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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그 후 ㅣ 범우비평판세계문학선 37
나쓰메 소세키 지음, 서석연 옮김 / 범우사 / 1999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선하고 악한 것, 옳고 그른 것에 대한 믿음은 이제 철저히 개인적인 영역에 머무는 시대가 찾아왔다. 물론 고래로 전해져오는 교훈들이 있으며 승복할 수 밖에 없는 성문법이 있지만, 실질적인 심판은 개인의 주관에 따르는 경우가 더 많다. 바야흐로 자신이 자기 자신의 심판자가 되는 시대인 것이다. 그러나 심판자로서의 자신은 가장 냉혹한 절대자가 될 수도 있다. 나쓰메 소세끼에 등장하는 '선생'이 바로 그러한 인물이다.
『마음』은 독특한 소설이다. 내용 전개가 다소 답답할 수도 있는데, 소설의 흐름이 느리고 결정적인 갈등이라 볼 수 있는 '선생의 과거'에 대해서는 고심하여 서술되다가 마지막 장에서야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말을 아끼고 천천히 진행되는 서사는 오히려 독특한 인상을 주었다. 마치 밀란 쿤데라의 『느림』에서 받았던 인상과도 같았다. 너무 많은 사건들이 속수무책으로 일어나고 스피디하게 진행되는 현대의 서사장르와는 달리 차근차근하면서도 깊은 맛이 느껴지는 이야기였다.
죄의식은 주관적인 감정이다. 같은 과거를 지니고서도 죄의식을 갖는 사람과 전혀 그 일에 거리낌없이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 혹은 태어났다는 사실 자체를 원죄로 여겨야 한다는 기독교의 사상 역시 개인의 주관에 따라 얼마든지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살았던 등장인물인 '선생'은 마치 우리나라의 선비와도 비슷하게 느껴진다. 그는 의리와 인간다움을 매우 존중하는 인물로, 평생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한 죄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 죄의식은 다소 복잡하다. 그는 인간을 경멸하지만, 사실은 자기 자신을 가장 경멸하고 있다. 그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인물이다. 왜냐하면 그는 어떤 일도 할 자격이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는 아내와 단 둘이 도쿄의 작은 집에서 조용하게 살아간다. 친하게 지내는 친구도 없으며, 어떤 사교 활동도 하지 않는다. 그런 그의 삶에 하나의 친교가 시작된 것은, 우연히 피서지에서 만나 그를 '선생'이라 부르며 그의 집에 자주 찾아온 학생인 '나'로 비롯된 것이다. '나'가 선생에게 인간적인 호감을 느끼게 된 계기는 사실상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그렇게 자주 만나면서도, 나는 선생이 과거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거의 본 적이 없다. 세상사에 초월한 듯 하면서 동시에 어둡고 쓸쓸하게 보이는 선생은 정신적 지주도 돼줄 수 없으며, 더구나 즐거운 말벗도 아니다. 그러나 나는 선생에 대한 존경과 관심을 잃지 않는다. 말수 적은 선생이 가끔씩 수수께끼처럼 내비치는 말들은 나로 하여금 선생의 과거에 대해 캐묻고 싶은 호기심을 갖게 한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선생은 그에 관련된 말은 할 수 없다고 잘라말한다.
"어쨌든 나를 너무 믿어서는 안됩니다. 곧 후회하게 될 테니까요. 그래서 자신이 기만당한 앙갚음으로 잔혹한 복수를 하게 될 겁니다. "
"그것은 무슨 뜻이죠 ?"
"전에는 그 사람 앞에 무릎을 꿇었다는 기억이 이번에는 그 사람 머리 위에 발을 올려놓으려는 결과를 낳는 겁니다. 나는 미래의 모욕을 받지 않기 위해 현재의 존경을 물리치고 싶습니다. 나는 지금보다 한층 쓸쓸한 미래의 나를 참는 대신 쓸쓸한 지금의 나를 참으려 합니다. 자유와 독립과 자기 자신에 충만된 현대에 태어난 우리들은 그 대가로 모두 이 쓸쓸함을 맛보아야 할 것입니다. "
선생은 나에게 아무리 선량하게 보이는 인간이라도 돈과 얽히면 악하게 변한다는 말과 인간을 믿지 않으며 더더구나 자기 자신도 믿을 수 없다고 충고한다. 그리고 자신을 존경하는 나에게, '미래의 모욕을 받지 않기 위해 현재의 존경을 물리치고 싶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런 태도는 그를 한층 더 쓸쓸하고 신비스러운 사람으로 보이게 한다. 그는 유서라 할 수 있는 긴 편지를 나에게 남기는데, 이 시기는 '나'의 아버지가 위독한 시점과 정확히 일치한다. 미루고 미뤄왔던 자신의 이야기를 직접 만나서 하고 싶었으나, 선생은 그 시기를 영원히 놓쳐버린다. 그리고 유서 속에서 선생은 소설의 진행처럼 차근차근하게 자신의 과거를 고백한다.
선생이 인간을 경멸하게 된 제일 큰 이유는, 아버지가 죽은 후 유산을 제멋대로 소유해버린 숙부에 대한 증오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럼에도 선생을 소심하고 쩨쩨한 인물이라고 매도할 수 없는 것은, 소설 전반에서 보이는 인간다움에 대한 경의 때문이다. 어떠한 사소한 배신도 인간 전체를 경멸할 수 있는 커다란 사건이 될 수도 있다. 더구나 외롭고 쓸쓸한 인간에게 있어, 그것은 자신을 지키는 무기가 될 수도 있는 셈이다. 선생은 인간을 믿지 않고 경멸하였지만, 동시에 사랑하고 절대적으로 믿을 수 있는 사람을 만나고 싶다는 강한 열망 또한 가지고 있었다. 딸과 함께 외롭게 살아가는 장군 미망인 집에 살게 되면서, 선생은 그 모녀에 대해 깊은 애정과 믿음을 갖게 된다. 그리고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 사랑인 하숙집 따님을 만날 수 있었다. 그의 거의 유일한 친구인 K는 매우 독립심 강하고 자긍심 높은 인간이었는데, 거의 전근대적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선비정신, 혹은 무사정신이라고 과대해석해서 말할 수 있는 이러한 성정은 내겐 답답하면서도 동시에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그러나 가족에게 의절당한 친구를 위하는 마음에서 함께 하숙집에 살게 되면서 이들의 관계는 종국으로 치닫게 된다.
고전적인 관계이기는 하지만, 선생은 K에 대해서 애정과 질투를 동시에 가지고 있다. K는 모든 면에서 선생보다 뛰어났고, 선생은 자신이 사랑하는 하숙집 딸이 그를 사랑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시달린다. K와 선생은 매우 친한 사이이면서도 마음 속의 개인적인 이야기들은 보통 하지 않는다. 그러던 어느날 K가 하숙집 딸에 대한 사랑을 뜬금없이 선생에게 토로하고 만다. 승려의 아들로써, 정신적 가치와 인생의 독립에 큰 가치를 두고 있는 그에게는 연애조차 피해야 할 욕망의 일종이었다. 선생은 그러한 면을 이용하여 K를 우회적으로 비난한다. K가 선생과 토론하면서 주장하였던 말들이 이제는 K 자신을 공격하게 되는 근거가 되어버린 것이다. K는 선생이 하숙집 딸을 사랑하는지 몰랐고, 선생도 아무에게도 그 말을 하지 않았다. 마음 속에서만 괴로워하다가 갑자기 공격과도 같은 이러한 고백을 듣고나서 그는 결국 미망인에게 딸과 결혼하고 싶다는 의사를 내비친다. 그리고 K에게 이 사실을 어떻게 말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결국 말하지 못하게 된다. 그러다가 미망인에 의해 이 사실이 밝혀지고, K는 며칠 뒤 자살한다. K가 자살한 것을 처음 알게 된 선생이 제일 먼저 한 것은, K의 유서에 '자신이 한 짓'에 대한 언급이 있는지 확인한 일이었다. 만약 그러한 사실이 밝혀진 후 모녀에 의해 경멸당할 것을, 그는 친구 K가 죽은 것보다 더 중요하게 여겼던 것이다. 이러한 사건 후 하숙집 딸과 결혼하지만, 선생은 자신의 인간성에 경멸하여 돌이킬 수 없는 삶을 살게 된다. 그는 병에 걸린 장모를 극진하게 간호하며, 아내에게 최선을 다하고, 한 달에 한 번, K의 묘에 가서 참배를 한다. 이러한 일들은 죄의식을 덜어보자는 꼼수가 아니라, 어쩔 수 없는 행동인 것이다. 그는 이러한 비극으로 인해 '아무 것도 해서는 안되는 자'라는 수식을 자신에게 붙인다. 가장 경멸해야 할 인간이 바로 자신이라는 것은 시시각각 자살충동을 불러일으켰지만, 세상에 혼자 남게 될 아내 생각에 이를 실행에 옮기지도 못한다.
어찌 보면 지극히 단순하고 상투적이라고 치부해버릴 수 있는 이야기를 살아나게 하는 것은 바로 선생과 K를 포함한 등장 인물들의 특성 때문이다. 엄청나게 많은 치정 사건 이야기를 매일 뉴스나 서사 장르를 통해서 보고 듣는다. 대부분의 경우 진저리쳐지고, 지긋지긋하다. 그러나 하나의 배신으로 인해 살아 있되 죽어 있는 것과 다르지 않게 살던 선생의 최후는 비감을 느끼게 한다. 겉으로 그렇게 안정되고 평화롭게 보이던 삶의 내면에는 심장을 갉아먹는 죄의식이 있었다. 선생은 나에게 보내는 유서에서도, 이 일을 아내에게 알리지 말아달라고 말한다. 아내에게만큼은 이런 끔찍한 죄를 대물림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다. K의 죽음은 분명히 그 일 말고도 다른 일들이 중첩되어 있었다. 그러나 살아 있는 선생에게 K의 죽음은, 그 자신의 죽음을 선고하는 일과도 다르지 않았다. 죽은 자가 말하지 못한 것은, 산 자의 마음 속에 크나큰 의문과 죄의식으로 남을 수 밖에 없다. 선생은 자신이 더 이상 무언가를 배우거나 일을 성취할 수도, 인간다운 기쁨을 느낄 수도 없는 인간으로 여겨왔다. 그것은 자신에 대한 선고였다. 자살한 K나 선생, 선생의 아내나 막막하고 평범한 삶을 살게 될 '나'는 모두가 쓸쓸하고 고독한 인생을 감당해야만할 운명을 지니고 있다. 물론 모든 인간이 그와 같은 운명 속에서 살아간다. 그러나 일상성마저 박탈당한다면? 살아 있는 몇 십년의 고통이 죽음에 당도하는 순간의 고통보다 더 크다면? 삶이 죽음보다 고통스러운 건, 시지프스처럼 매일 다시 죽어야 하기 때문이다. 똑같은 고통을 매일 겪어야 하는 것은, 영원한 죽음에 승복하는 것보다 더 고달픈 일인 것이다.
선생의 고백은, 그 자신 스스로가 경멸당해야 마땅하다고 믿는 것과는 달리 섬세하고 기묘한 감동을 준다. 사랑, 희망, 믿음과 같은 인간적 가치를 소중히 여기고 이같은 가치의 배신이 곧 날카로운 칼이 되어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은 이제 극히 드문 감상이 되어버린 것이 아닌가. 적절히 죄의식을 눈가림하거나 탕감하고, 또 얼마든지 행동 양식을 비양심적으로 수정할 수 있는 시대에는 선생의 자살이 낡고 지루한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쉽게 경멸을 거두어들일 수 있다는 것은 진정으로 경멸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어떤 죄의식을 지니고 있는 것인가. 나는 그 죄의식을 지킬 자신이 있는가. 대답은 쉽지 않다. 물론 종교적인 열렬함으로 죄의식을 숭배하는 무리들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는다. 청교도적인 죄의식 따위는 갖고 있지 않으니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의 죽음은 내게 죄의식이라는 테마에 대해 다시 생각할 수 있는 여지를 주었다. 선생은 죽음으로 죄를 탕감한 것이 아니라 죄의식으로 고통받고 있었던 삶에 죽음이라는 선물을 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