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소설 읽는 노인
루이스 세풀베다 지음, 정창 옮김 / 열린책들 / 2001년 3월
평점 :
절판


아마존 유역의 엘 이딜리오라는 마을이 이 소설의 배경이다. 사람들은 수크레 호가 실어오는 물건들과 욕쟁이 치과 의사를 기다렸다. 이 마을에는 원주민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히바로 족은 술이나 한잔 얻어먹을까 하고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는 부류였고, 수아르 족은 비밀스런 아마존 유역에 대해 정통한 사람들이었다. 이 마을의 평화가 깨진 것은 양키의 시체 하나가 발견된 일 때문이었다. 곧 이어 읍장이 사건을 조사하러 나왔다. 유일한 공무원인 뚱보 읍장은 ‘독단적인 전횡을 일삼으며 납득할 수 없는 명목들을 내세워 툭하면 세금을 거둬들였다’. 전임 읍장은 ‘밀림에서는 누구에게나 살아가는 방식이 있고, 그렇게 살아가도록 내버려 두는 게 최선책이라고 믿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노다지꾼과의 싸움 끝에 그는 살해되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뚱보 읍장의 지배 하에 놓여 있는 사람들은 언젠가 그가 늘 때리면서 살고 있는 인디오 여자에게 살해당하기를 바랄 정도였다.

뚱보는 시체를 보자마자 그 시체를 거두어 온 수아르 족에게 누명을 씌운다. ‘눈에 보이는 게 없는 야만인’이기 때문이라는 거다. 그러자 이 소설의 주인공인 ‘연애 소설 읽는 노인’이 나타난다. 그는 양키를 죽인 것이 거대한 살쾡이임을 논리정연하게 밝힌다. 값나가는 물건들은 그대로 있었고, 배낭에서 발견된 것은 바로 작은 살쾡이 가죽이었다. 양키가 새끼들을 죽이자, 슬픔과 고통을 이기지 못한 암살쾡이가 복수를 결심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 살육이 계속될 것임을 알리는 것이라고 노인은 말했다. 할 말이 없어진 읍장이 가 버리자, 치과 의사는 노인에게 책을 건네준다. 그것은 ‘연인들이 사랑으로 인해 고통을 겪지만 결국은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사랑 이야기다. 노인은 우연한 기회에 책을 읽을 줄 안다는 사실을 알았다. 노인의 책 읽는 방식은 경건하기까지 했다. 그는 ‘한 음절 한 음절을 음식 맛보듯 음미한 뒤에 그것들을 모아서 자연스런 목소리로 읽었다’. 그는 ‘도대체 인간의 언어가 어떻게 해서 그렇게 아름다울 수 있는가를 깨달을 때까지, 마침내 그 구절의 필요성이 스스로 존중될 때까지’ 읽고 또 읽었다. 연애 소설을 읽는 것이 노인의 유일한 생의 즐거움이었다.

노인은 아내와 함께 이 마을에 들어왔다. 개간하는 일에 지쳐 고통받고 있는 그들을 수아르 족 인디오들이 도와주었다. 밀림에서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알려준 것이다. 아내는 말라리아에 걸려 곧 죽었다. 그리고 그 때부터 노인은 수아르 족과 같이 생활하게 되었다. 처음에 그는 밀림을 증오하여 밀림이 거대한 불길에 휩싸여 잿더미로 변하는 꿈까지 꾸었다. 그러나 ‘밀림의 세계에 눈을 뜬 그는 주인 없느 푸른 세계에 매료되어 마음속에 간직해오던 증오심을 잊었다’. 그러다 강한 독을 가진 큰 뱀에게 물리고 말았다. 주술사의 집요한 처방 덕에 겨우 그는 죽음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그는 뱀 사건을 계기로 수아르 족처럼 생각하고 느끼게 되었다. 세월이 지나고, 그는 친구 누시뇨를 죽게 한 백인을 독화살 한 방으로 죽일 수 없었다. 그래서 총질을 하게 되었고, 그 계기로 그는 그들 사이를 영영 떠나게 되었다. ‘독화살로 끝장냈더라면 죽은 백인의 얼굴에 그 용기가 남아 누시뇨가 평온하게 눈을 감을 수 있겠지만, 총을 맞았기에 백인의 얼굴이 놀라움과 고통에 일그러져 저 세상으로 떠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다시 마을로 돌아왔다.

암살쾡이에게 살해당한 사람이 자꾸 늘어났다. 결국 살쾡이를 잡기 위한 수색대가 꾸려졌다. 노인 역시 합류했다. 뚱보와 함께 하는 원정은 고역이었다. 밀림의 법칙따윈 귓등으로도 안 듣는 뚱보는 시종일관 불평을 하며 수색을 더디게 만들었다. 더구나 그는 인간을 공격하지 않는 순한 동물인 꿀곰을 잔인하게 살해했다. 급기야 뚱보는 노인에게 암살쾡이를 죽일 것을 부탁하고 자신들은 마을로 돌아가겠다고 한다. 노인은 암살쾡이와 인간에 대해 생각한다.

먼저 싸움을 건 쪽은 인간이었다. 금발의 양키는 짐승의 어린 새끼들을 쏴 죽였고, 어쩌면 수놈까지 쏴죽였는지도 몰랐다. 그러자 짐승은 복수에 나섰다. 하지만 암살쾡이의 복수는 본능이라고 보기에 지나치리만치 대담했다. 설사 그 분노가 극에 달했더라도 인간의 거처까지 접근한다는 것은 무모한 자살 행위였다.(..)

맞아. 그 짐승은 스스로 죽음을 찾아 나섰던 거야.

그랬다. 짐승이 원하는 것은 죽음이었다. 그러나 그 죽음은 인간이 베푸는 선물이나 적선에 의한 죽음이 아닌, 인간과의 물러설 수 없는 한판 싸움을 벌인 뒤에 스스로 선택하는 그런 죽음이었다.(153)

그리고 노인은 죽어가는 수컷을 발견한다. 슬프고 지친 신음 소리를 내는 짐승에게 노인은 연민을 느낀다. ‘노인은 상처 입은 수컷에게 다가가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수컷은 눈꺼풀조차 들어올릴 힘도 없는지 인간의 손길에 자신을 내맡기고 있었다’. 노인은 ‘그 빌어먹을 양키 놈이 우리 모두의 삶을 망쳐놓았다’라고 말했다. 암살쾡이와 인간이 적대 관계인 것이 아니다. 그들의 삶을 무자비하게 짓밟고 파괴한 ‘양키’로 대표되는 백인들과 적대 관계인 것이다. 그리고 암살쾡이와의 최후의 싸움에서 노인은, 승리한다. 그러나 죽은 짐승에 대한 묘사는 가슴아팠다. 인간의 승리가 아니라, 인간에 의한 인간의 패배였다.

‘노인은 짐승에게 다가갔다. 그는 두 발의 총탄이 짐승의 가슴을 열어 놓은 것을 보고 치를 떨었다. 생각보다 훨신 큰 몸집을 지닌 짐승의 자태는 굶어서 야위긴 했지만 너무나 아름다워 도저히 인간의 상상으로는 만들어질 수 없는 존재처럼 보였다. 죽은 짐승의 털을 어루만지던 노인은 자신이 입은 상처의 고통을 잊은 채 명예롭지 못한 그 싸움에서 어느 쪽도 승리자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부끄러움의 눈물을 흘렸다.’(179)

그리고 그는 ‘이따금 인간들의 야만성을 잊게 해주는, 세상의 아름다운 언어로 사랑을 얘기하는, 연애 소설이 있는 그의 오두막을 향해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는 마지막 문장으로, 이 소설은 끝난다.

아마존이라는 공간이 리얼하지 않게 느껴진다는 것은 그런 환경에서 살아보지 못한 문명인의 환상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문명인이라는 게 대체 무엇인가. 이 소설에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 공간에 쳐들어와 파괴와 살육을 일삼는 노다지꾼, 양키들을 통해 현재 지상의 폭력을 야기하는 서구 세력을 은유하고 있다. 양키란 뭐, 너무 직설적인 표현이지만 말이다. 소설은 애초에 분명히 선악을 구분지어 놓는다. 읍장을 비롯한 양키, 노다지꾼들은 분명한 악이며, 자연과 조화롭게 살아가는 수아르 족이나 연애 소설을 읽으며 평화로운 삶을 바라는 ‘수아르 족이 아니지만 수아르 족’인 노인은 선이다. 그리고 그 선은 분명한 태도로 작가의 세계관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그 단순함은 오히려 너무 아름다워 숨막힐 지경이었다. 읍장의 비논리적이고 폭력적인 태도에 대해 반박하는 노인의 모습은, 자연의 지혜 속에서 언제나 겸손한 인디언의 그것이었다. 땅을 개간하는 서구인들에게 ‘당신들은 어떻게 자기의 어머니를 해칠 수 있는가’라고 외치던 인디언의 음성. 그것은 우리가 잃어버린 자연을 각성하게 하는 외침이며, 무지하고 교만한 인간의 어리석음을 질타하는 외침이다. 그러나 우리는, 자연과 함께 사는 수아르 족보다 읍장을 더 닮아 있으며, 양키들과 더 가까운 위치에 있다. 우리 역시 문명이라는 틀에 길들여져 자연을 경외하는 법을 잊었기 때문이다. 문명의 생활 속에서, 인간은 자신 역시 자연의 일부라는 사실을 망각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외국작품을 읽는 묘미는 바로 이런 점이다. 낯선 지명과 낯선 인물들 속에서 어떤 보편적인 위대함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 놀라운 기쁨이다. 단순한 선악구도 속에 이토록 큰 울림을 전달하는 작가의 솜씨에 경탄한다. 제목으로 상상할 수 있었던 이야기와는 완전히 다르다. 노인이 연애 소설을 읽는 것은, 인디오도 아니지만 온전한 문명인도 아닌 그의 정체성을 대변해준다. 연애 소설이란 뭔가. ‘사랑하던 연인이 고통을 겪지만 결국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이야기는, 무수히 많다. 그리고 그 무수함은 언젠가부터 낡고 유치하고 쓸모 없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나 역시 연애 소설을 싫어한다. 현대의 많은 연애 소설은 너무나 패턴화되어 있기 때문에 지루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사랑이란, 건설의 명목으로 파괴를 일삼고, 평화라는 이름으로 전쟁을 일으키는 인간의 단 하나의 약점인지도 모른다. 진실한 사랑 이야기 앞에서 누구나 머뭇거리면서 자신의 사랑을 회상하며, 뭔가 홀린 듯한 아늑한 기분이 들기 마련이다. 사랑 이야기는 인간에게 잃어버린 양심을 되찾게 할 유일한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물론 거기엔 조건이 붙어야 겠는데, ‘진정성’ 있는 사랑이다. 아마존 유역에 살면서 연애 소설을 읽는 노인을 감동시키기 위해서는, 진정성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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