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문학에서 나온 <한 명>을 한 숨에 읽었다. 한 숨에 읽지 않으면 그만 둬버릴 것 같아서 애초에 마음을 단단히 먹고 최대한 거리를 유지를 하면서 무심히 읽었다. 차마 한 숨에 읽지 못할 소설이라는 것은 읽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는 바였기에.
<체르노빌의 목소리>를 읽으면서 느꼈던, 혼란과 불안, 천재지변 보다 더한, 인간이 부려놓은 변고 앞에서의 죄 없는 목숨들에 대한 연민과 내가 어찌할 수 없음에 대한 번뇌가 떠올랐다. 개인의 고통은 처참했지만 그런 사실을 마주 대하고, 그 기억들을 환기하고 지속하려는 노력이 책으로 묶여져 나왔다는 것은 경이로웠고, 감동이었다.
소설 <한 명>에는 감동이 있다. 감동이란 단어가 적확한 표현은 아닐진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순간에 밀려 온 감정의 격함을 표현할 단어를 찾지 못했다. 실제의 증언과 소설적 짜임이 혼재되어 픽션인지 논픽션인지 헷갈려가며 읽어야 하는 그런 순간에도 울분과 처절함은 가슴에 남아 마지막 책장을 덮고는 꺼이꺼이 울고 말았다.
자그마치 80년 전의 일이다. <소년이 온다>를 읽으며 광주가 벌써 40여년전의 일이 되었구나. 놀랐다. 직접적으로 체험했다 할 수 없는 나 같은 사람도 그 일이 엊그제 일인 것만 같은데. 당사자나 주변인들에게 그간의 시간은 어떤 속도와 어떤 무게감이었을까. 스마트폰을 손에서 놓지 않고 종편 프로그램들을 섭렵하는 지금의 젊은 세대가 광주를 느낀 다는 것은 참 지난한 일이겠구나. 했다. 그런데 무려 80년전의 일이라니, 옛날 옛적의 일이라고 퉁 쳐도 무방할 그 긴긴 시간동안 아무 것도 해결 된 것 없이 해결 할 수 없이 그 상처를 안고 살아왔을 한 명 한 명의 아픔을 지금이라도 같이 새기고 싶다.
개인적인 경험 없이 동질감이나 공감대를 느끼기에 역사는 너무 멀리 있다. 그런데 소설책 한 권이 그 과거를 지금 여기에 들여 놓았단 생각이 들었다. 강 건너 불구경할 뻔한 일을 내 일로 돌려 놓는 일을 소설이 하는 구나. 소녀상 앞에서 철야 농성을 하는 일은 멀리 있겠지만 책 한 권은 바로 앞에 있다. 그냥 책장만 넘기면 될 일이니 그 정도는 해야하지 않겠는가.
김숨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몇 년전 <현대문학>을 정리차 들춰보게 되면서이다. <현대문학>에 연재되는 소설을 읽게 되었고, 김숨의 이름을 기억했고, <한 명>을 읽고 <L의 운동화>를 읽었으니 나름 이번 주는 김숨 주간이 된 셈이다. 그리고 <현대문학.2016.09>도 읽었다. 김숨의 인터뷰를 읽기 위해 손에 들었지만, 향수를 되새기게 되었다.
그래 나도 한국문학을 참 사랑하던 시기가 있었지..잠깐 감상에 빠졌다. 문학월간지가 나오기를 기다려서 서점에 가서 사곤 했던 시절이다. 결혼하고 육아기를 거치면서 그 모든 것이 다 단절되었는데, 이제와서 다시 문학 월간지를 보니 감회가 새롭다. 균형잡힌 독서가 하고 싶어, 아니 해야 한다는 강박은 도서관에서 안 읽어도 늘 이것 저것 산만하게 빌려오는 구실이 되었는데. 문학잡지 한 권이면 그렇게 번잡한 일을 벌이지 않아도 되었을 것을.
역시 잡지는 영양가를 골고루 신경 쓴 한 상 같은 느낌이다. 덕분에 시와 소설, 평론과 인터뷰까지 맘 편하게 훑어 볼 수 있었다. 요즘 새로 창간된 핫한 감각적인 문예지들이 인기지만, 나는 왠지 그들에게 마음이 동하지 않았다. 늙어 그런가, 옛 것이 좋다. 김숨 덕분에 한국문학에의 애정이 되살아 났고, 문학월간지에 대한 관심도 다시 살아났다. 감사할 일이다.
(현대문학에 실린 김숨의 인터뷰는 질문과 대답이 모두 훌륭하다. <한 명>과 <현대문학>을 세트로 읽기를 권한다.)