 결국에는 바퀴벌레처럼 끝까지 살아남는 글쟁이는 너무도 드물다! 애초에 잡문 기고와 알바 인생 따위는 포기하고 안정적인 직장을 잡고 남는 시간을 쪼개고 쪼개어서 쓸 수 밖에 없는 것이 더 일반적인 글쟁이의 삶이 아닌가.
내가 지나치게 회의적인 것일까. 폴 오스터가 가장 힘들었던 이삽십대는 아직까지는 문학의 죽음이라는 화두가 그다지 일반적이지 않았던 시대였다. 그런데 2000년대의 한국은 문학의 죽음이라는 화두에 대해서는 관심조차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렇지만 1%의 예외의 공간은 있다. 그리고 그 1%의 공간 속으로 뛰어들기 위해 오늘도 수많은 글쟁이들이 빵굽는 타자기를 꿈꾸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폴 오스터의 비극적이지만 희극적인 이 자전적 소설은, 내게 있어 지극히, 소설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